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 식단하기

by 주하



3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겨우내 오지 않던 눈이 요 며칠 사이로 펑펑 내려 하얀 설경을 이루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 아이 등교 날에도 눈이 가득한 길이었다.

아이의 걱정은 기우였고 금세 새 친구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어린이의 세계를 누리고 있다.

반면 엄마인 나는 버퍼링이 심했다. 아이만 잘 적응하면 될 줄 알았는데 정작 내가 새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할 줄이야...

눈 꺼풀에 알러지가 생기고 목은 따끔거리고 마음은 묵직했다.

신경은 작은 것에도 뾰족했고 곤두서있었다.

묵직한 마음에는 공백이 없다. 어느새 신경 박스들이 내면 한가득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잘 적응할까라는 의문 박스.

아이가 친구 사이에 배려심 있게 행동할까라는 걱정 박스.

아이 핸드폰은 알뜰폰으로 아니면 키즈폰으로는 선택 박스.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 모임에 참여하는 관계 박스.

피아노 학원은 어디로 언제 보내지 하는 염려 박스.


마음 가득 쌓인 이 박스들을 보고 마음에 새로고침 버튼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식단은 몸에 군더더기 지방과 살을 빼고 싶을 때 인풋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꼭 필요한 영양소와 칼로리를 계산하여 하루에 적정량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건강하고 가벼운 몸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 마음에도 똑같이 식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마음은 공간이나 몸무게같이 물질세계 너머의

정신세계이기에 관리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만큼 더 주의 깊은 꾸준한 관심을 요한다.

마음이 무겁거나 버거울 때 나는 마음 식단을 한다.


마음속 박스들을 꺼내어 종이 위에 나열한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박스들 한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 불필요한 박스들, 나중에 해도 크게 영향이 없는 것들은 뒤로 미룬다.


아이 친구와 피아노 학원에 같은 날 시작하기 위해 시간을 맞추려 했으나 4월부터 다니기로 변경했다.

독서 모임도 양해를 구하고 4월로 옮겼다. 큰 행사 두 개가 이월되니 마음의 공백이 크게 들어선다.





하루에 나를 챙겨주는 작은 데이트 시간을 선물한다. 이는 마음이 건강한 스무디를 마시는 것과 같다.

요 한 달간 온통 아이의 세계를 염려하느라 정작 나를 돌보는 시간은 눈 씻고 찾아도 없을 정도로 부재했다. 식탁 위에 며칠 전 선물 받은 꽃병을 바라보고 가만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이게 뭐라고 마음이 몽글몽글 거린다. 생일선물로 받은 꽃을 제대로 쳐다도 못 보고 있었나 보다.


좋아하는 시집을 꺼내어 다이어리에 그려보기.

반신욕 하며 소설 읽기.

바닷가 산책하기.

떡볶이 국물에 밥 볶아 먹기. 등등




다이어리 캘린더의 공백을 확보한다.

앞에서 큰 박스들을 뒤로 보냈다면 이제는 작은 박스들을 정리할 시간이다. 캘린더에 빼곡한 일정을 지우면 하루에 여유가 드리운다. 잦은 일정(꼭 누군가 만남이 아니어도 내가 계획한 일들까지)은 쫓기는듯한 예민함과 몸의 피로도를 상승시킨다.

이는 아이들에게 잔소리 증가와 삐걱거리는 집안 소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면 텅 빈 공간이야말로 너그러운 엄마의 원천이고 나 자신에게도 친하게 다가가게 되는 배경이 된다.






힘을 뺀다. 마음에 잔뜩 들어간 힘을 뺀다.

3월 한 달간 가장 많이 한 말이 있다면 '힘들어!'였을 정도다.

한 것도 없이 힘이 들어!를 달고 살았다. 힘이 드는 이유는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왜일까?!

새로운 환경에 예민해진 마음도 있겠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잘하기! 가 깔려있다.

잘하기! 가 분명 성의와 정성을 첨부시키기에 순기능도 갖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잘하려고 마음먹는 순간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잘하려는 마음을 비웠을 때, 자연스럽게 나다움으로 흘러갔을 때 보다 즐겁고 가볍게 일을 마무리할 확률이 높다.



초등학교 입학과 적응에 있어 첫 학부모인 책임을 잘 해 내고 싶었다. 지나고 보니 다 욕심이었다.

조금 느려도 조금 덜컹거려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아가면 다 본연의 속도로 본연의 미숙함으로도 잘 굴러가는 것을. 욕심이 앞서고 의욕이 앞서다 보니 힘이 들어가고 그 들어간 힘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다.




마음 식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을 빼는 것이다.

즉 받아들임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이는 수용성이다.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긴다.

잘하기! 보다 나다움을 회복한다.

적응이 빠른 아이 친구네에 피아노 학원 일정을 맞추려는 것을 비우자 아이와 나에게 맞는 속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 식단은 불필요한 내면속 잡음과 신경 박스들을 제거하여 커튼 뒤에 가려있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마음 식단은 잃어가는 나를 되찾게 하고 삶에 여유를 움트고 너그러운 나를 짓게 한다.

가볍고 편안한 마음이야말로 건강한 삶과 인생으로 귀결되는 삶의 본질적 가치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