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주

by 발걸음

내가 사는 파주의 신도시는 과거의 흔적이 삭제되고 그 자리를 고층 아파트, 주택, 상가, 일자로 뚫린 도로가 덮은 여느 수도권 신도시와 다르지 않은 그런 곳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창밖으로는 약 2, 3km 거리를 두고 나지막하게 솟은 심학산 등선이 보였고 그 앞으로 띄엄띄엄 논밭과 덤불이 있었다. 가을에는 그 사이를 흐르는 개울(물론 악취를 풍기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양옆으로 황금빛 갈대가 마지막 온기 속에 하늘거리며 곧 공기가 차가워질 것이니 이 시간을 한껏 즐기라고 넌저시 귀띔했다. 정발산 언덕을 넘어 호수 공원 한 바퀴를 돌며 두 시간가량의 아침 산책을 즐겼던 일산 살이를 정리하고 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나마 논밭과 들판 사이로 난 농로를 이리저리 걸을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겐 큰 위안이었다.


시야가 점차 초록색으로 물드는 5월 모내기 철이 되면 어느새 겨울 기러기가 떠나고 텅 빈 논에 물이 차오르고 곧 여린 연두색이 덮어나갔다. 그 사이를 키 큰 해오라기들이 한가로운 산책하는 듯 기다란 뿌리로 사냥을 했다. 매미가 귀를 찌르는 소리로 울어대던 무더위가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논은 어느새 누렇게 변해있었다. 그 색깔. 묵직하게 영근 쌀 낱알로 고개를 푹 숙인 그것들은 마주칠 때마다 경의로움을 선사했다. 그건 자연이 계절의 변화를 공표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근처 농가의 감나무도 때를 맞추어 주황색으로 익은 큼지막한 감을 저 멀리서 뽐내곤 했다.


늦여름 해 질 녘에는 하천 옆길을 산책하다 자그마한 옥수수밭에 들러 미처 선택되지 못하고 남겨진 작은 옥수수 몇 개를 서리하기도 했다. 갓 수확한 그것들을 삶는 동안 집 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향기. 동생과 함께 솥에서 금방 꺼낸 뜨거운 옥수수를 급한 마음으로 베어 물며 우린 뜨거워서 놀라고 맛있어서 더 놀랐다. 몽땅 수확하지 않고 잔잔한 것들을 남긴 농부에게 땅에게 감사하는 시간. 우리는 밀레(Jean François Millet)의 그림에 나오는 이삭 줍는 여자들이었다. 쓸쓸한 겨울이 곧 오더라도 내년에 다시 이곳에서 옥수수가 자랄 것이며 그때까지 딱 1년만 기다리면 된다는 사실은 무척 위안이 되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하지만 몇 년 후 토지 보상이 성사되고 소농들이 하나 둘 떠나버린 자리는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싹 다 밀어 누우렇기만 한 헐벗은 흙을 드러냈고, 이후 몇 년간 흙바람을 일으키던 썰렁한 들판은 금세 도로와 아파트의 행렬로 가득 찼다. 수로 근처에서 긴 머리칼을 휘날리던 수양버들과 새들에게 잔칫상을 차려주던 뽕나무는 다 어떻게 되었을까? 자전거길 양 가를 화려하게 감싸던 황금빛 갈대는 이제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그것들이 사라지자 그 땅과 수많은 산책과 동행자들에 대한 내 기억도 점차 가물가물 사라져 버렸다.


파주에서 겨울을 지낸다는 것은 새벽에 휴대폰에 울리는 잦은 동파 경고음에 겁을 먹지 않고 수도관이 지나는 곳에 밤새 난로를 켜놓을 줄 알고, 혹여 보일러가 고장이라도 난다 해도 호들갑 떨지 않고 태연하게 외투를 껴입은 채로 수리공을 기다리며 하룻밤쯤은 거뜬히 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문 밖 거리에 인적이 뜸해지고 놀이터가 유령처럼 변하더라도 꿋꿋이 웃으며 버틸 수 있어야 하고 아이들 웃음과 고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3, 4개월은 이웃 얼굴을 보기가 힘들더라도 절망에 빠지면 안 된다.


파주의 긴긴 겨울을 미소를 머금고 나기는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초겨울 대기가 희뿌연 우울한 날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찾아올 봄을, 즐거웠던 공원에서의 산책을, 여름에 밭에서 딴 딸기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괴롭기 그지없다. 그땐 추위가 아직 낯설어서 기온이 2, 3도만 더 떨어져도 얼어 죽는다고 엄살을 피우기 일쑤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몇 주는 아직 몸이 적응하지 못했기에 그렇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야만 한다. 누워있는 내게 다가와 어서 나가자고 코로 툭툭치고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조바심을 내는 보더 콜리, 맥스 때문에라도. 한 겹, 두 겹, 세 겹 주섬주섬 껴입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온몸을 감싼 후 집을 나서면 마치 꿀단지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미끄러져 들판을 데굴데굴 구른 탓에 온몸이 잎이며 나뭇가지로, 또 나를 쫓아온 무시무시한 말벌로 뒤덮인 동화 속의 악당처럼 된다.


