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님이 다 마시지 못하고 남겨 두고 간 자몽주스의 알갱이가 컵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납작 복숭아의 오른쪽 귀퉁이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딸기잼을 대충 바른 호밀빵을 싸다 남은 은박지 조각이 터진 풍선처럼 쪼그라 있다. 이유도 없이 버리지 못한 이 나간 접시는 라탄 바구니에 말아진 포스터처럼 고꾸라져있고, 포슬 하게 으깬 감자를 뜨다 떨어트린 자국이 묻어있다. 어제 자몽주스는 투명 유리병에 신제품 라벨지를 달고 냉장고에서 제일 싱그러웠고 나는 살색 납작 복숭아 위로 분홍 그림자가 비치는 순간이 생경하고 아름다워 사진으로 찍었다.
“또 우리는 배를 접을 수도 있지!”
아이들은 식탁 위에 놓인 은박지를 접어 세면대에 둥둥 놓을 배를 만들었다. 빈티지 벼룩시장에서 누구에게 뺏길세라 탐욕스럽게 집어 온 2유로짜리 접시 귀퉁이가 조금 깨져있다. 크리스마스 붉은 초를 놓았다. 촛농을 몇 방울 떨어뜨려 초를 그릇에 꽂았다. 촛농 위에 마음속 기둥 여러 개가 우뚝 세워진다. 깨진 접시를 뭐에 쓰지? 그래도 선뜻 버리지는 못해 마음 한가운데 깊이 밀어 넣었다. 곧 속이 쓰려 감자를 삶는다. ‘조각을 내어 삶아야지 더 빠르게 익는 거 알지?’ 포슬포슬한 감자에 치즈와 우유를 부어 퓌레를 만들었더니 역시나, 아무도 먹지 않는다.
나는 SNS에 올릴 사진만 찍고 자러 간다. 부엌문을 닫는다. 다음날 다시 나왔다. 커튼을 연다. 무너져 내린 복숭아의 살결 위로 다시 볕이 내려앉는다. 자몽주스의 알갱이가 어느새 컵에서 떨어져 나와 부유하고, 쪼그라들었던 풍선은 날 준비를 한다. 초가 많이 녹았다. 햇살이 그림자를 따스히 안아준다. 서둘러 딸기잼을 흙갈색 치아씨가 씹히는 호밀빵에 야무지게 발라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제 밖으로 나간다. 종소리가 새벽빛을 타고 눈이 부시다. 구겨진 조각은 은빛 배가 되었다. 은빛 배를 타고 나는 계속 노를 젓는다. 더 이상 아슬아슬하게 흐르지 않는 물 위에 나는 더 이상 위태롭지 않다. 햇빛은 썩어가는 납작 복숭아처럼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집에는 자몽주스와 납작 복숭아와 호밀빵과 감자 퓌레와 은박지 조각이 있었다. 집의 문은 멀어진다. 멀어지게 멀어지고 멀어지는. 그러나 촛불은 계속 켜 둘 것이다. 마음속에 작은 불빛 하나가 강 위로 떠오른다. 윤슬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