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일상과 평화와 행복
우리의 일상은 평화롭다. 눈을 감고 숨을 죽이면,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고, 새가 노래하고, 행인들이 걸어가고, 차들이 달리고, 비행기가 날아간다. 끼니때가 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것이다. 밤이 되면 편안한 집에서 잠을 잘 것이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멋진 차를 탈 수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걷거나 뛰거나 수영하거나 날 수도 있다. 가보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응급실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일상, 평화, 행복 같은 것들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매일, 매 순간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피칠갑을 한 사람들이 연신 비명을 지르고, 또 피칠갑을 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누군가는 고통스러워서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시간이 없어서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다. 그들은 남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여긴다. 자신의 생명을 잘라서 남의 생명을 이어 붙인다.
화재현장에 가본 적이 있는가.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아무리 높은 빌딩도, 아무리 좋은 집도, 아무리 멋있는 차도 잿더미로 변한다. 누군가가 평생을 들인 공력도 누군가의 부러움의 실체도 흔적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생명만은 건져내야 한다고,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가족이 안에 있는 듯 울부짖는 이들을 대신해,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그때 자신의 가족은 잠시 잊는다.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빵 한 조각 못 먹은 채로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이곳이 언제 적들의 수중에 떨어질지 모른다. 지금 총알이 나에게 날아오고, 폭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도움을 요청할 곳도, 희망을 걸어볼 곳도 없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늘 있어서, 오히려 평화롭다.
정부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은, 일상은 평화롭다. 그러나 그 평화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정부가 떠받치고 있는 평화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화재, 그리고 어쩌면 전쟁.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내가 대처할 수도 없다. 개인의 일상, 평화, 행복은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지만, 그 밑에는 반드시 정부가 있다. 또한, 만에 하나 그 일상과 평화와 행복이 무너지려 할 때는, 그 옆에 결단코 정부가 있을 것이다.
사고의 현장, 화재의 현장마다 어김없이 울리는 앰뷸런스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바로 정부다. 자신의 생명을 잘라서 나의 생명을 이어 붙여주는 그들, 자신의 가족을 뒤로하고 나의 가족을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그들, 전쟁을 막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를 구출해 줄 그들이 바로 정부다. 그리고 정부는 대통령이다.
비약일수도 있다. 이건 만약이다. 우리가 바라는 그런 대통령이었다면, 그가 우리가 바라는 그런 정부를 만들었다면, 그 정부가 우리가 바라는 그런 행정을 했다면, 그래서 그런 행정의 원칙과 작동이 국민의 일상 끝까지 모세혈관처럼 뻗어있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큰 도시 한가운데서 수백 명이 압사하는 일이 일어났을까(국민을 지켜야 할 자들이 권좌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용감한 군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입대한 청년이 이상한 실종자 수색에 내몰려 생명을 잃는 일이 일어났을까(그 청년도 국민이고, 국민의 아들이었다. 국민을 지켜야 할 자들이 전시행정을 하느라 국민을 사지로 내몬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배를 타고 제일 예쁜 섬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운 아이들을 그렇게 보내는 일이 일어났을까(처음부터 행정을 잘하고, 수시로 점검하고, 늦기 전에 개선했다면.).
그리고 정부는, 우리의 일상을, 훨씬 더 평화롭게,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다. 정부는 경제를 발전시키고, 과학과 기술을 향상하고, 문화와 예술을 융성하게 할 수 있다. 일상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정부가 그것을 떠받치고 지키는 것처럼, 기업과 학자와 예술가들의 영역도 정부가 선도하고 지원할 수 있다.
나는, 언젠가 학업을 마치고, 군복무도 끝내고, 드디어 드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가기 직전인 한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두 눈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반짝였고, 두 팔은 금강송처럼 우직했고, 두 다리는 곧 튀어 오를 스프링처럼 단단했다. 그는 국가에 대해, 정부에 대해, 공직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대통령과 악수해 본 적 있으세요?”
대통령과의 악수는 대통령 한 사람과의 악수가 아니다. 그것은 5천만 국민과의 악수다. 대통령은 곧 국민이다. 대통령의 얼굴은 곧 국민의 얼굴이다. 우리가 대통령을 대할 때 설레고, 가슴 벅찬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이도, 대통령을 뽑는 이들도 결코 그걸 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