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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1. 첫 방문객

봉숙은 커피 한 잔을 들고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갔다. 

반 지하였으므로 실내는 어두웠지만 비스듬한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낸 창문가에는 늘 햇살이 머물렀다. 유난히 환한 그곳에 대나무로 만든 흔들의자를 놓았다. 남편이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손때가 묻어 반지르르한 팔걸이는 매끄러워서 봉숙의 팔을 툭툭 떨어뜨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마치 남편이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푹 기대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 좋은 흔들림이 그녀를 편안케 했다. 흰머리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이마에 햇살이 부딪쳤다. 


‘아, 좋은데.’

커피는 식어 있었지만 좁은 실내를 향으로 가득 채워서 만족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햇볕 속에서 졸던 봉숙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빈 커피 잔을 유리창 턱에 올려놓고 의자를 바로 잡았다. 실내 귀퉁이 어둠 속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부터 초봄의 찬 기운이 천천히 실내로 번지고 있었다.

봉숙은 다가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일단 멈춤. 무슨 일인지 모르니까. 그리고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까.’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흔들의자로 돌아와 최대한 조용히 앉았다.

그러나 육중한 그녀의 몸무게로 의자는 잠시 삐걱거렸다. 

     

‘의자를 버려야 하나, 고쳐야 하나?’

봉숙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흔들의자의 소음에 집중했다. 


‘아, 조용히 좀.’

점차 의자의 소음은 잦아들었고 실내는 어둠 속에서 잠잠했다.

봉숙의 신경은 온통 뒤쪽의 방문객에게 쏠려 있었지만 소리는커녕 공기의 흔들림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방광이 터질 듯했다. 


‘커피 기운이 작동하는군. 그런데 저 인간은 오줌도 안 누는 모양.’

참다못해 고양이 걸음으로 출입문을 향해 가는데 느리고 가느다란 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 여기 지나가다가 입구에 있는 글을 보고 들어왔어요. 괜찮죠?”

순간 봉숙은 입구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를 생각해야 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혼잡한 기억을 뒤지기도 전에 예의 소리가 귓속을 간질였다. 


“별 일이 없어도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그러셔서.”

아, 그랬지. 그때서야 자신이 호기롭게 써서 시트지로 오려 출입문에 떠억 붙인 글이 생각났다.


<당신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별일 없으셔도, 별 일이 있으셔도 커피 한 잔 하고 가십시오. 

교회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합니다.>  

   

두 달 전, 봉숙이 교회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은 신학교 동기들이 모였다. 그들은 나름의 이유로 늦게 공부를 한 이들이라 대부분 늙수그레했다. 동기들과 봉숙의 가족들, 그리고 몇 지인들이 축하한다고 모인 자리였다. 때늦은 추위에 눈발까지 날렸지만 반 지하는 생각보다 따뜻하고 훈훈해서 사람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덕담을 나누며 차를 마셨다.  

    

“커피 좋다. 케냐? 그런데 봉숙아, 누가 커피 마시러 지하까지 올까? 더구나 교회라고 간판까지 붙였는데 말이야. 다시 생각해 봐.”

경희가 심드렁한 말투로 읊조리듯 했다. 경희는 손님들 중 유일한 여고 동창이었고 아마도 유일하게 부자였다. 


“여긴 너처럼 호텔 커피숍 못 가는 사람들 많아. 할 줄 아는 게 커피 마시는 것 밖에 없으니 좋은 커피 좀 나눠 마시려고 한다. 왜?”

봉숙의 빈정대는 말투는 들은 척도 않고 경희는 중얼거렸다. 


“봉숙, 너, 말에 가시가 있다. 그런데 뭐 이런 데서 무슨 고급 커피?”

나긋한 말소리와 달리 주변의 동기들을 훑어보는 경희의 시선에 한심하고 나른한 감촉이 묻어났다. 경희는 외모나 말하는 투가 단연 돋보여서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봉숙을 흘끔거렸다. 


“야. 너 담에 와. 지금 좀 조용히 하고!”

