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다시 한 달간의 일정이 시작됩니다. 직장 업무에서 한 달간 손을 떼는 휴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올해 들어 벌써 3번째 들어가는 휴업입니다. 급여는 기본급의 70%를 정부 고용지원금으로 받고 있으니 혼자 용돈 하기에는 딱입니다. 마음 비우고 한 달 논다고 하면 정말 환상적이고 금상첨화일 겁니다.
그런데 휴업기간은 놀아도 노는 게 아니더군요. 한 달 동안 책도 엄청나게 읽을 것 같았는데 책을 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마법에 걸립니다. 희한하죠? 한 달이라는 엄청난 자유시간이 주어졌음에도 자유시간이 아니었던 겁니다. 한 달 동안 뒷덜미를 잡아채는 이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정부 고용지원금 신청도 못하는 더 어려운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보시기에는 배부른 소리일 수 있습니다. 투정일 수 있어 죄송한 마음도 앞섭니다.
남들은 "한 달 쉬니 좋겠네"라고들 위안삼아 말을 건넵니다만 당사자인 휴업자는 겉으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죽을 맛입니다. 한 달 계획을 안 세우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TV나 보고 해서 생기는 기시감 때문일까요? 두 번을 한 달씩 놀아보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을 일주일로 나누고 일주일을 하루로 다시 세분하고 하루를 다시 시간대별로 쪼개어 촘촘히 계획을 적어가기도 해 봤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피곤하도록 다루어도 개운치가 않고 먹먹함이 지배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조바심이 납니다. 나름 촘촘한 스케줄 속에서 정신없이 사는데도 불구하고 간간히 쉬게 되는 시간에 다가오는 불안한 스트레스입니다. 한 달 쉬고 한 달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불안증세를 경험하게 되는데 퇴직하게 되면 그 엄청난 스트레스의 무게를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이런 모든 걱정이 불안으로 엄습해 잠시의 여유조차 누리지 못하고 침잠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는가 봅니다.
오늘은 한 달 휴업의 첫날이기에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이미 두 번의 경험을 해봤으니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하는지도 눈치채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용돈벌이 아르바이트도 못합니다. 정부 고용지원금을 받고 있는 관계로 다른 경제활동을 하면 안 되는 조건 때문입니다. 알바라도 하다가 걸리면 고용지원금 반납해야 합니다. 그저 먹고 놀고 자기 계발하는데 몰두하라는 배려라고 생각해야 편합니다. 말 그대로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로 삼으라는 국가의 엄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평소 출근과 똑같이 5시 반에 기상을 합니다. 밖은 아직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밤의 정령이 낮의 시간을 많이 점령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만큼 시간의 길이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약간 어둡지만 새벽 조깅에 나섭니다. 10KM를 뛰고 올 요량입니다. 이렇게라도 아침 출근 시간을 대체하고 건강을 챙기는 것으로 휴업 첫날 첫 아침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조깅하는 망우산 '사색의 길'에 이른 낙엽들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계절을 빨리 준비하는 나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보도 위에 제법 나뭇잎들이 쌓여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뛰다 보니 숨이 더 가빠집니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호흡을 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덕분에 걷는 동안은 산책길 주변의 나무들에 눈길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달려있는 열매들이 눈에 훅훅 들어옵니다. 그동안 짙초록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열매들이 확연히 다른 색깔을 지니게 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직은 열매로서의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붉고 노란색이 감돌 시간이 되어 모습을 보이게 되면 하나 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릴 것입니다. 포도당 짙은 과육 속에 씨앗을 숨기고 새로운 유전자를 세상에 퍼뜨릴 것입니다. 그 확산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의 조깅과 걷기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와이프를 직장인 학교에 차로 모셔다 드리고 와서 이렇게 아침 글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 아침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을 둘러보고 글로 적어 이 순간의 풍광을 문자로 기록합니다. 또 이렇게 그 현상을 공유합니다.
이 문자 메시지에는 공감과 소통이라는 단어에 묻어있는 추억 같은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편지입니다. 쓰는 도구는 펜에서 자판으로 달라지고 종이에서 화면으로 바뀌어 이진법의 전기신호로 교체되었지만 편지의 근본은 같습니다.
펜을 들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손편지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써보았던 안 써보았던 우리들 세대에는 지나간 것들의 막연한 그리움이 숨어 있습니다. 그 편지엔 정성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써 내려가야만 합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오자가 생기고 전개가 뒤죽박죽 됩니다. 지금처럼 잘못 쓰면 delete key를 눌러 지워버리고 다시 쓰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쓰다가 틀리면 돼지꼬리 붙이고 이어갈 수 있지만 그건 편지를 쓰는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편지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첫사랑을 꼬시던 꽃 편지지도 있고 군대에서 보내는 "어머님 전상서"도 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보내는 위문편지인 "국군 아저씨께"도 있습니다. 스승의 날이면 은사님께 쓰던 "감사 문안"도 있습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사연을 읽어주는 음악 프로그램에 신청곡과 함께 사연을 적어 보내는 우편엽서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면 의례적으로 보내던 카드도 있습니다. 또한 멀리 해외에 펜팔 친구를 만들어 영어편지를 쓰기도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손으로 쓸 수 있고 보낼 수 있지만 사라져 가는 기억의 저편처럼 느껴지는 손편지입니다. 바로 컴퓨터 자판이 빼앗아간 아날로그 시대의 기억입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와도 변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손편지와 컴퓨터 화면의 글자 조합은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습니다. 바로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형태이든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진보해도 역시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편지 속의 글은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을 전달하는 전령입니다.
편지는 글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글이 말을 담아내는 그릇이듯이 말입니다. 말과 글과 편지는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공통점이 본질입니다. 그 공통점은 또한 소통과 공감을 베이스로 합니다. 그 생생한 현장을 우리는 매일 아침 이 편지를 통해서도 명명백백히 보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한 달 휴업 첫날을 이렇게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로 채우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