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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메디오스 Jun 07. 2023

Chapter 2. "선생님, 왜 존댓말 해요?"

<학원강사가 바라본 알쏭달쏭 아이들>

‘이상한 것 찾기 혹은 만들기’, 때로는 '지적하기'. 성장기 아이들의 공통 재능이 아닌가 싶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요즘 ‘선생님 이상하게 만들기’ 놀이에 심취해 있다. 하루는 “선생님 왜 송곳니가 누래요?”라면서 치아미백 비용을 검색해보게 만들고, 또 하루는 “선생님은 왜 손톱이 짧고 못생겼어요?”라며 평생 해본 적 없는 네일아트 비용을 알아보게 한다.      


최근에는 말투 따라하기에 탐닉 중인데, 한때 지방방송국에서 뉴스 진행을 했던 내 말투가 아이들에게는 특이하고도 재밌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말끝을 항상 내린다느니, AI 음성 같다느니, 유튜브 오토튠 목소리가 떠올라 이상하다느니 각종 비유와 분석으로 쉬는 시간을 채운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문득 생각해보니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선생님은 왜, 우리에게 존댓말을 하느냐고.      

최근 육아 관련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도 ‘아이에게 존댓말 하는 문제’가 소소한 화두였던 듯하다.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배우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사례들이 왕왕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부모가 자녀 대상으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필요한데, 의미 없는 존댓말은 위계질서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특히 훈육하면서 존댓말을 사용할 경우 아이에게 존댓말에 대한 반감을 심어줄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척 설득력이 있어, 생각해봄직 하다.      


나도 내 아이에게 존댓말을 남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존중의 의미’를 보이고 싶어서다. 물론 존중의 자세를 무조건 존댓말로 보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주일에 고작 한두 번 만나는 아이들에게, 존중의 자세를 가시적으로 보이기 위해 존댓말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본다.      


사람 간 주고받는 '말'이란 단순한 내용 전달을 위한 핑퐁이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태도와 발화자의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말은 거울과 같다. 나의 태도를 그대로 비추며 상대방에게 반사하기도 한다. 호의가 호의로, 악의가 악의로 돌아오듯이, 존중은 존중으로 돌아온다. 상대를 존중하는 말을 함으로써 나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다.     


나는 남편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한다. 7살 연상인 남편도 마찬가지다. 연령에 따른 거리감 등 여타 떠오를 만한 문제들 때문은 아니다. 오랜 시간 함께 존중하며 살아가기 위한 안전장치 중 하나다. 놀랍게도 존댓말은 갈등상황에서 특히 그 힘을 발휘한다. 이성을 잃거나 분노에 물든 상태에서 반말은 짧은 만큼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흙먼지들이 가득 내려앉은 낮은 창틀처럼, 지전분한 말들이 내려앉기 참, 쉽다. 반면 존댓말에는 험한 말들이 포개지기 힘들다. 말에 달라붙으려는 오물들을 여과시키는 힘이 있다.           


책 <아이의 뇌를 깨우는 존댓말의 힘>에 따르면 존댓말은 사회성과 인지발달에도 유용하다고 한다. 청자나 지칭하는 이의 나이, 자신과의 관계, 상황을 잘 파악함으로써 제대로 된 존대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전두엽을 통한 분석력과 판단력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또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일수록 관계를 잘 형성하므로 사회성과 자신감이 높으며, 자존감과 인성도 바르게 형성된다고 한다.      


존댓말을 사용하면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법에만 맞는다고 존댓말이 아니다. "참 잘했어요."라는 말에 진심 어린 칭찬이 담겼느냐, 비아냥이 담겼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힘의 크기와 종류가 달라진다.      


2020년 법원에서 '존댓말 판결문'이 등장에 논박이 이어진 사례가 있다. '존중'을 바탕으로, 수요자인 국민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취지였다. 판결문을 존댓말로 쓴다고 사법 권위가 떨어질까? 존중을 담은 소통은 닫혀있던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마음을 열게 한다. 존댓말 판결문이 나온 후 인권위 결정문과 공공기관 계약서 및 공문에서도 존댓말을 채택한 것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다.      


몇몇 신문에서는 '존댓말 사설'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판결문이든 신문 사설이든, 읽는 사람은 보통 국민이요 일반 독자들이다. 어투의 변화는 단순한 형식의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탈권위를 기반으로 한 태도의 변화다. 평어체를 수단으로 수용자를 계도하려는 오만의 태도를 걷어내고, 겸공(謙恭)의 외투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도 항상 '존중 받으려면 자격을 갖추라’고 이야기한다. 한 쪽의 일방적인 존중은 의미 없는 상호작용이다. 사랑과 배려를 담아 '존중의 언행일치'를 이루어내자는 것.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해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도 선생님이 저희 존대해주니 꼭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설레요.”      


한 아이의 수줍은 말에 내 마음도 볕이 든 응달처럼 따스해진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또한 미래를 책임질 이들로서 존중의 태도를 마음 깊이 체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 존댓말이 그 수단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늘의 빛깔을 담아내고자 온갖 색깔들을 배합하며 색을 찾는 늙은 화가처럼, 신중히 말을 골라 목소리에 싣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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