봉숙이 눈에 안 띄게 경희를 압박해 한쪽으로 몰고 가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과연 봉 목사답네. 교회면 교회고 아니면 아니지, 교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건 뭐야?”

웬만한 남자보다 고개 하나가 더 높은 키의 여자 목사가 봉숙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에게는 기린교회나 사바나 교회가 어울리겠단 생각을 했었다. 


“오 마이 갓!”

구석으로 밀려난 경희가 키 큰 여자를 보며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저도 교회란 말을 쓰고 싶진 않았는데 교회라고 해야 보증금을 깎아 준다니까 굳이 나쁠 건 없잖아요. 건물주가 점쟁이 말을 신봉한다고 하더라고요.”

봉숙의 말투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교회를 시작하는 마당에 점쟁이 말이 어쩌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심사를 건드렸음이 분명했다. 


“하여간 축하해요. 서설(瑞雪)이 내리네. 이왕 시작했으니 잘 되길 바라요.”

얼마 전에 교회를 세웠으나 몇 달째 월세를 걱정하고 있다는 어떤 목사가 얼른 자리를 끝내고 싶어 했다.


“감사합니다. 글쎄, 축하받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교회인지 카페인지를 시작한 이후 호기심으로 잠깐씩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으나 이렇게 장시간 앉아 있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네 맞습니다. 그냥 커피 한 잔 마시고 쉬었다 가세요. 화장실은 요 위 1층이에요.”

젊은 여자인 것이 분명한 어둠 속의 존재를 향해 활짝 웃고는 화장실을 다녀와서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아, 참 불은 켜 두고 가야겠네. 첫 손님인데 의자에 부딪칠라.’

다시 잠잠해진 어둠 속을 힐끗거리며 입구의 스위치를 모두 올리고 문을 열었다. 옅은 주황과 흰색이 섞인 천정의 전등이 일시에 켜지자 실내는 다른 세상처럼 온화함이 가득했다. 

봉숙은 낯선 방문자를 일부러 외면한 채 화장실을 향해 내달렸다. 금방이라도 소변이 쏟아질 것 같았다.       

    



화장실은 꽤 괜찮은 곳이었다. 일단 일층이어서 환했고 양변기며 거울이며 모두 새것이어서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물건들이었다. 

봉숙은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고 옷매무새도 고칠 겸 거울 앞에 섰다.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흰머리는 많았지만 피부는 차분한 흰색이었다.  

    

‘나이를 오지게 먹었군.’

손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고 화장실을 나와 지하로 천천히 진입했다. 

아까 켜 둔 전깃불로 인해 문틈으로는 환한 빛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실내는 옅은 노랑으로 칠해져서 불을 켜면 온화했다. 바닥에는 원탁 테이블이 여섯 군데 놓여 있고 앞쪽에는 구석 쪽에 단차를 두어 나무로 된 보면대를 세워 놓았다. 그녀가 일요일에 설교를 하기 위한 장치였다. 뒤쪽에는 파벽돌을 붙이고 도서를 세팅해서 마치 긴 책장이 있는 듯했다. 그 밑에는 기다란 나무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훌륭하지 이 정도면.’

기분 좋게 들어서는데 뭔가 허전했다.

역시.

찬란하게 쏟아지는 빛 속에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비슷한 일들을 몇 번 겪고 난 터라 무심하게 전원 스위치를 내렸지만 마음속에 화가 차올랐다. 떠나간 낯선 이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바람에 봉숙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교회라서 부담스러운가? 간판을 바꿔? 아니, 교회인 줄 알고 들어오지 않았나?’

다시 어둠이 실내를 점령하고 흔들의자 쪽에만 조명이 켜진 듯 환했다. 

흔들의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데 어둠 속의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뭔가 놓여 있었다. 

빵이었다. 투명 비닐에 담긴 4개의 빵은 둥글고 작았다. 

봉숙은 혹시 다시 찾으러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빵을 지나치려는데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분홍빛 포스트잇이었다.   

  

‘빵 놓고 갑니다. 드세요.’

