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영 Aug 02. 2022

나도 시건방지던 때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대학교 다닐 때 즈음. 대학교 때 미팅을 하거나 누군가 무슨 과에 다니냐고 물어보면 무용학과에 다닌다고 조금은 자랑스럽게? 대답을 할 때 즈음이다. 그 때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시건방지던 때였던 것 같다. 왜냐면 누군가를 쉽게 무시해버리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무시하던 유형의 첫 번 째 사람은 기껏 무용학과에 다닌다고 말해주었는데 “아하. 그 에어로빅 같은 거 하는 건가요?”라고 답하는 사람이다. 그럴 때 친절히 무용이 뭐라고 답해주는 대신 세상 시건방지게 무용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이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기억에 미안해진다. 돌이켜보면 더 무식한 건 나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꽤나 여럿 만났더랬다. 많은 사람들이 무용을 모르고 무용에 관심도 없었고 무용은 말 그대로 무용(아무짝에도 쓸모없는)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만일 그 때 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친절히 설명하고 보여주고 했다면 지금 무용의 대중화는 이루어졌을까?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무용 글을 쓰고 무용치료사가 되고 다시 글과 춤을 병행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장 좀 보태면 어느새 30여년이 되어가는데 무용계의 오랜 숙원 무용대중화는 마치 새로운 과제처럼 어디를 가나 늘상 첫머리에 오르내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용이 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에어로빅이냐고 묻던 것에서는 확실히 바뀌어 있다. 대답의 장르도 바뀌었다. 어느 정도 과업이 이루어 진 것일까? 지금은 “걸그룹이 추는 거. 그게 무용이죠?”라고 말한다. 아. 뭐,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 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또 그게 춤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고 어쨌든 체육분야에서 예능분야로 건너온 대답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바뀐 것은 또 있다. 이런 답변을 들었을 때의 나의 반응이다. 나는 확실히 겸손해져있다. 한 사람이라도 춤을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전혀 기분나빠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되도록 친절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웃으면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저 어떤 움직임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면 춤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였다면 지금의 나의 대답도 매우 심하게 무시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때 나는 높이 뛰고 많이 돌고 많이 늘려야 좋은 춤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춤이 아니었다. 나를 전혀 표현하지 못하는 동작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그 때 만나 무시했던 몇 명의 사람에게 춤을 즐기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유연하게 생각했을 텐데. 요 며칠 젊은 무용가들의 행동이 당돌하다는 생각에 다소 당황했더랬다. 그러다 생각해본다. 나도 어릴 때, 지금에 와서는 와장창 무너진 어떤 ‘견고한 성’같은 주관들이 있었지라고. 그건 누가 알려준다고 쉽게 바뀔 수 없는 것들이었으며 시간과 경험들이 쌓여야만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세상이 변한 만큼 세대도 변해갈 수밖에 없고 나 때랑은 또 다른 각박한 환경가운데서 적응해가느라 이들도 치열하게 사느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이 정리되었다. 아. 다행이다. 난 내가 꼰대인가 해서 더 서글펐는데. 아직은 유연하게 내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전 18화 춤추는 아이들–춤으로 나누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