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간격

by 박소진



다정한 간격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는 왜 겨울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계절이 차가웠다. 칼 같이 베던 바람의 곁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명도가 없던 기억이든, 얕은 온도의 이야기든 내가 거친 모든 시간이 쓰라렸고, 그럴 때는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늘 비가 내렸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간다. 나도 학교에 가야 하는데 가기 싫었다. 늘 셋이었던 우리들 중 다른 둘은 나를 종종 따돌렸는데, 자주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시절은 친구의 시선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훈계 같았으니까. 이제와 어렵사리 그 기억을 꺼내보면 역시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하지만 그 시절의 어린이에게 그것은 세계에 던져진 작은 감옥에서의 한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집 주변을 계속해서 돌아 걸었다. 변압기 계단에 앉아있었고, 행여 아는 아줌마들에게 발견될까 봐 상가 외진 곳으로 빙 돌아 서성였다. 상가 뒤 쪽, 한 평 짜리 남짓한 공간은 내가 처음 알게 된 나락이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이후 나는 그 나이를 기점으로 좀 변했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된 여자 애 둘 때문에 학교를 가지 않았던 날, 알지도 못하는 언니들로부터 오백 원을 뺏겼을 때부터다. 생각해보면 그건 마치 싱클레어(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등장인물)가 프란츠 크로머를 만난 것과 비슷한 장면이었다. 어린이가 겪는 공포심의 한 장면이다. 돈을 뺏긴 일을 싱클레어처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파트가 오래되었으니, 딸린 상가도 오래되었다. 뛰어가던 엄마를 보았다. 오래도록 엄마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래된 상가에 숨어 엄마의 오래된 뒷모습을 보았다. 아빠의 점퍼를 제 몸에 맞지도 않게 걸쳤기 때문이다. 아무렇게 보이는 옷을, 그게 하필이면 아빠의 낡은 점퍼였음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보폭으로 아파트 주변을 달려 다녔다. 보통의 날, 늘 아빠의 점퍼는 엄마에게 잘 맞아 보였었는데, 그날은 엄마에게 너무 버거운 점퍼였다. 두려움도 멈춰 눈물도 멈췄다. 대신 화가 나서 그 길로 집으로 갔다. 엄마는 집에 와 있는 내게 닭개장을 끓여주었고 울었다.


난 그 후로 어떠한 두려움도 없게 되었다. 앞으로 내게 올 많은 이들은 어차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용기가 생겼다. 아주 마르고 여렸던 아이는 더 이상 학교를 빠지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대신에 매사에 둔감해졌다. 그랬기에 혼자 있을 때면 늘 꼬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매번 나쁘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를 일부러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언젠가 이 틈을 벗어날 거고, 다음 틈도 어차피 얼어붙을 생의 구멍이라면, 나는 발에 감기다 튕겨져 사라지는 빗물이 될게. 칼 같이 추운 날의 맨발의 걸음걸이로 다음 걸음, 코 앞에 머무는 공기가 시리게 다리를 절던 날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의 시작을 따라가본다. 거기에는 증표가 있다. 미움이 시작된 어떤 날의 구석구석에 묻힌 흔적들. 누구나 미움이 파 놓은 깊은 상처에 빠진다. 처음의 시작점부터 걸어보려 하면 이내 그 미움의 구멍에 발목이 잡힌다. 거기에는 틈이 있기 때문이다. 생에서 늘 증오하는 어떤 기억에는 걷다 발이 빠질 수밖에 없는 빈틈이 있다. 나는 그것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간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거기, 각각의 간격 사이에는 몸집이 부푼 앞의 기억의 그림자 같은 것이 서려 있다. 앞 방향의 기억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그림자는 크고 깊었다. 그래서 뒤이어 오는 기억은 그 기억이 어떻든 간에 늘 그 틈에 발이 빠졌다. 두 발로 딛고, 걷고 하는 오늘 속에는 말도 되지 않을 일 투성이었다.

내일도 어차피 오늘처럼 미움의 틈에 빠질 거니, 생을 미워하게 되는 초라하고 까만 동굴 같은 마음이 싱클레어에게 있었다. 사이에 구부러진 그림자를 밟고 서서, 보폭을 넓게 걸어보려 해도 나는 다음 구멍에 빠졌다. 틈과 틈 사이의 간격에 누가 돌을 던지면 울고, 비웃고, 자만했다. 그 간격에는 온갖 감정이 스며들고 나온다. 아무도 모르게 젖은 채로 자라나는 풀처럼, 틈 속에서는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일어나는지도 모르게 일어나 버리는 일들이 생겼다.


바보같이 구멍에 빠지고, 빠지려 하지 않으려 걷던 틈과 틈 사이에 결국 또 빠지던, 늘 그랬던 20대의 어느 날이었다. 타르코프스키의 무성 영화를 보러 나갔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의 장면과 장면, 그것이 지닌 간격과 간격만은 선명하다. 온통 흑백의 세계, 이진법과 같은 장면 속에 온 몸을 벌거벗은 여자가 말 허리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 위로 초록색 사과가 떨어졌다. 사과만이 자신만의 색을 지녔다. 모든 감각이 초록 사과에게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바닥에 떨어진 사과는 나의 틈에 빠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사과는 떨어졌지만 그저 땅 위로 흩어졌다. 그것뿐이었다.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사과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그 후로 데미안을 만난 것처럼.

상가 뒤에 무섭게 쪼그리고 있던 열두 살의 싱클레어는 비로소 그가 늘 빠진 틈 밖으로 발을 꺼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의 미움의 틈에는 예전보다 많은 것들이 빠지지 않는다. 생의 길에서 발을 들어 보폭을 만들 때마다 매일 보이던 구멍은 거의 찾기 힘들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 그 틈에서 비로소 삶이 거기서 넘실거린다.


명도가 없던 기억이든, 얕은 온도의 이야기든 내가 거친 모든 시간이 쓰라렸고, 그럴 때는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늘 비가 내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