얼마나 글씨가 작던지 들여다보느라 코끝이 종이에 닿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다가 빵 봉투를 들고 흔들의자로 갔다.


‘뭐지? 내가 굶는다고 생각했을까?’

잠시 생각을 고른 후 빵 봉지를 들고 눈앞에서 흔들며 관찰했으나 평범한 빵이었다.   

  

‘주려면 잼이나 버터라도 줘야지, 달랑 모닝빵이라니.’

염치는 사라지고 뻔뻔함만 남은 것 같은 혼잣말에 웃음이 났다. 


‘언제 와서 나를 본 적이 있었을까?’

다시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 앞에 놓인 네 개짜리 모닝빵만 실체였다. 

     

“사모님!”

출입문이 벌컥 열리면서 덩치 큰 남자가 들어섰다. 봉숙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빵을 상대방에게 던질 뻔했다. 어깨에 정수기용 물병을 둘러멘 생수업체 직원이었다.


“불을 켜세요. 어두우니까.”

봉숙은 짜증을 섞어 남자에게 소리쳤다. 

익숙하게 불을 켠 남자는 물통을 갈아 끼우고 빈 물통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목사님은 안 계시네요.”

남자는 언제나 봉숙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남자가 쓰는 호칭을 바꿔줄 마음도 없었고 별 의미도 없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빵 드실래요? 누가 두고 갔는데. 혼자 먹긴 많아서.”

빵 봉지를 든 손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아유, 저 빵 안 좋아해요. 고맙습니다만.”

남자는 고개를 젓곤 바로 나가버렸다.

      

‘맛없어서 먹기 싫다는 거지. 뭐. 개인의 취향이니까.’

두 달 전 정수기를 설치하러 왔을 때 빵을 안 좋아하는 이 남자는 단팥빵을 세 개나 해치웠었다. 


‘웃기는 아저씨네. 그나저나 나에게 빵을 주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갸웃거리며 빵을 든 채 다시 흔들의자로 돌아왔다. 

퇴근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저, 목사님!”

뭔가 익숙한 가느다랗고 힘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와우!”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쪽으로 진심을 다해 걸어갔다.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의자는 훨씬 큰 소음을 냈다. 


“제가 빵만 드리고 잼을 잊어서요. 죄송해요.”

목소리보다는 건강하게 생긴 여자가 긴 생머리를 뒤로 넘기며 뒤에 멘 가방을 앞으로 돌렸다. 작고 귀여운 배낭에서 투명한 병에 담긴 잼을 꺼냈다. 색깔로 봐서 딸기나 포도잼 같았다. 그녀의 가쁜 숨이 뛰어 왔거나 적어도 급히 걸어왔음을 알려주었다.


“제가 만든 거예요. 빵도 직접 구운 거고요. 목사님 드시라고요.”

얼떨결에 병을 받아 든 봉숙의 표정이 난감했다. 


“저를 아시나요?”


“봉 목사님 맞으시죠? 출입문에 씌어 있잖아요. 담임목사 봉 숙이라고.”  


“예, 그렇긴 한데.”

사실 봉숙을 성과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늘 봉숙이었다. 그녀의 엄마만 ‘숙아’라고 불렀다. 


“그냥 드세요. 담에는 커피 마시러 올게요. 지금은 출근해야 해서요.”


“아, 예. 그런데. 왜 빵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바깥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한층 어둠이 짙어진 실내에서 봉숙은 한 손엔 빵 봉투를 다른 손엔 잼이 든 병을 든 채 그녀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저녁에 출근이라.’

그녀는 가고 다시 봉숙은 혼자 남았다.     

     



“외로워서 죽지는 않았나 보러 왔지.”

초봄 아침의 맑은 빛이 퍼지기 시작한 10시 즈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열려 있는 문으로 낯익은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한 손에는 투명 비닐에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었고, 다른 손엔 커피홀더가 들려 있었다. 


“근처에 괜찮은 음식점도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브런치 배달 왔다.”

옅은 회색의 실크 원피스에 좀 더 짙은 색의 모피 조끼를 걸친 경희였다. 

