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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Jul 06. 2021

희망은 가까이에


늦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이르지 않은 오전 아홉 시가 좋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늦은 세수를 한다. 나도 대충 토스트를 하나 만들어 먹을까, 아침 끼니를 먹고 따뜻한 커피를   탄다. 커피를 가지고 정원으로 나간다. 손잡이를 살짝 밀면 뒤로 젖혀지는 의자에 앉는다. 어른의 놀이터 같다. 아무도 없고, 의자를 시소처럼 타고 하늘을 본다. 입에서 작은 한숨을 뱉는다.  시간마다 나는 무언가를 쓰기도 하고, 밀린  작업을 한다. 공기가 가장 싱그럽고, 그래서 여간 피곤해도 다시 자고 싶지 않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으레 숨이 고르게 퍼지고 주변을 조금  다정하게 보게 된다. 고슴도치가 자주 나와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 정원에는 요즘 여름 수레국화가 피고 심어놓은 토마토가 걸음마하는 아이  만하게 자랐다. 오전 아홉 시에 저녁을 닮은 검은지빠귀가 가장 밝게 지저귄다. 빛이  위로 천천히 밀고 들어와 따스하게 앉았다.  시간의 빛은   뺨을 어루만지는 사람의 손길 같다. 편안한 아침이다.   


자꾸 작은 벌레가 내 팔꿈치 위에 올라앉는다. 움직이면 날아가다 다시 앉는다. 다시 한번 성가셔 팔을 움직여도 이번에는 날아갈 생각이 없다. 미물에게도 환상이 있어서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 있다. 정원 수풀 속에서 나는 소리에도, 수레국화가 피는 자리에도, 토마토가 달리는 연두색 줄기에도 무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팔꿈치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낯선 야생을 오랫동안 본다. 왜 나는 내가 떠나온 곳의 사람을 생각했을까. 부모님은 잘 계실까?  


소식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절망을 피해 갈 수 있을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속 다가오니까. 그러면 맞이해야 한다. 맞서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할까, 눈물샘을 조금 더 꽉 묶어야 할까, 아니면 눈은 뜨는 대신 귀를 막아야 할까. 작은 벌레가 나를 떠나가지 않던 오전 내내 나는 나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벌레의 작은 날갯짓 사이로 그리움이 저며가고, 생의 토템이라는 게 마치 내게 머무는 벌레의 자리 같은 거라고. 나는 이날 두려운 절망의 바다를 건넜다. 파도에 밀려 가까스로 고아가 될 뻔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멀리 있는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다고, 작은 꼬마까지도. 그중 아빠가 점점 더 큰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폐가 검은 동공을 자꾸자꾸 열고 있다고.   


한 달 가까이 나는 계속 벌레가 다시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늘 같은 아홉 시, 같은 의자에 팔꿈치를 꺼내놓고 그날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려 했던 벌레를 얼마나 기다렸나. 내게는 환생도 미신도 아닌 으레 믿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어디선가 개가 한 마리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고 했다. 길쭉하게 갈색 털이 매끈해 보이는 이 혈통 없는 개는 할머니 집에서 스물 두 해를 살았다. 갈색 눈을 반쯤 덮은 속눈썹은 온화했다. 사람 같았다. 우리는 개에게 스텝이라고 이름 붙여 불렀는데 처음부터 그 이름을 알아들었다. 우리는 그 개를 증조할머니라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그랬다.


내게는 오랜 유년 속의 그 개와 나를 떠나지 않았던 팔꿈치 위의 작은 벌레는 동등하다. 누군가를 찾아오는 소식은 언제나 예고 없이 무력하다. 작고 볼품없이 그러나 오랫동안 머문다. 두 달이 다 되어 갔을 때 벌레는 다시 왔다. 수레국화는 더 꽃을 피웠고, 토마토는 더 커졌다. 오전 아홉 시, 햇볕은 더 뜨겁게 내 낯을 감싸주었고, 이 작고 작은 희망이 날아가지 않게 팔꿈치를 움직이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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