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밤

by 박소진



이국의 밤




희미한 환기가 창을 덮고 있었다. 창밖에 서린 그림자는 무겁게 깊어진다. 창에 바람이 다가와 닿았고, 이윽고 부서졌다. 그림자의 그림자도 서로를 껴안아 준다. 그러나 팔을 벌리는 이내 부딪힌 몸은 곧 사라진다. 잿빛이 잿빛으로 산란되는 날들의 밤이다. 이런 밤은 언제나 쓸쓸함에 기대어 있다. 가파르게 기대어 닿는 순간, 까만 감정들이 먹먹하게 새어 나온다. 한 밤이 어둡게 번져간다. 주변을 완전히 태우는 밤빛이 만들어진다. 이런 순간에는 으레 어둔 빛 뒤로 만들어지는 검은 제 그림자를 좇아갈 수 있는데, 그림자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둠 속에서도 천천히 밝아지는 지점을 본다. 그곳은 까만 밤에 닿아 산란되는 순간의 장소이다. 밤은 어둡게 빛나 밝아지는 어둠을 품고, 깊은 어둠으로 스며 들어갈수록 더 거칠고 넓게 퍼져간다. 그리고 그 곁으로 포근하고 밝던 낮을 관통 해 와 밤에 닿은 바람이 분다. 밤과 바람은 나를 두드리며 말한다. 너를 안아주겠다고


창을 열었다. 알 수 없는 소리가 쏟아진다. 감각을 휘감는 소리 중에 새의 소리가 있다. 새는 까만 밤과 그곳에 숨긴 두터운 잿빛의 그림자를 데려오는 바람을 타고 지저귄다. 한 낮 동안의 다정했던 관찰의 증명들을 데려와서 여기서 운다. 새가 내는 울음은 까맣다. 까맣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까만 것은 아니다. 낮의 포근함도 데려왔으니깐, 낮의 숨도 불어넣어 지저귄다. 소리가 밤에 닿자 아스라이 퍼진다. 선율은 빛 속에 숨었고, 이내 부드럽게 세계를 가로지르며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소리는 단조롭지 않은 곡선의 모양을 하고 창 안으로 들어온다. 새는 소리의 결마다 지난 시간의 온도를 잘라 넣어 둔다. 그리고 결 사이사이 넣은 이야기를 꺼내 노래한다. 그러니까 밤의 검은 새는 한낮의 온도를 온종일 품었다가, 하루를 보드랍게 관통한 바람의 결을 타고 까만 밤에 닿는 거다. 거기서 노래한다. 찢어질 듯 슬픈 상처를, 찬란히 아름답던 나날을.

검은 새는 부리를 제외하고, 온통 검은색이다. 선명한 주황색의 부리를 가졌지만, 아마도 검은 새에게 검은색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는 듯하다. 검은 새 모두는 검은 새로 불린다. 몸이 까맣지 않은 암컷이라도 검은 새로 불리니, 그도 검은 새가 되어 산다. 어차피 검은 새는 검은 새다. 검은 새는 창 밖에서 까맣고 무겁게, 때론 가볍게 비교적 오랫동안 지저귄다. 소리는 한동안 밤 속을 떠 다니다가, 어느 순간 바람을 탄 채 부풀어 오른다. 창문을 여는 순간 소리는 방향을 바꾼다. 어둠 속 한 곳의 공기와 부딪힌 후, 내 쪽으로 들어온다. 창 안으로 들어와 몸을 턴다. 소리의 결에서 튀어나온 검은 영혼은 아직 어리다. 축축한 숲의 냄새가 난다. 축축한 울음을 닮은 축축이 젖어버린 기억을 다시 꺼낸다. 새의 울음이 귀를 적시는 동안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던 때를 다시 앞에 놓았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사실이라고 믿었고, 그럴듯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그것은 어느새 정말이지 이루어지고야 말 분명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절대로 사실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를 사실이 될 것이라 믿는 동안, 삶은 밝았다. 그림자는 없었다. 모든 곳에서 빛은 공평했다. 그래서 음지도 없었다. 빛에 흠뻑 젖는 낮을 살던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우리는 곧 서러워졌다. 미래가 될 것이라 믿던 사실이 지금이 될 수 없음을 알았으니, 우리는 빠르게 서러워졌고, 곧 멀어졌다가, 영원히 잊힌다. 서로에게. 아스라이 아니, 언제나 그랬을는지 모른다. 모든 순간이 내겐 외로웠으나, 우리의 배경이 되는 그 미래는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 말해왔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나의 일부가 될 일이기에 외로운 모양을 할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말하기로 한다. 쓸쓸한 말은 쓸쓸하게 말하기로 하자. 어두운 말은 어둡게 말하기로 하자. 차가운 것은 차갑게, 빛나는 순간은 빛나 보일 수 있게 그저 그렇게 그냥 이렇게.

검은 새의 말은 어둡지 않다. 검은 새의 말을 까맣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밤을 뚫고 온 쓸쓸한 과거의 영원. 그 축축하고 휘파람을 창 안으로 쏟아 낸다. 나는 밤의 입구에 어깨를 기대어 내게서 아무렇게나 뱉어지던 까만 말들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로 말했던 이야기들이 밤 속으로 번져 간다. 밤 속에 가득 차 있다가 갑자기 빠르게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밝은 어둠 속으로 낮 동안 잠시 기대었던 쓸쓸함과 감정들이 쓸려 나오고, 다시 들어온다. 검은 새는 밤의 깊고 어두운 동굴로 가는 길을 열고, 나는 따라간다. 그러다 생각한다. 오히려 빛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다. 어둠의 높은 채도는 완만하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않다. 어떤 움직임이 있고, 깊은 색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을 뿐이다. 숨이 작은 연기를 만들어 입술을 덮는다. 입술로 말하던 믿음들은 숨처럼 사라졌다.

온통 시커먼 몸통에서 만들어진 검은 말들은 밝게 흩어졌다. 새의 주황 부리는 까만색의 말들을 허공에 흩뿌렸다. 사라진 믿음이 원래 믿음이 아니었던 것처럼, 검은 새의 말들은 결코 까맣지 않다고 밝게 지저귀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 시절, 우리들의 믿음이 까맣게 지워진 것은 아니었을진대. 검은 새는 계속 더 울었다. 밤이 오려고 하면 더욱더 크고 세차게.


이윽고 밤은 떨어진다. 곧 내 곁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나를 안고 있던 팔도 나를 놓아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밖은 온통 어둠으로 빛날 것이다. 지금처럼 그럴 것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점점 밝아져 갈 것이고, 지금, 까만 이야기들이 주황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합의되지 않을 고요한 믿음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 시절, 우리들의 믿음이 까맣게 지워진 것은 아니었을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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