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돌아봅니다. 다양한 옷들이 걸려 있죠. 스타일도, 브랜드도, 제조국도 다른 각각의 옷들은 90년대 이후 패션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걸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1987년의 주식시장 붕괴와 이라크-국제연합군 간 걸프전(1990-1991)으로 침체되었던 세계는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회복기를 맞이합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다양한 민속 의상이 디자인에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서구의 옛 복식 역시 재소환되는 복고적인 분위기를 보였습니다.
1920-30년대의 스타일이 되돌아오면서 패션은 과장된 빅 룩에서 벗어나 차분하고 절제된 경향을 갖게 됩니다. 색상 역시 화려한 색보다는 중간 톤이나 흰색, 검은색이 선호되었는데, 오늘날 90년대의 스타일이 세련되었다고 느끼는 것에는 이런 영향이 큽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속옷의 겉옷화가 이루어져 란제리 룩이 등장하였습니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뷔스티에도 코르셋이나 브래지어와 같은 속옷을 겉옷으로 입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90년대 이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세계적인 환경보호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패션기업에도 환경윤리를 바탕으로 한 의류 생산이 요구되었고,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슬로 패션(slow fashion)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히피 룩을 재해석한 네오 히피 룩이나 그런지 룩(grunge look)의 탄생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히피 룩과 펑크 룩이 섞인 그런지 룩은 80년대의 여피들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오물, 쓰레기'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낡고 구질구질한 인상을 줍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전혀 다른 옷들을 겹쳐 입거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벙거지를 눌러쓰는 것이 그런지 룩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지 룩의 등장으로 구제 의류시장은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급부상한 것 역시 90년대였습니다. 오트 쿠튀르가 쇠퇴한 대신 자라, 망고, H&M, 유니클로, 포에버 21과 같은 브랜드들이 90년대 말 대거 등장합니다.
SPA( 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브랜드들은 한 회사가 디자인부터 생산, 판매까지의 모든 과정을 총괄함으로써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들의 요구를 제품에 빠르게 반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패션의 대중화에 기여했지만, 한편으론 환경보전과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물음표를 남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