맥스가 빨리 오줌통을 비우고 어서 큰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대문을 열기도 전에 새해 금연 결심처럼 굳세게 마음에 자리 잡는다. 길을 나서면 모든 게 황폐해 보인다. 죽은 듯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여전히 마른 잎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인도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 바람에 요리조리 구르고 매서운 강풍 한방에 의지할 곳 없이 먼지처럼 으스러지며 날아가는 가운데 서있다 보면 본래 활기찬 성격이라 해도 생기를 잃을 수밖에 없다. 내 눈을 즐겁게 하는 건 하나도 없다. 이 무미건조한 거리와 이 잔인한 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에 머물 수만 있다면! 내게 그럴 만한 자유가, 그저 남쪽으로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영원히 봄이기만 한 정원이 있다면! 하지만 나와 달리 맥스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겨울도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야 언제나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르고 공기도 바뀐다. 언제 그랬나 싶게 몸과 마음도 추위에 적응하는 순간이 온다. 해가 넘어가고 2월쯤 되면 영하 20도를 육박하는 기온에도 발랄할 수 있다. 이미 운 좋게 도로 양 가에 줄지어 선 스트로브 잣나무 위에 밤새 내린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환상적인 겨울 풍경도 몇 차례 즐긴 후인 데다 가끔 하늘이 맑게 개어 인상적인 구름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오히려 내가 맥스를 졸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영하 17도의 강추위 경보가 있는 아침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야외에서 테니스를 치고(물론 꽁꽁 얼어붙은 손발을 녹여야 하지만), 밤새 폭설이 내린 후 다음날 아침에 물에 뛰어들기 위해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차를 수북이 덮은 눈을 불평 한마디 없이 걷어낼 때, 그때는 이 계절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대신 온전히 겨울을, 앙상한 가지의 아름다움을, 뼈대만 남은 공원의 신비로움을, 털옷을 껴입은 목련꽃 봉오리를, 떡갈나무줄기에 붙어서 자라는 여전히 초록색인 이끼의 세상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긴다.


겨울을 적당히 즐기고 여유만만해지면 오히려 기온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고온이 유지되는 탓에 땅이 온통 질퍽거리는 진흙탕으로 변할 때는 걱정하기까지 한다. 산책길에 혹여 낯익은 이웃이라도 마주치면 마치 농사 꽤나 짓는 사람처럼 “겨울 파주 날씨가 이렇게 따뜻하다니, 큰일이에요. 겨울이 따뜻하면 병충해가 기승을 부린다던데 농사를 망치겠어요.”, “지난여름에 과일이 얼마나 비쌌던지 쯪쯪쯪, 계절이 예전 같지 않으니 농사짓는 사람들도 힘들고 우리 같은 사람들도 과일 실컷 먹기는 올해도 글렀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젠 와인 값도 엄청나게 오른데요. 와인 생산지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는 추세라나요.”와 같은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래도 겨울은 좀처럼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푹 덮는 따뜻한 모자와 귓속 깊이 음악을 들려줄 아이팟을 장착한다. 온몸을 완전 무장하는 외투를 입고 입과 콧구멍 속으로 들어오는 면도칼처럼 시린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크게 한 번 웃어본다. 맥스를 끌고 집 앞 언덕에 있는 공원으로 간다. 그곳에 도착하면 우리 둘은 산책로를 걷는다. 돌면서 걷는다. 타원형으로 몇 번 돌다가 지겨워지면 경로를 변경해 8자를 그리며 돈다. 아침에도 돌고 밤에도 돈다. 다른 사람들도 뱅글뱅글 돈다. 그래서 좀 전에 인사한 사람과 몇 번이고 계속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 만날 때마다 인사하기도, 그렇다고 모른척하기도 어색해서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저 하늘에 어떤 새가 이리도 예쁘게 울꼬?’ 그 사람한테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시시한 공원은 아니다. 규모만 빼면 꽤 괜찮다. 이른 봄에는 부지런한 진달래가 반기고 가을에는 하늘에서 밤과 도토리가 머리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린다.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저귀는 박새 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지겹지 않다. 이마저도 없었더라면! 그건 너무 끔찍한 상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갈증 때문에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동네에 탁 트인 들판이 있다면, 그곳에 한없이 머물고 싶은 벤치가 있다면, 걸어서 주말 하루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커다란 공원에 갈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새 소리만 들어도 좋을 숲이 있다면!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