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파고 넓게 펼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벚꽃 시즌이다. 남쪽부터 봄이 올라오고 있다. 이즈음 일본에도 구마모토, 도쿄, 후쿠오카 순으로 벚꽃이 만개하고 있을 것이다. 벚꽃은 법률상 일본 국화는 아니다. 다만 가을에 피는 국화(菊花)와 함께 봄에 만개하는 벚꽃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여겨진다. 공식적으로는 일본 황실 문장(紋章)과 일본 여권에 국화 문양이 들어간다.
같은 시기에 벚꽃이 만개하는 곳이 또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이다. 백악관, 의회,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 등 도심 주요 명소마다 벚나무가 심겨 있는데, 1912년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당시 도쿄 시장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선물한 쇼메이 요시노(染井吉野櫻) 품종의 벚나무 묘목 3000여 그루가 시초다. 그리고 최근 미국을 국빈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가 미국 독립 250주년(2026년)을 축하하는 뜻으로 벚나무 250그루를 추가로 기증했다. 매년 3월 워싱턴에는 벚꽃 축제가 열린다.
약 3주간 계속되는 축제에는 미국 전역에서 150만 명이 몰려든다. 워싱턴 연간 관광 수입의 3분의 1이 여기서 나온다. 일본 항공사 전일본공수, 미국 빅테크 아마존이 최상위 스폰서로 참여하고, 렉서스, 미쓰비시, 파나소닉, 마루베니, 다이이치산쿄 같은 일본 기업들과 주미 일본 대사관, 일본국제교류기금 같은 공공기관 등 수십 곳이 후원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물론 일본 정부의 유력 인사들도 태평양을 건너 축제에 참가한다. 역사, 문화, 여행, 경제, 정치 등 워싱턴발 벚꽃 기사들이 미국 전역으로 송고된다. 그야말로 벚꽃을 매개로 한 양국 친선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이 시기 주미 일본문화원(JICC)도 분주하다. 축제 한 달 전에는 ‘벚꽃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하고, 지일파(知日派) 전문가들을 초청해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또한 워싱턴의 레스토랑과 술집들은 스시, 사케, 위스키, 다도 같은 일본 전통 음식과 문화를 활용한 이벤트를 집중적으로 열고, 주요 호텔들은 벚꽃 패키지를 판매한다. 또한 미국 대표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일본의, 외교, 안보, 경제 관련 행사를 개최하는 등 벚꽃 축제 전후로 일본 관련 각종 학술 행사, 방일(訪日) 프로그램 등도 집중적으로 추진된다.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스쿨 학장이었던 에드먼드 걸리언 박사가 1965년 주창한 이론으로, “상대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우리를 인식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외교부도 공공외교에 대해 “문화, 예술, 스포츠, 가치관과 같은 무형의 자산이 지닌 매력을 통해 상대국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프트 파워를 추구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벚꽃 외교는 대미 공공외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데, 하나 더 있다. 미국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는 AP(Advanced Placement) 코스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일종의 대학 강의 선수강 제도로, 1, 2학년 때 일정한 자격 요건을 충족하면 AP 과목을 이수할 수 있고, 취득한 학점은 대학 입학 후 그대로 인정된다. 일본은 AP 세계사 과정에서 ‘메이지 유신’, ‘진주만 습격’ 등 20여 개 주제를 채택받았다. 2016년까지 단 한 개의 주제도 채택받지 못했던 한국은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한종우 교수(세계역사디지털교육재단 이사장)의 노력으로 최근까지 3개 주제를 겨우 반영했다.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우리에 대해 미리 알리고 이해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효과적인 외교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손 놓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사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지리학 AP 코스에서 쓰이는 교재에 독도 영유권과 동해 표기 대목을 자신들의 입맛과 의도대로 기술해 전달하고 있고, 문학 AP 코스 교재에는 일본의 고전 시까지 포함시켰다. 심지어 미국과 적대적 관계인 중국도 수십여 개 주제를 AP 코스에 반영하고 있다. 외국어 분야에서도 일본어와 중국어는 이미 15년 전에 AP 과정이 개설됐는데, 한국어는 아직 추진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은 영구적으로 무장해제됐다. 무력행사가 배제된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본의 힘, 일본적 가치를 드러내야만 했고, 평화를 수호하는 산업강국, 문화강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콘텐츠는 애니메이션, 드라마, 음악 등에서부터 의식주와 생활양식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됐고, 이를 다시 경제적 부가가치로 연결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일본 정부가 문화라는 코드로 외교,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는 이른바 ‘쿨 재팬(Cool Japan)’ 정책이다. 벚꽃, 스시, 캐릭터 등이 그 성공적 산물이다. 그리고 과학, 건축, 문학, 스포츠, 관광 등으로까지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일본 특유의 집중력과 집요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깊게 파고 넓게 펼치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독도와 7광구 소유권 분쟁 등에 대비한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와의 관계, 군함도와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된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분담금, 후쿠시마 원전 방사성 오염수 해양 방류 관련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대한 영향력 등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우리 정부는 2010년을 공공외교 원년으로 선포했다. 2011년부터는 공공외교 대사를 임명하고 있고, 2016년엔 <공공외교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이후 매년 수백억 원의 예산을 공공외교에 집행하고 있다. 우리가 단 한 개의 주제도 반영하지 못했던 2016년까지 AP 코스 세계사를 이수하는 미국 고등학생들은 수십 개 주제를 반영한 일본과 중국이 기술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중국의 속국이었던 한국’만을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