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뿌리, variation & original
① 셰프는 밥 양과 횟감의 최적의 비율을 잡는다. 밥을 덜지 마라. ② 스시는 후각으로 먹는다. 식사 전 향수, 담배를 피하라. ③ 초밥 놓는 접시를 건드리지 마라. 셰프는 그 위치까지 계산한다. ④ 주류 콜키지는 자제하라. 술도 전체 요리의 일부다. 한국인 스시 셰프가 말하는 스시 오마카세 맛있게 먹는 법이다. 일본인이 아닌 최초의 미슐랭 스타 스시 셰프다. 그는 도쿄에 있다.
뉴욕 록펠러센터에는 한식 파인다이닝이 있다. 프렌치, 이탈리안과 함께 입점한 3대 파인다이닝이다. 아시아 대표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한국 아티스트가 만든 우리 전통 도자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도 역시 나전칠기 등 한국 아티스트가 만든 10가지 종류의 컬렉션이 제공되고, 그중 그날의 음식에 어울리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 코스의 개별 메뉴마다 ‘메뉴카드’ 한 장씩이 미리 제공된다. 앞면에는 한국 아티스트의 민화 등 우리 전통 그림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메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적혀있다. 잡채, 입가심 등 개별 메뉴의 이름은 뜻을 해석해 영어로 풀어쓰지 않고 Japchae, Ipgasim 등 우리말 발음 그대로 적는다.
파인다이닝(fine-dining)은 문자적으로 좋은 식사를 의미하고, 일반적으로는 값비싼 최고급의 식사, 그러한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의 의미로 통용된다. 노포(老鋪)는 오랜 세월 이어온 식당이다. 대물림될 정도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켰다는 건 그만큼 맛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포는 오랜 세월로 검증된 맛집의 의미로 통용된다.
앞서 스시 셰프는 대학교 조리학과에서 4년간 음식과 요리 전반에 대해 공부하고, 한국 최고의 스시집에서 3년, 다시 일본 최고의 스시집에서 3년을 스시 공부에 매진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손에 스시를 쥐어볼 기회를 얻게 됐다. 그에게 스시는 밥의 온도, 굳기, 횟감과의 조화, 그리고 입안에서의 씹힘과 넘김 등 모든 것을 고려하고 연구해 균형을 맞춘 하나의 작품이다. 처음 온 손님에 대해서는 알러지, 취향 등을 노트에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손님이 다시 오는 날에는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려 최상품의 재료들을 준비한다. 지금도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직접 수산시장에 간다.
남쪽 지리산 자락에 한 노포가 있다. 계절마다 산에서, 들에서 나는 다양한 나물들이 나오는 한상 차림으로 유명하다. 그 집 맛의 핵심은 100년 된 씨간장이다. 10여 가지 나물의 맛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사이사이에 배어든 깊은 맛은 하나의 정점으로 수렴한다. 씨간장의 맛이다. 장맛으로 집중됐다가 다시 재료 본연의 맛으로 흩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입안에서는 매 순간 새로운 식도락이 펼쳐진다. 향연이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는 지리산의 모습과 함께 그 집의 장맛이 떠올라서 찾아가지 않을 수 없다. 씨간장은 단순히 음식의 간을 맞추는 재료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 간장은 된장, 고추장 등 모든 장류의 베이스가 되고, 그 색깔은 나물은 물론 국, 찌개, 조림, 볶음, 구이 등 모든 음식에 입혀진다. 그 색깔은 한국에서 오직 그 집에만 있고, 전 세계에서도 오직 그 집에만 있다. 그 집이 한국의 자연이고 곧 한국이다. 그 집은 모든 것이 내추럴이고 유일한 인공은 주인의 손뿐이다.
노포의 가치는 세월에 있다. 깊이에 있다. 고정성이다. 노포가 바닷속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지만 깊게 박혀 배를 잡아주는 닻이라면, 파인다이닝은 바람을 받아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돛이다. 노포가 뿌리라면 파인다이닝은 꽃이다. 노포가 칼의 손때 묻은 손잡이라면 파인다이닝은 잘 벼린 칼끝이다. 노포가 한가운데(the very center)라면 파인다이닝은 극단(the far edge)다. 노포가 원곡(original)이라면 파인다이닝은 변주(variation)다.
파인다이닝은 다이아몬드 커팅과도 같은 정교한 세공들의 컬렉션이다. 한 끼 식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그런 점에서 스시, 오마카세 같은 일식의 성격과 형식이 파인다이닝에 부합한다. 하지만 최근 한식 파인다이닝은 변주를 통해 가능성을 넘어 큰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록펠러센터의 한식 파인다이닝은 음식을 매개로 한국 전통문화와 예술 전반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오너 셰프와 경영인의 의도가 자부심이든 마케팅이든 간에 그들로 인해 우리 것들이 세계 시장에서 최고가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구매자들에 의해 향유되고 있다.
