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런 것, 원래 그래도 되는 것은 없다

성탄절 이야기

by 봄날


크리스마스 주말 저녁, 북극에서 내려온 찬바람에 갑자기 날씨는 시베리아가 되었다. 일박이일 겨울여행에서 묵었던 호텔 베이커리에서 사 온 독일 크리스마스 빵 슈톨렌과 네스프레소 커피 한잔을 내려 먹고는 기분 낸다고 유튜브에서 조용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찾아 듣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저녁을 먹었으면 지하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쓰레기도 버릴 겸, 내일 휴일 동안 먹을 시장도 보고 가까운 성당에 함께 산책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어릴 때 나름 귀하게 자란 탓인지 나는 근성도 없고 게으르고, 추운 게 정말 싫다.


제부도 매바위


그냥 음악 들으면서 조용하게 쉬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서운한 기색을 보여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가 넘치는 성탄절이라는 것을 깜박했다. 먼저 가정의 평화가 우선이다.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는 털후드가 달린 롱패딩과 귀마개로 완전 무장을 하고 아내를 따라나섰다.


가사노동을 함께 아니 그래도 아내가 거의 대부분을 하지만 살아오면서 쓰레기 분리수거만큼은 내게 부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름 아내도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출근하면서 또는 외출하면서 잘 차려입은 외모에 남자가 쓰레기봉투, 특히 음식물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을 때 별로 보기가 안 좋았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제비꼬리길 산책로


어제 여행을 다녀오면서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고 있는데 저쪽에서 육십 대 전후로 보이는 아저씨가 마대자루를 들고 주차장을 청소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재빨리 내리더니 그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무언가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얘기를 마치고 온 아내와 함께 엘베를 타고 그 연유를 물었다.


언젠가 지하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 바뀌었는데 그분이 너무 열심히 일하시고 깨끗하게 분리수거장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일터에 가끔은 음악을 틀어놓고 예쁘게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해놓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를 우연히 만난 김에 성탄절에 맛있는 저녁 식사라도 하시라며 약간의 성의를 표현했는데, 봉투에 넣어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너무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하고 왔다고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슈톨렌을 왜 자기가 계산해야 하냐며 내게 묻던 아내의 훈훈한 얘기와 함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오늘 성탄절에 내려온 것이다. 정말 듣던 대로 한쪽 구석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너무 예쁘게 되어 있었다. 근래에 보았던 어떤 크리스마스 장식 이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었을 뿐 아니라 감동이었다. 이 세상에 원래 그런 것, 원래 그래도 되는 것은 없다.


자신이 하는 일에 이렇게 진심일 수 있을까, 그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분의 진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SCREEN(서도호, 2005)


아내와 함께 성당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불의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고, 부당한 자들과 타협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함께, 세상의 가난하고 힘들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성탄절,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을 성모 마리아님과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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