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둘째 아들이 재수를 택했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제 막 성인이라는 책임 앞에서 고민이 깊어진 것 같습니다.
수능을 본 다음 날, 자기는 원서를 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알겠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원서 접수일이 다 가는데 아무 말도 없습니다.
불안한 엄마는 정말 아무 대학도 쓰지 않을지 물어보았습니다.
원래 표정이 많지 않은 아이였지만 그날은 더욱 깊은 무표정으로 자신의 심경을 알려주었습니다.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가는 건 싫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수험생 대부분 그런 심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더 좋은 대학, 학과, 그리고 하고 싶은 전공을 찾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 선택이 대부분 행복보다 성공에 맞춰 있기에 시대에 따라 인기 학교와 학과가 달라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들은 좀 더 확고하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이번에는 대학에 가질 않겠다고,
대신 1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말렸습니다.
대학과 직업은 생각보다 관련이 없다는 말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은 천천히 찾아도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완강했습니다.
그의 선택을 존중했고 아들은 원서접수 마감일이 지나자 바로 스터디 카페로 향했습니다.
공부만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고깃집에서 한 달 넘게 열심히 알바도 했습니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을 살피던 아이는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1년 영상 강의 구독료를 결제했습니다.
남은 돈으로 서점에서 책 몇 권을 사 왔습니다.
수능을 위해 독서를 하는 건 좋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면 또 사 오고, 또 사 오더니 돈이 떨어졌는지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되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는 시간도 아까웠는지
엄마에게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빌려 달라 부탁했습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나 싶었지만 빌려온 책 목록을 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능에 필요한 고전이나 철학 책을 읽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인생 해탈한 사람들이 읽는 책을 찾습니다.
아들의 선택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사 온 책과 빌려 온 책을 몰래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었던 책도 있었지만 아들의 마음으로 다시 읽으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찾고 싶은 아들에게 책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빠는 아들의 마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아들이 찾아 읽던 책을 몰래 읽으며 그 마음으로 들어가 봅니다.
힘든 1년이 되겠지요.
저도 매우 힘든 1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둘 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더 많은 시간이 남은 아들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스므살 젊은이가 아무것도 없이 세상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에 세상에 널브러진 아빠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울다 웃으며 책을 읽습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순간을 자주 만납니다.
책은 참 잔인합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내 인생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감정의 회오리는 반대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고자 책을 찾습니다.
스스로 읽으라면 읽을 수 없어 아들이 읽은 책을 하나씩 돌아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아들도 나도 인생의 돌파구를 찾아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래간만에 브런치 북 하나를 시작합니다.
연재로 하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건 열 권 정도인데 앞으로 몇 권을 더 마련할지 저도 모르겠네요.
재수생의 책 읽기를 함께 훔쳐보면서 그 마음을 이해하고 다가가고자 합니다.
다음 주에는 어떤 책이 책상에 놓였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가족이라고 꼭 대화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론 이렇게 훔쳐보는 즐거움도 가족이기에 얻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