막 청소를 끝낸 봉숙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내 말이 맞지? 혼자 청승 떨고 있을 것 같더라.”

경희는 어깨만 한 번 흠칫하곤 제일 중앙 테이블에 가져온 물건을 올려놓았다.

 

“무슨 일? 사모님께서 행차하시기엔 너무 누추한데. 무슨 일 있지?”


“나중에, 나중에. 귀신같기는.”

의자에 주저앉은 경희는 다리를 꼬고 앉아 고운 눈을 흘겼다.

경희의 숨 고르기를 기다리며 봉숙은 사무실로 들어가 어제 방문객이 주고 간 빵과 잼을 꺼내왔다. 빵 봉투엔 습기가 어려 뿌옇게 보였다.


“어제 어느 아가씨가 두고 갔어. 이래 봬도 수제 빵과 잼이란다. 같이 먹을 친구가 생겨서 좋네.”

마주 앉아 빵과 잼을 늘어놓는 봉숙을 보며 경희는 눈을 껌뻑였다.


“누구라고? 누가 이걸 주고 갔다고?”

경희는 빵 봉투를 들어 이리저리 훑어보고 잼이 든 병도 사방으로 돌려 보았다. 


“아무것도 없네. 넌 브랜드도 없는 빵을, 그것도 처음 본 사람이 준 빵을 먹겠다고? 아니, 나랑 먹자고?”

경희가 빵과 잼을 관찰하는 동안 봉숙은 그녀와 그녀의 브런치를 살펴보았다.

양상추에 토마토, 잘게 썬 올리브와 피망, 견과류가 어우러진 샐러드와 치아버터 빵 한 조각, 열대과일로 토핑을 한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그리고 두 잔의 뜨거운 커피. 

그에 비해 어제의 빵과 잼은 더할 수 없이 담백했다.


“봉숙아, 오늘은 내가 가져온 거 먹어. 뭘 믿고 아무거나 먹겠다는 거야. 너 저 속에 마약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쩔래? 세상이 어떤지 모르는구나, 목사라.”

경희는 잔소리를 하며 담백한 빵과 잼을 다른 테이블에 옮겨 놓았다.


“생각 같아서는 갖다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네가 받았으니까 네가 처리해라.”

봉숙은 한쪽에 치워진 빵과 잼을 보다가 가만히 경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어디 가는 중이었어?”

그러나 경희는 자신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작고 마디가 매끈한 손가락에서 서 너 개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네일숍에서 정성껏 손질한 손톱은 과하지 않은 빛깔의 매니큐어로 깔끔했다. 


“아니, 갈 데가 없더라.”

봉숙은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불과 두 달 전에 만났을 때보다 약간 수척해 보였지만 느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갈 데가 없다니...... 집 나왔니?”

설사 집을 나왔다 하더라도 갈 데가 천지인 친구가 경희였다. 


“아니.”


“말을 해 봐. 내가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해야 알지.”

봉숙은 여전히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지만 경희는 그저 심드렁했다. 


“너, 신통력 있잖아? 목사잖아?”

경희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말투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벤츠 차주 되시는 분. 차 좀 빼 주셔야 되겠는데요?”

위층의 물건을 실으러 배송 트럭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경희가 차를 움직이러 나간 후 봉숙은 테이블에 놓인 빵과 잼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제 보았을 때와, 지금은 확실히 빵과 잼이 달라 보였다. 

찬바람과 함께 다시 들어온 경희는 주저앉아 브런치 식사를 풀었다. 


“일단 오늘은 내가 사 온 거 먹자. 커피 다 식었네. 그리고 저 빵은 조용히 버려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덥석 먹는 건 아니지.”

따스하고 향긋한 커피와 신선한 샐러드로 식사를 하며 봉숙은 옆 테이블로 밀려난 빵과 잼을 계속 흘끔거렸다. 달콤한 케이크로 디저트를 먹으면서도 봉숙은 계속 옆 테이블이 신경 쓰였다.

