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색, 체면, 구색, 그리고 헛짓거리
선거 때 진영을 떠나 내놓는 공약이 있다. 행정 혁신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작은 정부, 진보는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행정 혁신은 정부의 규모와는 별개로 꼭 필요하기도 하고, 유권자의 호응도 좋아 선거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공약이다. 어떻게 보면 행정은 항상 혁신을 해야 하는 분야라는 얘기가 된다(이 글의 끝에 이르면 알게 된다).
한 권력자가 후보시절 ‘행정업무 효율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권력자는 행정에 대해 잘 몰랐으나, 측근인 고위관료 출신의 선거캠프 특보(특별보좌역)가 아이디어를 냈다. 특보는 "명색이 내가 특본데 뭐 하나 이름 들어간 게 없으니... 뭐라도 있어야 생색이 나고, 그래야 당선되면 어디 자리라도 하나... 안 되겠다. 이번에 주특기 살려서 행정분야 공약에는 뭐든 하나 집어넣자." 하던 참이었다. 공약팀에서는 "아니 이게 공약이 되겠어요? 고위관료까지 지냈다는 분이 이렇게 엉뚱한 얘길 해?", "에이 왜 그래요? 그냥 공약이잖아. 당장 뭘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후보께서 얘기 잘 들어보라고 보내셨는데, 두 분 체면도 생각해야지. 분야별로 구색 맞춰야 하는데 마침 행정분야 공약이 적으니까 적당한데 쓱 끼워 넣읍시다." 그렇게 공약이 됐다. 그리고 후보자가 당선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국정과제에 반영됐다. 소관부처가 지정되고 임기 5년간의 세부 추진계획이 수립됐다. 생색이 체면을 거쳐 구색이 되고, 공약이 국정과제를 거쳐 정책이 된 것이다.
소관부처는 먼저 「행정업무 효율화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키로 했다. 당시는 여소야대 상황이었는데, 야당은 내용을 떠나 여당이 추진하는 입법을 무조건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소관부처는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국정과제는 곧 권력자의 명령이고, 그래서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당위다. 임기 초반의 국정과제는 행정부 안에서 모든 문을 여는 만능키이고 모든 것을 내주는 요술방망이다. 국정과제를 잘 추진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우수기관이 되고, 우수공직자가 된다. 포상과 승진과 성과급이 뒤따른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그것이 국정과제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권력자는 정기적으로 ‘부처별 국정과제 추진 현황’을 보고 받는다. 행정 혁신은 공약에 들어갈 때부터 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일단 파란색의 ‘완료’, 녹색의 ‘원활’ 같은 단어들 중에 새빨간 글씨로 ‘부진’ 이렇게 쓰여 있으면 기분이 되게 나쁘다. ‘부진’ 뒤에는 볼드체로 소관부처가 적혀 있다. 권력자는 장관을 한번 쓰윽 쳐다본다. 장관은 새빨간 ‘부진’처럼 얼굴이 벌게지며 안절부절못한다.
장관은 기관에 돌아오자마자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한다. 야당의 반대고 뭐고 간에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추진하라고 특명을 내린다. 장관과 같이 권력자의 임명을 받은 차관도 함께 거든다. 일반적으로 정무직인 장관과 차관은 외부에서 임명되고, 그 아래 1급인 실장은, 사실상 조직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내부에서 임명된다. 장관과 차관은 어공(어쩌다 공무원), 실장은 늘공(늘 공무원)이다. 장관과 차관은 첫째, 임명해 준 권력자에게 고마운 마음, 둘째,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실장은 직업공무원의 한계(1급)를 뛰어넘어 더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차관이나 장관으로의 승진을 꿈꾸는 실장은, 내부자로서 조직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조직을 이용해 딛고 올라설 것인가를 늘 궁리한다. 실장은 담당 국장과 과장을 불러들인다. “국정과제인데 안 할 수도 없고, 기왕에 하게 된 거, 인력도 확보하고 예산도 따오자.” 그렇게 조직의 비전과 미션이 선포되고, ‘행정효율화법(약칭) 제정 태스크 포스’ 팀을 급조해서 기획력, 전투력이 뛰어난 에이스들을 불러 모은다. 국민 대상 정책과 서비스를 담당하며 사업부서에서 멀쩡하게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끌려온다. 도대체 행정 효율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장관과 차관의 특명이고, 실장의 지시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때부터 평일과 주말, 낮과 밤 구분 없이 국회를 찾아다니고, 야당 보좌진을 설득하고, 야당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장관과 차관과 실장이 야당 의원들을 찾아다니고, 또 야당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 법안을 제출한 지 1년여 만에 행정효율화법이 제정됐다.
법이 제정되고 나면 국정과제 추진에 탄력이 붙는다. 조직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를 찾아가 증원 협상을 하고, 증원이 확정되면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를 찾아가 신규 사업 예산 협상을 한다. 그렇게 ‘행정효율총괄과’가 생겨서 7명의 인원이 증원됐고, ‘행정업무 효율화 추진’이라는 신규 사업이 만들어져 매년 10억여 원의 예산을 배정받게 됐다. 추가로 ‘행정효율화시스템’이라는 전산시스템 구축을 위해 100억 원이 별도로 배정됐다.
