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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취향 생활자

by 주하

미니멀라이프를 여러 해 뒤로 보내자 삶은 정돈되고 갈수록 가벼워갔다. 큰 책장을 가득 채우던 책들(결혼 전부터 내가 소장한 장서들)도 거의 비우고 10권이 채 되지 않았다. 신혼여행 때 남편에게 선물 받았던 스키니핏 청바지같이 더는 입지 않지만 버리지 못했던 옷들도 비웠다. 추억이 어린 편지들, 오래된 일기장도 사진으로 남기고 보내주었다. 중복되는 생활용품들도 하나씩만 남기고 정리했다. 1년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도 집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매일 하나씩 비우던 습관이 갈 곳을 잃기 시작했다. 잘 보이던 불필요한 물건이 이제는 노력으로 찾아내야 하는 과제가 된 것이다. 계속 이어온 반복으로 비움의 벽에 다다른 것이다. 비움의 벽에 다다르면 더 이상 주변에 비울 것이 보이지 않게 된다. 비움의 정점에 오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5년여 전 막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했을 때 큰 동기가 되었던 여백이 그득한 공간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냥 가벼운 행복감으로 충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곳에 허전한 공허함이 깃들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가볍고 단정한 공간 안에 서있는데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우울감이 맴도는 걸까...


이 의문을 던지고 집을 처음 보는 장소인 마냥 관찰해 보았다. 그러자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 물건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공간의 분위기를 살피지 못했다. 물건이 떠난 자리는 여백이 드리우고 덕분에 더 넓은 쾌적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부재한 것 하나, 바로 취향이었다. 집에 거주하고 있는 나와 우리 가족 고유의 색과 특성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무채색 배경은 무기력한 감정의 배경으로 자리했다.

비움에 심취한 나머지 비움을 위한 비움을 하게 되었고, 좋아하는 기호를 제공하는 물건들마저 모두 비웠던 것이다. 텅 빈 공백이 주는 가벼움도 좋았지만 내가 진짜 바라던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년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배경이 되었던 '본가'를 떠올리면 긍정의 단어보다 부정의 언어가 우선시된다. 추억 속 집을 떠오르면 의례 '따스하다', '포근하다', '안락하다', '즐겁다' 같은 것들일 테지만 나에게는 '갑갑하다', '벗어나고 싶다', '우울하다' 같은 회색 색깔이 대부분이다. 다양한 이유 중 가장 큰 배경을 추적해 본다면 바로 취향의 부재였을 테다.

나만의 공간도 없었지만 나의 기호를 반영할 공간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것은 부모님의 관리였고 소유였다. 내가 꾸밀 수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당신들의 취향으로 채우지도 않았다. 집에는 그저 tv 소리와 잡동사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집 어느 곳 하나 우리만의 색깔은 존재하지 않았다.

취향이 이토록 중요하다면 과연 취향이란 뭘까. 취향은 나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겠다.라고 말하면 참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컵, 그릇,

끄적인 그림이나 메모,

직접 만들어본 전등,

여행에서 모은 소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집 안 곳곳에 군집하고 있는 작고 소소한 물건들의 컬렉션이 모여 그 사람의 취향을 드러낸다.

누군가에게는 잡동사니처럼 보일지라도 나에게만은 나를 이루는 기호의 반영이며 존재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내 고유의 색도 잃어버리고 점차 나를 알기 어렵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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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 있는 집은 아름답다. 물건의 개수가 맥시멀이던 미니멀이던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색이 집에 입혀져 있냐는 것이다. 나만의 감성과 기호가 들어가 있는 공간에는 애정이 깃든다. 주인에게 사랑받는 공간은 다시 그 애정을 사람에게 돌려준다. 집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도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는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을 전하므로.

나의 취향을 확고히 알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나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서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주변 공간의 분위기를 관찰하고 되찾는 과정을 통해 잃어버리고 있던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나의 기호를 알아가고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나에 대한 확실한 취향이 쌓이고 이는 든든한 신념의 뿌리로 자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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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내가 잊고 지내던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모두 잠든 밤 갑자기 떠오른 구절을 책 속에서 바로 발견하는 즐거움.

와인이 영롱한 와인잔에 데구루루 구를 때의 달콤 쌉싸름함.

찻잔에 오래도록 감도는 깊은 따스함이 전하는 편안함.

아날로그 사진이 전하는 손끝에 만져지는 오래전 그때의 향수.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물론 그 분야가 예전처럼 넓고 방대하진 않다. 유쾌하게 나답게 채워주는 몇몇의 카테고리에서 만큼은 마음에 검열관을 몰아내고 여유롭게 소유하기로 한다.


미니멀라이프라고 해서 취향이 하나도 없다면 그런 라이프는 나에게 필요 없다.

비움의 벽은 막다른 길이 아니었다. 단순한 취향 생활자라는 새로운 단계로의 출발이었다. 이제 집은 나에게 공허한 공백의 공간이 아니다. 단순한 삶 속에서 곳곳에 나의 취향과 기호와 색이 담뿍 묻어나는 그런 일상을, 그런 일상이 배어 나는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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