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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소통의 기술(Speak yourself, Love yourself)

by 봄날


지인이 언젠가 주말에 서울 근교 천덕봉에 올라 백패킹을 하고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과 일몰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운해가 아름다운 가을 산의 풍경에 마음이 설레고 많이 부러웠다. 이제 앞으로 취미를 다양하게 개발해서 나이 더 먹으면 재미있게 살아가자고 한다. 그런데 나는 원래 어릴 때부터 시골이지만 비교적 귀하게(?) 자라서 땀 흘리는 것을 싫어했다. 나는 말 그대로 불한당이다. 조금 운동을 하다가도 땀이 날 정도가 되면 그만두곤 했다. 그리고 또 주말마다 동네 카페에 내려가서 책 읽고, 영화 보고, 신문과 잡지를 읽으며 힐링도 하고 혼자만의 사색을 즐겨 온 지 오래다.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들, 즉 불한당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직장 생활하는 도회적인 남자들은 대개 오십 대 초반부터 이제 저녁 술자리는 일반적으로 많이 줄어들고 주말에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와 함께 필드에서 라운딩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몇 가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오십이 넘으면 저녁에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할 수 있는 체력이 안되니 힘들다. 둘째, 유일하게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운동이고 더 중요한 것은 라운딩을 하는 동안만큼은 집중할 수 있다 보니 머리 아픈 일들을 잊어버리게 되어 실제로 힐링이 된다. 대개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가고, 오는 과정이 힘들지만 단순하게 집중할 수 있는 매력이 있어서 좋다.


경기도 이천 원적산(634m) 천덕봉 정상


물론 사적인 것만 아니면 일정 한도 내에서는 회사의 비용처리가 된다. 셋째, 이제 오십 대가 되면 더 이상 재미있는 저녁식사 자리에서의 화젯거리가 별로 없다. 가끔씩 서로 침묵이 흐를 땐 어색할 뿐이다. 젊을 때는 군대 얘기, 이성과 연애에 대한 얘기, 회사 상사에 대한 얘기 등 할 말이 넘쳐난다. 하지만 오십이 넘기 시작하면 이미 그런 얘기들을 이십 년이 넘게 듣다 보니 서로 식상할뿐더러 상사 얘기를 할 윗사람도 몇 명 안된다. 또한 그런 상사의 뒷얘기가 얼마나 백해무익한 것인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리더십과 단합을 이유로 잦은 저녁 회식 자리를 만들어 직장 후배들을 힘들게 하고 용비어천가를 즐기는 간부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십은 업무 추진 실력에서 나올 뿐 회식과는 관계가 없다. 시대적인 흐름에 뒤떨어진 그런 간부는 그렇게 도태되어 갈 뿐이다.


오십이 넘은 도회적인 남자들은 라운딩을 하는 약속이나 핑계가 없으면 친구나 지인들을 만날 이유나 수단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친구도 자주 만나야지 할 얘기가 점점 많아진다. 하지만 그 나이 때의 남자들은 그냥 술이나 커피를 마시자고 먼저 연락할 만큼 그 명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개 남자들은 그렇게 가정이나 사회에서 대화로부터 고립되어 간다. 남자들이 제일 잘하는 일 빼고는 일반적으로 대화의 수단과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 나이가 되면 여성들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도 반나절은 즐거운 대화와 소통을 할 수 있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중에서



오십 대 이상의 개개인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다양한 취미활동과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들과 달리 그동안 여럿이 모이면 일 얘기만 했을 뿐, 그런 소재나 주제로 자신의 대화를 이끌어본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냥 혼자만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각종 커뮤니티나 동호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잘 나가던 시절의 옛날 얘긴 그만하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나 읽은 책, 또는 여러 가지 취미나 여행,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공감하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유럽의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그런 어른들이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그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일 때가 많았다.



나이가 들면 조금 오래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화두는 정치 얘기뿐인데 그마저도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결국엔 진영논리가 자리 잡고 있어 논쟁이 될 뿐이다. 이젠 서로 좋지 않은 결말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정치 얘기마저도 꺼내지를 않는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고 좋은 현상이다. 어차피 정치란 것도 나 자신의 얘기가 아닌 남 얘기를 하는 것이니까 도움이 안 되고 남는 게 없다.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오십 대 중반 이상의 베이비붐 세대들은 고속 성장과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니 이젠 더 이상 나라 걱정, 자식 걱정 그만하고 백세 시대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소통의 기술을 개발하고, 우리 스스로의 꿈과 삶을 준비하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고 걱정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한 만큼, 이제 그 걱정은 당대인 젊은 그들과 그들의 미래는 그들 스스로 걱정하고, 선택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식과 경륜이 늘고
인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이 늘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늘며
성찰하지 않으면 뻔뻔함만 늡니다
인간은, 스스로 퇴화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전우용, 역사학자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중장년 세대들이 유사 이래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훌륭한 청년세대들이 살아갈 날들에 대해 흘러간 과거의 패러다임 속에서 의사 결정하고, 어떤 선택을 대신한다면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젠 적극적으로 나서서 참견하기보단, 자녀들이나 후배들이 요청할 때만 인생의 깊은 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와 경험을 전해주면 어떨까 싶다. 과거는 과거일 뿐, 세월이 흐르면 우리가 가진 지식의 절반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지식이다. 새로 학습하고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남은 그 절반의 절반마저도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스스로 퇴화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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