생색에서 시작해 체면과 구색을 거쳐 공약이 됐다가 국정과제를 거쳐 법이 만들어지고, 인력이 확보되고, 예산이 편성되면서 바야흐로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전산시스템 구축 예산 100억 원은 논외로 하더라도, 매년 7명의 인력과 그들의 인건비(5억), 사업비(10억) 등 15억의 예산이 고정비용으로 투입되게 됐다. 한번 만들어진 법, 조직, 사업은 정권이 바뀌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앞으로 쭈욱, 영원히 가는 거다.
그게 다가 아니다. ‘행정효율화법’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행정 효율화 추진에 대한 관리·감독을 하게 되어있다. 그에 따라 예산이 반영된 ‘행정업무 효율화 추진’ 사업에는 대상기관에 대한 실태점검, 교육, 평가 등의 세부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매년 초에 전 대상기관의 행정 효율화 실태를 점검하고, 매 분기마다 전국의 담당자들을 모아 권역별 교육을 추진한다. 매년 말에는 관련 업무 전반에 대한 평가를 실시한다.
대상기관의 수는 총 3만여 개, 담당자의 수는 연인원으로 수만 명에 달한다. 그 기관들과 담당자들이 ‘행정업무 효율화 추진’ 사업으로 인해 써야 하는 시간과 예산은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행정업무 효율화 추진’으로 도대체 뭐가 효율화된 것인지도 측정이 불가능하다. 효율화가 아닌 효율화 업무를 위한 자료들을 만들어 제출하고 교육받고 평가받느라, 기관과 담당자 본연의 업무가 방해받고 지연됐을 뿐이다.
국민들의 호응이 좋다는 이유로 공약에 포함됐고 국정과제까지 된 ‘행정업무 효율화 추진’ 사업이지만, 정작 국민들은 이 사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국민을 위한 정책과 서비스에 투입되어야 할 인력, 예산을 빼앗겼을 뿐이다. 이것이 행정을 효율화하겠다면서 행정 낭비와 비효율을 극대화하고 있는, 우리 행정의 현실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공직자가 된 이들은 또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업들이 셀 수 없이 많고, 지금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그해 정부 특정평가에서 장관은 국정과제 추진 성과를 인정받아 최우수등급을 받았다. 장관은 담당 과장과 실무자를 특별승진시켰고, 관련된 전 직원에게 성과급 최고등급을 부여했다. 승진과 성과급은 티오가 정해져 있는데, 덕분에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에 실질적 기여를 한 이들은 승진에서 탈락했고, 낮은 성과급을 받았다. 만약 자기 돈을 주거나 자기 자리를 내줘야 했더라도 그렇게 했을까. 국민들은 승진 대상과 최고등급 성과급 대상으로 누구를 선택할까.
아직도 더 남았다. 어떤 명분도 실익도 없는 콘텐츠다 보니, 없는 일을 만들어서 하고, 일을 하는 시늉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과장을 제외한 6명의 직원 중에서 3명은 사실상 하는 일 없이 논다고 보면 된다. 옆에서 보면 뭐라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노는 거다. 유튜브 보고, 주식하고, 코인하고, 그나마 인터넷으로 뉴스 보는 일, 국비유학을 위해 영어공부 하는 일은 매우 공적인 영역이다. 인간은 일이 없으면 정치를 한다. 일이 없는 3명의 하루 일과는, 업무협의를 핑계로 다른 부서 직원들 만나서 1시간씩 수다 떨고, 어떤 과장, 어떤 국장에게 읍소를 해야 승진을 하고 유학을 갈지 머리 굴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점심식사는 누구와 무엇을 먹을지, 저녁회식은 누구와 무엇을 마실지 고민하는 일 등이다(바로 옆 과에는 정말 일이 많아서 날마다 야근하는 직원이 있는데, 일이 많아서 정치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승진도, 유학도 정치를 잘 한 그들의 것이다.).
또한, 일이 없으니 돈을 쓸 데가 없어 예산이 남아돈다. 예산이 남으면 재정평가에서 나쁜 점수를 받고, 다음 해 예산이 깎이고, 그리고 위로부터 치명적인 얘길 듣게 된다. "아니 그 과는 일이 없나?", "그 과장은 도대체 하는 일이 뭐야?", "주는 돈도 못쓰면 어떡하나? 내년에 다 날려버려." 그래서 이런 일들을 한다. 아무런 필요 없는 업무협의 간담회를 만들어 업무추진비를 집행한다. 1명이 하루 다녀오면 되는 출장을 3명이 2박 3일 다녀오는 출장으로 만들어 출장비를 집행한다. 무슨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홍보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일반수용비를 집행한다(바로 옆 과는 정말 가야 할 출장을 출장비가 없어서 못 가고, 정말 추진해야 할 간담회와 콘퍼런스가 있는데 업무추진비와 일반수용비가 없어 못하고 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이런 사업들을 다 폐지하겠다. 행정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진짜 행정 혁신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필요한 사업에만 인력, 예산을 투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