잃어버린 에덴
태초에 정원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국 같은 향기가 공기를 마취시키는, 인간의 언어로는 감히 표현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환상적인 정원 말이다. 즙이 흐르는 달콤한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가 언덕에 즐비하고, 향기로운 풀과 꽃은 양탄자처럼 땅을 덮었다. 천사같이 뽀오얀 말과 양은 이 복된 땅을 밟으며 뛰놀았다. 사자는 언덕에서 새들의 노랫소리를 즐겼다. 그곳에 사는 생명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뜻이 통했고, 영원히 지속되는 즐거움 속에 산뜻한 공기를 호흡하며 살았다. 고통도 죽음도 없는 그곳은 에덴동산이라 했다.
구름 사이로 황금빛 광채를 뿜는 해가 언덕을 비추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듯 빛나는 말이 코를 킁킁거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기 에덴동산에서 우리는 모두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아담과 그의 갈비뼈로부터 태어난 이브는 함께 벌거벗고 서서 신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사이 나무 뒤에 숨어서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뱀이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쉬이이 쉬이이, 선택이 중요하지. 바로 선택이 색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거라고.”
하느님의 말씀이 끝난 후 두 남녀는 아무 걱정 없이 뛰놀았다. 실컷 즐거움을 만끽한 후 어느덧 이브의 발걸음은 향기로운 과일나무로 향했다. 물론 그곳에는 다리도 없이 배로 기어 다니는 불길한 동물, 뱀이 숨어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뱀은 이브를 살살 꼬드겼다. “너는 모든 것을 가졌구나. 아름다운 미모와 멋진 남편을. 하지만 지금은 뭔가 부족하지 않니? 이 과일을 먹게 되면 단물에 기쁨이 배가 되거니와 아주 똑똑해질 수 있단다. 마치 그분처럼. 어때, 하나 따 줄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이브는 아담과 함께 결국 과일을 베어 물었다. 과일을 먹는 동안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는 않는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정원 곳곳에서는 여전히 신비로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향기는 진동했지만, 그들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잎과 나뭇가지로 몸을 가리고 싶었다. 저 구석에서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천사는 안타까움에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노랫소리마저 잃은 채 그저 허공에서 헛날갯짓만 했다. 드디어 그들을 밝게 비추던 빛이 먹구름에 덮여 희미해지면서 묵직한 저음의 음성이 천둥 치듯 동산에 울러 퍼졌다. 지상의 모든 생명과 대기와 바위까지도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누구든 이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을 테고, 아담과 이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테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한 한 점의 그림만큼 이 이야기를 더욱 구체적으로 해주는 것도 드물다. 10여 년 전 방문했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는 종교 개혁 시기에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작품이 여러 점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작가가 여러 번 그린 <낙원> (1530)이다. 나는 가만히 서서 화면을 응시했다. 뽀오얀 짐승이 한가로이 거니는 싱그러운 들판에서 시선을 그림의 왼쪽으로 옮기자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는 분노한 천사를 피해 도망가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보인다. 그들은 수치심과 후회에 범벅이 되었다. 영원히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할 안타까운 운명, 그게 정말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어버린 걸까?
고통과 죽음 대신 아름다움과 즐거움만이 있는 그곳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일까?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상상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테(Dante Alighieri)의『신곡』, 밀턴(John Milton)의『실낙원』에서부터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가 쓴 또 하나의 음울한 디스토피아 소설,『홍수의 해』 등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 책에서 애트우드는 ‘신의 정원사들’이라는 신흥 종교 집단을 통해 ‘물 없는 홍수’인 바이러스의 대재앙이 임박한 세계에서 낙원을 재창조하려는 시도를 상상했다.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지만, 그들 속에 남아 있던 희망의 불씨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 희망을 이어받아 나 역시 나만의 낙원을 꿈꾼다. 비록 아담과 이브가 머물렀던 그 완전한 낙원에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이야기는 바로 낙원을 향한 발걸음이며 그 흐릿한 길 위에 머무른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