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글의 기억과 감동
커다란 감나무가 장군같이 우뚝 서 있다.
감나무는 빠알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지었던 동시의 일부분입니다. 기억나는 부분이 단 두 줄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유독 저 두 문장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자다가도 떠오르는 기억처럼 한순간에 소리 낼 수 있는 내 살결 같은 문장입니다.
어린 시절 유난히도 전학을 많이 다녔습니다. 잦은 전학은 누가 문제랄 것도 없이 어린 나 자신을 외로움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딱히 친하다고 생각되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혼자 노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고, 외로움이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친구들도 상황 파악에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친구들은 관심보다는 무관심이 더 반가울 때가 많습니다.
햇살이 비교적 따듯했던 날이었습니다. 아마도 화사한 봄이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선생님은 열심히 시에 대한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귀에 적어가면서 시를 짓기 위한 마음속 준비로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제법 많은 학생이 교실을 채웠던 시절이지만 어린 학생들은 비교적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충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는 체험이고 자신이 느낀 감정의 표현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하나의 주제를 떠올리면서 그때의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떠올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시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보다 열성적으로 가르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름 감동하면서 열심히 들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충고대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둘씩 파보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더 어린 시절의 기억이니 추억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대부분 친구들은 떠오르지 않는 소재로 인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시골집에 있는 감나무가 떠올랐습니다. 여름 방학 때 만난 감나무는 항상 파랗고 덜 익은 감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맛을 보면 떫디떫은 맛이었지만 어르신들은 그런 떫은맛을 즐기셨고 저와 형은 그런 어르신들을 낯선 모습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감나무는 시골집 정원에 있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했습니다.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보면 언제나 감나무 가지 일부가 한편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감나무는 꽤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침 툇마루에서 남쪽 마당 끝에 자리 잡고 있었던지라 정오 내내 뜨거운 햇빛을 골고루 가려주었습니다. 덕분에 시골집 마당은 뜨거운 여름 방학 내내 시원한 놀이터가 되어주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와는 달리 추석이 되어 만난 시골집 감나무는 평소와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여름에는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마당의 그림자 같은 느낌이었다면 가을의 감나무는 단연코 시골집의 주인이었습니다. 누렇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지마다 풍성하게 맺혀 있었습니다. 일부는 땅에 떨어져 마당까지 주홍빛으로 물들였습니다. 추석을 맞이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 모두 늠름하게 뻗은 감나무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1년 내내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감나무는 추석의 단 며칠 동안은 부인할 수 없는 시골집 마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마당의 감나무를 칭찬하셨습니다. 누렇게 익은 감이지만 아직은 그 떫은맛이 미세하게 뒷맛을 자극하고 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감이 당신의 집 마당에서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감은 떫은맛을 지나면 단맛이 나며,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부드러운 홍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아주 잠깐 실망감으로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물론 단지 감, 하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 감나무가 제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감이 열리는 계절도 아니었고, 감을 좋아하는 어린이도 아니었지만, 감나무는 이미 제 머릿속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론 혼란스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좋아하던 시골집 강아지도 아니고 사촌 형이 태워주면 신이 나서 소리 지르던 달구지도 아닌데 어째서 감나무는 제 마음속으로 들어왔을까요?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상은 언제나 시간을 거스릅니다. 단 몇십 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어린 시절 시골 감나무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감나무를 떠올렸습니다. 상상력의 힘은 대단합니다. 아무 의미 없이 보낸 어린 시절인 줄 알았는데 마음속으로 곱씹을수록 뜨거운 감동이 꿈틀거리며 올라왔습니다.
감나무는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마저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글로 그려내기 시작했습니다. 창작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당시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글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감정을 지배했습니다. 그날의 즐거움이 미세하게나마 기억에 남습니다. 글을 쓰는 즐거움을 처음 알게 되었던 순간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수업시간을 마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쉬는 시간과 자습시간을 이용해 걷어간 우리들의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보셨습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친구들의 은밀한 잡담은 조금씩 소음으로 변해갔습니다. 웅성거리던 교실 안의 분위기는 이내 거리낌 없는 잡담으로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칠판에 황급히 무언가를 적어가셨습니다. 친구들은 천천히 선생님의 모습에 시선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칠판에 적은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글을 다 적을 때까지 저밖에 없었습니다.
시의 셋째 줄을 적기까지는 몰랐습니다. 절반쯤 적으셨을 때 비로소 ‘내가 오늘 적어서 낸 글이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시의 끝까지 다 적으신 선생님은 우리에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의 동시!’
처음으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극찬을 받고 나니 내가 뭔 짓을 벌인 것인지 얼떨떨한 느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쓴 글을 세 번 정도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왜 멋진 시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내가 꽤 좋을 글을 써냈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림자처럼 눈에 띄지 않았던 학생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박수도 받았고 앞자리 건너편의 친구는 저를 향해 엄지손가락도 올려주었습니다. 5학년의 어느 봄,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들의 관심과 시선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를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내 어린 시절의 학교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만 남았을지 모릅니다.
내 인생 첫 번째 글쓰기는 어린 시절의 악몽을 탈출하는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글쓰기는 그렇게 느닷없이 내 삶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미래의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을 쓰며 살게 될 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