 

‘내일이라도 그 아가씨가 올까? 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분명히 빵과 잼에 대해 답을 듣고 싶을 텐데. 이런 경우엔 뭐가 정답인가?’

갈 데가 없다는 경희가 집으로 돌아가고 봉숙은 빵과 잼을 들고 흔들의자로 돌아왔다. 창틀에 놓은 빵 위로 비스듬한 빛이 무지개 색을 빚어내고 있었다.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 어제 난 첫 방문객을 맞았잖아. 젊고 여렸던 그녀가 나에게 준 것이 맞아. 당연히 먹으라고 준 것이고.’

봉투를 열어 빵 한 조각을 떼어 잼을 발랐다. 잼은 딸기도 포도도 아닌 사과잼이었다.

빵에서 풍기는 효모의 냄새가 시큼하면서 구수했다. 4개의 빵 중에서 하나를 다 먹고 난 후 봉숙은 하나를 더 먹을까 망설였다. 브런치의 양이 적기도 했거니와 모닝빵도 작아서 포만감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빵을 좋아했다. 


‘당신이 빵 집으로 시집을 갔으면 문제없이 100kg은 돌파했을 거야.’

워낙 빵을 좋아하는 그녀를 남편은 곧잘 그렇게 놀렸다. 


‘빵을 너무 좋아하면 빵으로 망할 수도 있지.’ 

남편이 생전에 무심코 했던 농담이 갑자기 서늘하게 들렸다. 

봉숙은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째의 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마에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봉숙은 빵에 잼을 듬뿍 발라 놓고 커피가 생각나서 카페 데스크로 꾸며진 입구 쪽으로 갔다. 


“목사님!”

출입문이 가만히 열리며 머리를 뒤로 묶어 늘어뜨린 어제의 그 방문객이 들어섰다. 바깥공기와 함께 목화향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왔어. 드디어!’

봉숙은 큰 소리가 나오려는 걸 누르고 대신 그녀를 향해 함빡 웃었다. 

갑자기 경희와의 시간이 피곤함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젊은 여자의 이름은 수진이었고 봉숙의 직감대로 간호사였다. 봉숙이 아는 근처의 대형병원에서 어제의 나이트 근무를 끝내고 한숨 자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빵을 직접 굽는다고요? 정말 담백하게 맛있더라고요. 잼도 언제 그렇게 만들어요?”

봉숙의 입에서 마구 말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젊고 예쁜 여자가 교대 근무를 해가면서 만든 빵과 잼이라니. 그럼에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선물을 한다는 것이.


“목사님 성함이 저의 엄마와 똑같으세요. 엄마는 허 숙이었지만요. 빵을 좋아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건강빵으로 구워 드렸어요. 맛은 없지만 몸엔 좋거든요.”

봉숙은 목덜미가 어떤 강한 손에 눌린 듯했다. 그리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대체 난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수진은 두 달 전부터 특이한 간판의 이곳을 눈여겨봤고 몇 번 들여다봤다고 했다. 그때 봉숙이 흔들의자에 앉아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이 들리기도 했었다고. 


“아, 그랬군요. 내가 이렇게 둔해요. 무슨 말을 하던가요?”

봉숙은 짐짓 궁금한 듯 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자세히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대화였어요.”


“혼자서요? 아, 그래서 무서웠나요?”

수진은 대답 대신 웃으며 커피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봉숙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수진은 에어팟으로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흔들의자가 있는 창틀에는 봉숙이 뜯어 놓은 빵이 하나 나와 있었고 잼이 든 병은 뚜껑이 열려 있었다. 

수진은 앞으로도 빵을 구워 오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도록 넉넉하게 해오겠단 말도 잊지 않았다. 

봉숙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요동쳤다.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는지 막막했다. 갑자기 경희의 얼굴이 떠오르고 조금 전에 가졌던 부끄러움이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수진은 귀에 꽂았던 에어팟을 내려놓고는 봉숙의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별 말도 없었고 봉숙도 묻지 않았다. 흔들의자의 창으로 비껴 들어온 햇살이 둘 사이를 부드럽게 갈라놓았다. 봉숙은 수진을 놓아둔 채 흔들의자로 돌아와 먹던 빵과 잼을 정리했다. 그리고 흔들의자 옆의 작은 사무실에서 책을 한 권 들고 나왔으나 수진은 없었다.

