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저 좀 제발 채용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

by 레메디오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다.


한창 힘이 들 때, 나는 회사가 나를 속박하는 감옥이라고 생각했었다. 친구들이나 부모님, 남편과 이야기할 때는 회사 욕이 일 순위였고, 회사란 나를 소모품으로 다루는 악랄한 ‘갑’이었으며, 나는 가련하기 그지없는 ‘을’이었다. 그러나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고 보니, 목에 사원증을 걸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눈이 부시는지. 나의 노력의 대가, 내가 한 때 속했던 그 세계가 갑자기 아쉬워졌다.


회사란 사실, 나를 지켜주는 성벽이었던가.


그러나 나의 현재는 언제나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였으므로. 기회비용에 대한 아쉬움들은 미련 없이 날려버리고, 나는 다시 나아가야만 했다.


다시, 구직자가 되다.


다시는 구직자의 신분으로 접속할 일 없으리라 여겼던 취업사이트를 열었다. 이력서 메뉴에 접속한 후, 각종 경력들과 이력들을 한계치까지 짜내어 이력서를 채워나갔다.


저는 아나운서와 제안 프레젠터를 거치며 스피치에 능숙하고, 파워포인트와 HWP를 아주 잘 다룹니다. 일정 수준 일본어 통역이 가능하며, 한국어 및 영어 교원자격증과 강의 경험도 있습니다. 이런 저를 채용해주실 분 어디 안 계시나요? 열심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경력 기술서를 적고 나니, 그래도 내가 제법 열심히 살아온 듯해서 잠시 으쓱한 기분도 든다.


그러나 이제, 고용 조건들을 생각해볼 차례.


20대 구직자로서의 나와 30대 워킹맘 구직자로서의 나는 이제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다. 대학원을 갓 졸업하고 열정만이 가득했던 나는, 그야말로 “시켜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라는 아주 이상적인 구직자였더랬다. 출퇴근 시간, 그게 뭔가요? 모름지기 신입사원이란 회사에서 날밤도 샐 각오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식대, 야근 수당 그게 다 뭔가요. 저에게 직장인이라는 자리만 주셔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에야 누군가 이런 자세로 구직한다면 울며불며 매달려서라도 말릴 각오이지만, 사회인으로서 내 자리 하나가 그리도 간절했던 그 시절 나는 그랬다.


10년차 직장인,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30대 중반의 워킹맘으로서 내 구직 조건은 참으로 까다로워졌다. 먼저 9시 출근-6시 퇴근이 기본인 정규직은 가장 먼저 탈락이다. 육아에 비중을 두겠다며 잘 다니던 회사도 박차고 나왔는데, 채용이 된들 어린이집 운영 시간까지 고려하면 도돌이표일 뿐이다. 출퇴근 거리도 최소 왕복 1시간 이내여야 한다. 혹여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야근이 없어야 할 것. 불과 며칠 전까지 야근과 새벽 근무로 정신적, 신체적 쇠락을 겪은 나이지 않은가. 내 남은 인생에 강제적인 야근 지옥은 다시는 없어야만 한다.


그래서 조건을 덧붙인다. 내가 원하는 고용 형태는 바로 ‘프리랜서’라고.


이렇게 정리된 조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자니, 내가 고용주라도 나 같은 사람은 뽑지 않을 듯해 뱃구레가 싸하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한다. 세상은 넓고, 일자리는 많은 법. 이런 나라도 필요한 곳이 한두 곳쯤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다시, 시켜만 주신다면 ‘정해진 조건 안에서는’ 아주 잘 합니다.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고 아주 헤드헌터들과 업체들을 기다리며 입사 지원서를 넣기를 수일 째.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캘린더에 면접 일정들을 채워 넣으며 다시 전투에 돌입한다. 자리는 하나지만 차지하려 덤벼드는 투사는 여러 명이므로, 쟁취하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첫 번째 면접, 영어 화상 강사이다. 재택으로 일할 수 있고, 오후부터 업무를 시작할 수 있어 벼르고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는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할 수 있는 강사.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최소 7시에 데려와야 하는 나로서는 무리다. 3시부터 7시까지만 일할 수 없는지 물으며, 내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이고 잘 가르칠 수 있는지 열변을 토해보지만 결국 연락은 없다.


두 번째 면접, 제안 전문 프레젠터다. 프리랜서로서 입찰이나 제안 스케줄에 따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자리다. 약간의 긴장 속 선보인 시연도 성공적, 면접도 중반까지는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지방 출장이 새 화두로 뜨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 워낙 야근과 출장이 많은 남편의 직업 탓에 나만큼은 이전 회사에서도 지방 출장을 최대한 반려했던 상황. 새로운 직장에서는 더욱 가능할 리 없다. 곤란한 표정에 급격한 분위기 하락 속 면접은 종료. 역시 채용하겠다는 연락은 없다.


세 번째 면접, 국어 강사다. 파트장과 인사를 나누고 내 경력과 이력, 앞으로의 각오에 대한 내 열변이 통했을까.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근무해야 하지만, 일하겠다면 7시 퇴근까지는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아, 거의 된 게 아닐까 들뜬 마음에 연락을 기다리기를 사흘째. 문자 알람에 설레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켜니 가장 먼저 보이는 문구는 ‘죄송합니다’이다. 파트장이 채용하자고 적극 주장했지만 원장의 뜻으로 반려되었다고 한다. 수업은 8시까지 운영되어야 하는데, 7시까지만 강사가 근무할 경우, 나머지 한 시간을 위해 다른 수고를 만들 수는 없다는 뜻이란다. 너무도 타당한 사유라서 달리 할 수 있는 항변도, 억울함도 없다.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네 번째 면접, 초등‧중학생 대상 영어 강사다. 근무 시간은 평일 1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거리도 가깝고 근무 시간도 적당하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아이를 돌볼 수 있고, 또 퇴근 후 7시 전후로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수 있다. 영어도 좋아하고, 아이도 좋아합니다. 정말 열심히 가르칠 자신이 있어요. 1시간여의 열변과 간절함이 담긴 시범강의 끝에 면접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드디어, 첫 번째 일을 얻어냈다. 내가 프리랜서로서 세상에 발을 딛는 첫 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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