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 우리 탄탄님들은 어떤 모양으로 봄을 즐기고 계실지 사뭇 궁금해진다. 오늘 외출하며 보니 거리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활기차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시민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이 봄이 다른 봄과 유달리 반가운 것은 3년째 우리를 괴롭히는 펜데믹이 드디어 끝을 향하고 있다는 기대감때문은 아닐까? 누적확진자가 천오백만명을 넘어서는 가운데 거리두기도 완화되고 이제 곧 마스크도 벗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데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렌다. 무엇보다 마스크 빨리 벗고 싶다.
지난 3월부터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과 <움직임 놀이터>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마스크 쓰고 최대한 개인방역에 힘쓰면서 재밌는 시간을 만들어보려 애쓰고 있다. 코로나는 수업의 방법에도 굉장한 변화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지난주에는 아이들과 풍선을 가지고 자신의 신체를 인식하고 건강한 또래관계를 맺도록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수업은 서로 최대한 접촉하지 않는 방법들을 택하고 있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풍선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던 활동이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진행되었다.
신체인식을 위해 진행하던 활동 역시 전이었다면 친구와 함께 온 몸으로 하던 것을 각자 개인움직임으로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이동경로 대신 되도록 열을 맞춰 진행하거나 전체가 움직이는 대신 대기하다가 자신의 차례에 움직일 수 있도록 진행한다. 신기한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의 공간을 지키라는 교육(교육이라 쓰고 잔소리라 읽는다)은 계속된다. 자기의 공간을 지킬 수 있어야 남의 공간도 존중할 수 있다. 남의 물건도 자기 물건인양 함부로 만지는 아이나 조금만 기분상하면 친구의 몸을 때리는 아이, 선생님만 보면 무작정 기대는 아이들의 세션은 공간 인식의 부족함에서 시작한다.
‘코로나로 강제 거리두기를 훈련한 아이들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 있으니 자기의 공간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공간을 배려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 없이 나의 교육(잔소리?)을 필요로 한다. 한참 이유가 뭘까 고민했다. 결론은 자발성이다. 아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은 거리두기가 아닌 접촉이다. 서로 부둥켜안고 손을 맞잡고 옹기종기 모여 재잘거리고 싶어도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강제적으로 거리두기를 시켰다. 내 수업과의 차이는 강제적이냐 자발적이냐이다. 정서적 변화를 일으키려면 자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질 때 변화가 일어난다. 놀이를 통해 움직임을 통해 자발적으로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이 아닌 강제경험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뿐이다.
어서 위드코로나가 이루어져 거리지키는 교육에 앞서 충분한 접촉을 시도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싶다. 접촉이 주는 안정감과 연결된 느낌을 거리두기에 앞서 아이들에게 경험시키고 싶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캥거루 케어는 미숙아들을 인큐베이터 대신 엄마의 체온을 느끼게 함으로써 생존력을 높인다. 신체를 서로 접촉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몸에서는 유대관계, 공감, 신뢰를 담당하는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할 때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호흡과 심박이 같아지고 서로의 뇌파도 같아지는 ‘동조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동조현상은 서로 아픔과 고통을 나누어 위로와 격려를 일으킨다.
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와서 이런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바이러스나 전파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어떤 아이가 와서 누구누구 때문에 자기가 오미크론에 걸려 학교에 못 나왔다고 원망했다. 어서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음껏 아이들을 안아주고 함께 땀 흘리며 뒤엉켜 장난치고 싶다. 그리고 나면 다시 서로의 공간을 인식하고 지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