 

<수진님께 드립니다>

속표지에 글씨를 쓰느라 그녀를 놓친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훑어보다가 예의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목사님을 방해한 것 같아 그냥 갈게요. >


봉숙의 마음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 답답했다. 

그 이후로 수진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오늘은 아직 글씨를 안 쓰셨네요.”

출근해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열린 문으로 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어제 입었던 감색 운동복 바람이었다. 쉰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봉숙이 세든 건물의 직원이었다. 

계약할 때 사장에게 듣기로는 건물의 1,2층에서 원단 가공업을 하고 있으며 3층은 검수장, 4층이 사무실이라고 했다. 이 반들반들한 신축건물이 제조업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사장의 사업 머리가 의심스러웠으나 반 지하에 굳이 교회를 들이겠다는 고집 덕분에 싼 값에 들어오긴 했다. 

      

“아, 예. 청소가 늦어서요.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봉숙의 제안에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체격만큼 크게 웃었다. 

     

“아뇨. 어딜 제가 사모님 커피를 마시겠어요? 아이고, 올라가겠습니다.”      

정수기 기사나 위층 남자나 봉숙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중년의 남자들이었다. 

     

‘하긴 장사하려고 점포 청소하는 자영업자 같겠지. 다를 것도 없네.’

바닥을 청소기로 돌리고 나서 고무장갑에 손걸레를 든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더욱이 오늘은 끝자락에 프릴이 달린 갈색 코르덴 점퍼스커트와 노랗기가 수선화 같은 카디건을 걸쳤으니 폭신한 소보로 빵 한 덩이로 보였을 것이다.      

테이블과 의자까지 닦고 나니 땀이 나고 허리가 욱신거렸으나 입구에 세워진 작은 칠판을 들고 들어왔다. 남자가 말한 '글씨'를 쓰기 위해서였다. 

날씨에 따라, 혹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메모하듯 적는 글이었다. 

목적은 물론 이 지하에 들어오라고 하는 초청이었다.  

     

    <봄눈이 올 것 같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신가요?

    오늘도 좋은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누구나 오십시오.>  

   

 글씨를 쓰면서도 마음속에 의심의 구름은 계속 일었다.

      

‘커피를 마시러 누가 이 땅 속으로 들어올까? 다른 필요가 있어야 들어올 테지.’ 

나오려는 한숨을 눌러 집어넣고 일부러 웃었다.  

    

“자, 자! 다시 시작, 오늘도 기다립니다. 아시겠지만 개점휴업 두 달쨉니다.”   

누군가 들으라고 확실하게 중얼거리며 화이트보드의 구석에 붉은색 마카로 꽃 한 송이를 그려 넣었다. 

     

“목사님, 부장님이 보낸 거예요. 오늘 점심에 드시래요.”

1층에서 지하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타닥타닥 나더니 머리를 깡충하게 묶은 40대 초반의 여자가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아, 저 처음 보시죠? 저는 여기 회사 이 과장이에요. 매일 원단만 들여다보느라 목사님 말씀만 듣고 처음 뵙네요. 여자 목사님이라고 해서 궁금했거든요.”

여자는 반 지하의 실내를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봉투에서 김밥 냄새가 솔솔 새어 나왔다.      

“누구라고요?” 

보드마카를 손에 쥔 채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여자에게 물었다. 

    

“저기 2층 부장님이요. 방금 목사님 만나고 오셨다는데? 백민기 부장님이에요.”

봉숙은 실내의 불을 모두 켰다. 어쨌든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따스한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그 사내가 백민기구나. 백 부장.’ 

봉숙이 빙긋 웃자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여자가 말을 이었다.  


“왜요? 부장님이 목사님 되게 좋다던데요?”

이런 느닷없는 고백을 제삼자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그래요? 고맙네요. 백 부장이란 말이 재밌어서요.”