세계를 공략하고자 한다면 변주는 불가피하다. 스시는 어떻게 세계인의 음식이 됐을까. 도쿄의 길거리 간식이었던 스시가 세계화의 발판을 마련한 건 1964년 도쿄 올림픽이었다. 거기엔 세계 음식 대국을 향한 일본 정부의 야심 찬 전략, 그리고 일식 요리사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생선의 신선함과 풍미를 살리기 위해 손끝 온도, 밥알을 뭉치는 압력, 어떤 칼로 어떻게 생선을 저미는지 까지도 신경을 썼다. 김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들의 입맛을 고려해 김을 안으로 말아 넣은 캘리포니아롤까지 개발했다. 전 세계 수만 개의 일식집 중 60% 정도가 스시집이고, 프랑스 르꼬르동블루, 미국 CIA와 함께 세계 3대 요리학교인 츠지요리학교엔 전 세계에서 일식 셰프 지망생들이 몰려온다. 스시는 날생선을 금기시하던 서구인들의 식습관까지 바꿔놓았다.
그럼 한식 파인다이닝이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이유는 뭘까. 우리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다. 하지만 스시 같은 세계화 스타 메뉴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시도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에게 세계 음식 대국 같은 야심, 전략 같은 것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21세기 들어 불기 시작한 한류 열풍과 그로 인한 우리 문화, 예술의 위상 강화가 자연스럽게 한식 파인다이닝으로 이어졌다. 반도체, 휴대전화, 가전, 자동차 등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브랜드 코리아, 경제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순수한 민간의 힘이다.
지금처럼 정치가 계속 경제의 발목을 잡고, 기업들이 하나둘씩 세계 수위의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면 브랜드 코리아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을 수 있다. K-Pop을 필두로 하는 한류 열풍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정상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록펠러센터의 3대 파인다이닝 중 아시아 대표 자리가 언제 재패니즈, 차이니즈 또는 인디언 등으로 바뀔지 모른다. 한식 파인다이닝이 음식으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더불어 우리 문화와 예술까지 알리는 현재의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식은 파인다이닝이라는 하이앤드 무대에 이제 막 올랐고 세계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스시는 도쿄 길거리 음식에서 세계 최고의 파인다이닝을 거쳐 보편화까지 이뤄냈다. 이제는 일식이 아닌 세계인의 음식이다. 세계 각지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스시에 담긴 일본의 정체성이 사라질 수는 없다. 스시는 파인다이닝이면서 동시에 노포다.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면 보편화가 필요하다. 뿌리를 내려야 한다. 김치, 불고기, 김밥, 떡볶이, 잡채 그리고 라면 같은 음식들이 점차 세계인의 보편적 입맛을 사로잡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스시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계인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 나와야 하고, 그걸 요리할 현지인 한식 셰프들이 나타나야 하고, 세계 곳곳에 그들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열려야 한다. 누군가 리더십이 있어야 하고, 전략이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한식 파인다이닝들이 해줬으면 좋겠다.
전략은 이것이다. 결국 세계화의 경쟁력은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쟁력’에서 썼다.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을 나만이 갖고 있을 때 그걸 경쟁력이라 하고, 시간이 쌓일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진다. 한국의 전통 음식은 나만이 갖고 있는 것이고,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인 것이긴 하지만, ‘누구나 갖고 싶은 것’에서 막힌다. 세계인 누구나가 먹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일, 그것을 한식 파인다이닝들이 해주어야 한다. 오리지널에서 시작한 변주다. 한가운데서 시작해 경계를 넘는 거다. 손잡이와 연결된 칼끝이고, 뿌리에서 뻗어 나온 꽃이다. 이제 닻을 올리고 돛을 내려서 순풍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식 파인다이닝이 연결되어 있어야 할 가장 한국적인 음식의 3가지 분야는 첫째, 노포다. 한반도 각지에 흩어져 산과 들과 강과 바다 같은 우리의 자연과 인문을 담고 있는 고유한 지역성(regionality)이고 민속이다. 지역소멸로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100년 된 씨간장이 사라지기 전에 뉴욕의 한식 파인다이닝에서 지리산 산나물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100년의 시간과 11,000km의 공간을 초월한 향연이다. 둘째, 궁중음식이다. 노포는 실체가 있지만, 궁중음식은 상당수가 기록만 남아있다. 하지만 궁중음식은 전국 각지에서 진상된 최고의 식재료로 만들던 당대의 하이앤드고, 식문화의 정수다. 파인다이닝의 콘셉트에 맞는다. 셋째, 사찰음식이다. 불교는 유교와 함께 우리 정신문화의 요체다. 사찰음식에는 그 정신문화가 녹아있고, 특히 비건이다. 역시 파인다이닝의 콘셉트에 부합한다.
한식 파인다이닝이 노포, 궁중음식, 사찰음식이라는 우리 전통과 연결되어, folk(민속), royal(왕가), spirit(정신), vegan(채식)과 같은 전통에서 비롯된 다양성을 장착하고 세계무대에서 화려한 변주를 해낸다면, 궁중음식이라는 하이앤드의 정체성부터 노포라는 대중의 정체성까지 내재하고 한식의 보편화를 이루어낸다면, 한식은 아시아 대표가 아닌 세계 대표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 코리아의 경제, 문화, 예술의 도움을 받았지만, 한식이 그들을 선도하고 주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