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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가노

by 발걸음

한편 둥글고 자그마한 잎이 줄줄이 달린 오레가노는 여러 해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집 안마당에서는 좀처럼 안착하지 못하고 겨울 추위에 동사해버리곤 했다. 그러던 것이 그해 기적적으로 북동쪽 담벼락 아래 화단에서 흙을 뚫고 올라와 조그마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것이 우연히 떨어진 씨앗에서 발아한 것인지 겨우내 생존한 뿌리에서 새싹이 올라온 덕인지는 불확실했지만 오레가노의 출현에 반가움을 금치 못한 순간 문득 지난여름,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인근에 위치한 불교 공동체인 플럼빌리지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이미 몇 년간 내 아이와 두 조카를 함께 키우느라 고단했고 우리 넷은 어느 날 집채만 한 배낭을 메고 일주일의 여름을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날은 보슬비로 시작했다. 가족 피정 참여자들이 한데 모여 종탑 주변에서 보슬보슬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고 있었다. 가느다란 빗방울은 곧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을 적셨고 비를 피하러 정원 저편에 서있는 고목으로 달려간 어린이들은 이내 거대한 나뭇가지를 기어오르며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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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하늘이 포근한 빛을 한줄기 내뿜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소곤거림은 자리를 비키고 주변은 정적에 휩싸였다. 문득 앞을 내다보니 저 멀리 맨 앞쪽에 갈색 승복을 입은 스님 몇 명을 필두로 이미 꽤 긴 행렬이 들쭉날쭉 줄지어 언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지시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데도, 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데도 마치 하나가 된 듯한 움직임을 보면서 묘한 힘을 느꼈다. 나도 무리의 꼬리 어디쯤 따라붙어서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젖은 촉촉한 땅의 느낌이 신선해 돌아올 때 신을 요량으로 신발을 벗어 자두나무 아래 가지런히 놓아둔 채였다. 자두나무가 줄줄이 서있는 과수원을 지나 나무에서 딴 자두를 한입 베어 먹기도 하고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를 바라보다 보니 언덕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그곳엔 이미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쉬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언덕에 홀로 앉아 아래쪽으로 펼쳐진 들판과 노랗게 장관을 이루는 해바라기 밭과 저 멀리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겨운 마을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발밑에 깔린 자그마한 풀에 눈길이 갔다. 그건 꽤 익숙한 모양으로 줄기에는 작고 둥근 이파리가 줄지어 달려 있었고 끝에는 역시 자그마한 보라색과 흰색의 꽃이 줄줄이 피어있었다. 정체를 궁금해하며 조심스레 잎사귀 하나를 떼어 코 끝으로 옮겼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이 오레가노라는 사실을 알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 식물은 내 발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덕 전체를 집으로 삼은 듯했다. 물론 다른 들풀을 쫓아내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파주의 안마당에서는 몇 년을 애써도 곧 죽어버리곤 했던 이 작은 식물이 이곳에서는 땅의 마법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벌과 대기와 토양은 풀의 미래가 앞으로도 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땅이 오레가노에게 한 것처럼 나도 이 아이들에게 과연 좋은 토양일까?’ 문득 궁금했다. 내가 보기에도 아이들은 집에서 복닥복닥 지내는 것보다 여기서 훨씬 행복했다. 아이들한테는 내가 필요 없어 보였다. 내 마당의 오레가노도 스스로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플럼빌리지의 언덕을 터전으로 삼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땅이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 물론 자연을 거슬러 땅이 억지로 식물에 맞추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곳엔 오레가노가, 저곳엔 쑥이 더 어울릴지도 모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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