여자는 봉숙의 대답 따위는 기다리지 않고 테이블 사이를 아이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 가는데 너무 가늘어서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봉숙의 몸무게 반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말라 있었고 걸음도 불안정했다.  

   

“우리 부장님이 사람은 좋은데 알코올 중독이에요. 맨날 제가 깨워서 온다니까요. 아, 저는 사장님의 처제고 부장님은 사장님 형님이지요. 가족 회사라고 보시면 돼요.”

갑자기 봉숙의 머릿속에 가족관계도가 그려졌다.       

형님이 백 부장, 사장이 백 사장, 처제가 이 과장, 그럼 사장 부인도 이 아무개겠군.

말로 듣기보다 아주 간단한 그림이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봉숙은 여전히 실내를 돌아다니는 여자의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아뇨.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안 돼요. 불면증 있거든요. 우리 회사가 만드는 게 고급 비단 같은 거예요. 왜 사우디아라비아 여자들 쓰고 다니는 천 있잖아요? 그게 비싼 건 엄청 비싼데 그걸 만드는 거죠. 저는 검수하고 있어요. 한 번 구경 오세요.”     

여자는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했다. 봉숙은 그녀의 뒤꽁무니에서 메아리를 듣는 듯했다. 

    

“어머, 너무 예쁘네요. 카페 같아요. 여기서 예배도 보나요? 어머머, 책도 있고. 저기 유리창 옆이 사무실이구나. 흔들의자 너무 맘에 든다. 아유, 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림이네요.”

여자는 어느새 흔들의자의 영역까지 훑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카페인지 교회인지 모호하다고 심드렁해했던 이들에 비해서 여자는 그냥 즐거워했다. 

그 즐거움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언제든 내려와서 좀 쉬었다 가요. 디카페인이나 다른 차도 준비해 놓을게요.”

봉숙은 진심으로 여자를 위해 집에 있는 생강차와 유자차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쉴 시간이 없어요. 들여다보느라 눈이 너무 아파도 납품 날짜에 맞추려면 할 수 없죠 뭐.”

얼핏 본 여자의 눈은 심하진 않았으나 사시였다. 그래서 눈을 맞추지 않으려는가. 

      

“그런데 그 천을 한참 보고 있으면 기분이 야릇해져요. 화려한 비즈 장식 같은 것들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지. 예쁘기도 하지만 그만큼 피곤해요.”     

여자는 쉼 없이 떠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봉숙은 자신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느꼈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심히 그녀의 목이 늘어진 스웨터에 시선이 닿자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앙상한 쇄골 뼈 위로 이어진 그녀의 턱 밑에 오래된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 올라갈게요. 꼭 김밥 드시라고 부장님이 전해 달랬어요.”

갑자기 김밥의 뻑뻑한 느낌이 목을 지나는 듯했다. 

     

“예, 고맙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닥거리는 발걸음이 사라졌다. 

순간 꿈을 꾼 듯했는데 테이블엔 검은색 비닐이 무게감을 갖고 놓여 있었다. 

     

‘와, 오늘은 김밥이구나. 이 밥은 뭘 믿고 먹어야 하니, 경희야?’

경희가 해죽거리며 검정 비닐을 빙빙 돌려 보는 그림이 그려졌다.  

봉숙은 검정 비닐 속에서 알루미늄 포일에 싸인 김밥 두 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왜 본인이 아니고 이 과장에게 김밥을 전달하게 했을까? 이 과장이 가져간다고 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궁금했다.  

점심식사로 한 줄이면 충분했기에 한 줄은 냉동실에 넣으려고 문을 열었다.

텅 빈 냉동실에 수진이 주고 간 모닝 빵 2개만 서리를 뒤집어쓴 채 얼어 있었다. 

냉동실의 한기가 안개처럼 온몸을 감쌌다.

봉숙은 모닝 빵을 손으로 쓰다듬고 곧 얼어버릴 김밥 한 줄을 그 옆에 놓았다.

이유 없는 뿌듯함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수진이와 이 과장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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