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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메디오스 Jun 05. 2023

Chapter 1. "선생님이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학원강사가 바라본 알쏭달쏭 아이들>

“선생님도 딸한테 화낸 적 있어요?”     


과제를 검토하던 중, 한 아이의 물음에 나는 TV 전원 스위치를 누른 듯 번쩍 시야를 옮긴다. 사춘기에 접어든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와 다툰다는 아이다. 바로 전날도 게임시간 때문에 엄마랑 실랑이를 벌였단다. 학원 숙제까지 다 하고 나서 자투리 시간에 30분 정도 모바일 게임을 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본 엄마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또 게임이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서러운 마음에 할 말 못할 말 서로 한 바탕 쏟아내고 나서, 곧 만 하루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그럼 화도 안 내고 항상 다정하게 대해주시니까 싸울 일도 없을 텐데…. 입을 삐쭉이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나는 내가 집에서 얼마나 호랑이 엄마인지 손짓발짓 각종 미사여구에 과장까지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면서 어머니도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화내신 게 민망해 아무 말도 못하시는 것일지도 모르니, 오늘 하원하면 배고프다, 밥 달라며 자연스럽게 말 걸어보라 꾀어본다. 다음 주에는 생글생글 기분 좋은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모와 학원강사 사이에도 물론 교집합이 있다. 아이들을 다독여 책을 읽히고, 숙제를 하게 하며, 편히 담소를 나누거나 고민을 상담해주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이와 그들 사이에는 각각 다른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혈연과 정, 평생에 걸친 책임감 같은 것들이 다리처럼 굳건하다면, 학원강사와 아이들 간에는 자본으로 맺어진 인연 아래 대가성 친밀함이 존재한다. 어설프게 덥힌 냉동만두마냥 겉은 뜨겁고, 속은 차갑다.      


아이들 입장에서야 하루에도 몇 번씩 잔소리와 쓴소리를 돌탑처럼 쌓아올리는 엄마보다 항상 친절한 학원강사들이 더 편할 수도 있다. ‘선생님’들은 시종일관 단정하게 꾸민 외양에 흐뭇한 미소를 장착한 채 아이들과 눈 맞추며 칭찬하고 다독인다. 기껏해야 주 1~2회, 하루 중 2~3시간 마주하는 강사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크게 꾸중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 물론 꾸짖을 때도 있다. 떠들거나, ‘튀는’ 행동으로 수업을 방해할 때, 과제를 해 오지 않을 때, 성취가 더디게 나타날 때다. 강사들은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들의 성취를 주 단위, 월 단위, 분기 단위로 체크하고,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독려한다. 진심어린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아이들의 모든 행동 특성을 검토하고 교정하기는 힘들다. 주 몇 시간 동안의 관찰들로 아이들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는 것은 오만일 뿐이다.        


4주마다 진행되는 전화 상담에서 부모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 아이에게 칭찬 좀 많이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재차 다짐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면 칭찬보다는 꾸중하고 타박하는 날이 더 많다며, 다정함을 베풀 기회를 기꺼이 양보한다. 걱정하지 마시라며, 아이들의 자존감 향상에 힘쓸 것을 약속드리면서도 못다한 말이 목에 걸린 듯 답답해질 때도 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는, ‘항상 온화한 태도로 소통하는 이상적인 부모’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하루 20~30명의 아이들을 만나며, 그 어떤 소란이나 다툼에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게 된 나조차도 집에 오면 한 마리의 용가리가 되어 불을 내뿜는다. 가뜩이나 큰 목소리가 복면 쓴 가왕들 못지않게 한계치 옥타브까지 올라가며 천장을 뚫고, “이거 치워!” “이렇게 하면 어떡해!” “지난번에 엄마가 말했잖아!”라며 사사건건 지적해댄다. 식탁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클라이밍마냥 옷장 위로 올라가는 등 호기심과 모험심에 조금이라도 무모한 짓을 하려 치면 불호령을 떨어뜨린다. 외출 중 울음이라도 터뜨리는 날에는 비상이다. 가뜩이나 온라인상에서 이런저런 이슈의 중심에 선 ‘진상(이라 이름 붙여진, 사실 아주 보통의) 아이들’ 사례를 떠올리며 몸을 사린다. 사실 아주 극소수의 불량품이나 하자보수 못 받은 인간들이 아니고서야, 부모가 아이들을 혼내고 통제하려는 이유는 첫째,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오, 둘째, 우리 아이가 어디서 험한 취급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탓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만 보면 화를 낸다.”라며 마음 속 상처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아이, “내 마음이 그게 아닌데, 나는 왜 아이에게 상처만 주게 될까.”라며 마음 졸이는 부모. 각종 인쇄·영상매체에서 이들을 위해 하루에도 몇 개씩 ‘현명하게 꾸중하는 법’, ‘영리한 소통법’ 등의 콘텐츠를 제작한다. 방법은 수십 수백 가지지만 결국 요지는 ‘솔직함’이다. 칭찬에도 이유가 있는 것처럼, 꾸중에도 이유가 있음을 아이들이 납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너’를 혼내야 하는 이유를 터놓는 것, 이 모든 것은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사랑받고 귀히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임을 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아이들의 수용 능력을 믿는 것이다.      


자유 토의가 주된 수업 내용인 탓에, 아이들의 마음 속 깊은 소망을 들여다볼 일이 많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칭찬 욕구’이다. 그 대상은 학교나 학원 선생님도, 또래 친구나 선배도 아니다. 바로 부모님이다. 등교 전 부모님께 받은 사소한 칭찬 한 마디가 아이의 하루, 혹은 일주일의 상태까지도 좌우할 수 있다.      


꾸중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모든 꾸중’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이유가 분명하다면, 약간의 불만은 있을지언정 겸허히 수용하고 기꺼이 발전가능성으로 삼는 게 아이들이다. 억울한 마음에 항변할 수도 있다. 이때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도중에 끊지 않고 존중하는 자세로 끝까지 들어주고, 감정적으로 공감해준다면 꾸중 또한 아이들에게 귀중한 선물이 된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꾸중은 풀린 나사를 조여 꾹꾹 발 아래를 다질 수 있게 한다'는 말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우리 아이들이, 단단히 나사를 조여낸 두 발로 즐겁게 춤추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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