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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5. 돈

반 지하는 온종일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봉숙만 열심히 출퇴근을 했다. 그녀의 작은 차는 대개 공용 주차장이나 골목에 있어서 반 지하에 그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침마다 간단한 초대의 글이 쓰인 칠판이 나와 있었고, 그 내용은 매일 달랐다. 그러니 봉숙이 반 지하에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봄, 봄, 봄입니다.

대기에 가득한 봄을 함께 누리세요 

케냐가 준비되었습니다>    

 

봉숙은 병아리 색 스웨터를 흰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 위에 걸쳐 입었다. 봄이면 그녀가 즐겨 입는 옷이었다. 검은 바탕에 짙은 녹색 체크무늬가 어우러진 스커트를 입을까 하다가 너무 뚱뚱해 보일 것 같아 청바지를 입고 나온 아침이었다. 

 반 지하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환한 느낌이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불이 켜진 것은 아니었고 흔들의자 쪽의 빛이 여기저기에 반사되고 있었다. 봉숙은 좋은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쏟아지는 빛에 고맙다고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테이블에 놓인 빵 바구니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대나무 껍질을 격자로 엮은 사각형 바구니에 빵이 그득 들어 있었다. 수진이가 왔어.

봉숙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디에도 수진은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 그랬듯 포스트잇만 한 장 단정히 놓여 있었다. 

     

<목사님, 이번 주일에 함께 드세요. 실온에 두셔도 돼요.>

그녀의 글씨를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냉장고 생각이 났다. 수진이 냉장고를 열어봤다면 아직도 그녀의 빵이 꽁꽁 얼어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물론 수진이 냉장고를 열지는 않았을 테지만 봉숙은 미안했다. 그리고 빵을 가져다 놓은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 것을 먼저 생각했다는 데에 화가 났다. 난 아직도 멀었구나.

      

‘그런데 주일날 먹으라니 교인이 한 명, 그것도 불분명한 중년 여인밖엔 없는데 수진인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많은 빵을 가져다 놓았을까.’

봉숙은 바구니의 빵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바게트가 고르게 잘린 채로 한 봉지. 소금빵이 다섯 개나 되었다. 귀리와 통밀빵이 또 다섯 개. 모닝빵이 한 봉지에 여섯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작은 병에 든 사과잼과 앙증맞은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가 각각 한 병씩이었다. 마치 빵집의 한 진열대를  펼쳐 놓은 것 같았다.  

봉숙은 빵을 그대로 펼쳐 놓은 채 흔들의자로 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저 많은 빵을 다 냉동시켜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테이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예쁜 쟁반에 빵을 잘 배열해 놓고 칠판의 글을 지우고 다시 썼다. 

     

<건강빵입니다. 곱고 착한 분이 만든 것이니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 

혹시 커피가 필요하시면 반 지하로 오십시오. 오늘은 케냐입니다.>  

    

봉숙은 흐뭇한 마음으로 테이블과 칠판을 바라보았다. 경희가 했던 염려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다만 누군가 한꺼번에 털어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다가 그 또한 그 사람의 선택이니 존중하기로 했다. 빵은 먹고 싶은 사람에게 잘 먹히면 되는 것이니까. 혹시 수진이가 안다 하더라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머그컵에 가득 따라 마시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햇살은 여전했으니 아직 정오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하고 창밖을 한 번씩 쳐다봤지만 기대했던 한재상과 그 손수레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 앞으로 고양이 한 마리만 꼬리를 잔뜩 치켜세운 채 도도하게 지나갔다. 

     

“사모님, 이거 무슨 달러예요? 2달러가 1장, 100달러가 5장이나 있어요. 이거 누가 가져가면 어쩌려고.”

목소리만으로도 2층의 백 부장인 걸 알 수 있었다.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가니 과연 백 부장이 빵 테이블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한 지폐는 소금빵 밑에 단정히 눌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열해 놓은 빵 중에서 바게트 빵 자리만 비어 있었다. 

     

“바게트를 가져가려면 오일과 발사믹도 챙기시지. 그런데 웬 외화죠?”

봉숙의 말에 백 부장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오늘 회사에 바이어가 온다고 했는데 제가 출근이 늦었네요.”


“바이어와 달러가 무슨 상관인데요?”     


“그 여자는 달러만 쓰거든요. 틀림없어요. 하여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멍하니 서있는 봉숙을 놔두고 백 부장은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 과장이 오늘은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깨우다가 실패하고 이 과장 먼저 출근을 했는지도 모른다. 주춤거리던 봉숙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오일 병과 미화 지폐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닫힌 출입문에는 ‘중동 컴퍼니’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봉숙은 회사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어 미안했다. 건물에 회사 이름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장은 자신의 회사 이름은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지만 봉숙에게는 간판을 달도록 허락했다. 심지어 옥상에 십자가 탑을 세워도 좋다고 했는데 그것은 봉숙이 거절했었다. 

‘중동 컴퍼니’의 출입문 앞에서 봉숙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바게트와 올리브 오일, 발사믹 식초가 세트인데 빵만 가져가셨네요.’


‘돈을 받지는 않으니 다시 가져가세요.’     

명분은 빵과 달러였으나 사실 봉숙이 궁금한 것은 회사였다. 사장은 언제든 와 보라고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젠 이 과장과 백 부장과 또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혹은 사장도 같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사장 말에 의하면 3층이 검수장이고 4층이 사무실이라니 아마도 그는 4층에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봉숙은 이 과장과 백 부장 외에는 회사의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사장도 계약할 때 본 것이 처음이었고 끝이었다.

      

“아유, 사모님이 올라오셨네. 어쩐 일이세요? 사장님은 4층에 계신데.”

마치 오늘 처음 본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봉숙을 맞은 것은 백 부장이었다. 내부에서는 자동화 기계가 두 개의 라인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백 부장만 기계의 작동을 살피는 것 같았다.  

    

“이 과장님은 여기서 일하지 않나요? ”

봉숙이 예상외라는 듯 멀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과장은 왔다 갔다 해요. 3층에서 주로 검수하는데 2층 근무도 하죠. 그런데 사장님 만나러 오셨나요? 지금 바이어 손님이 계시긴 한데.”     


“아, 예. 혹시 바이어란 분이 달러를 놓고 가셨나 해서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돈을 물같이 쓰죠. 뭐, 하여튼 올라가시죠.”

백 부장은 봉숙을 4층으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을 오르면서 그는 바이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부자이고 인심이 후해서 회사 파트너 중에 에이스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봉숙이 굳이 사장이나 바이어를 만날 이유는 없었으나 달러의 목적이 불분명하고 마음이 편치 않아서 백 부장을 따라 4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왼쪽 벽에 금사와 은사와 각종 비즈로 수 놓인 천이 가지런히 걸려있고 투명한 유리가 덮인 나무장은 샘플 진열장 같았다. 내부는 간단한 업무용 책상과 소파뿐이어서 생각보다 아주 단출했다. 장식이라곤 오른쪽에 위치한 사장의 대리석 테이블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한 뼘 길이의 반가사유상뿐이었다. 

소파에서 사장은 창문을 등지고 앉았고 그 앞에는 보라색 천에 금사로 수 놓인 히잡을 쓴 검은 정장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있었는데 킬힐의 금빛 굽이 도전적으로 빛났다.  

    

“아,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사장의 목소리는 백 부장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계약할 때도 그랬나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때는 백 부장의 존재를 모를 때였다. 

    

“통역이 될까요? 교회 앞의 빵은 무료로 드리는 것이라 돈을 돌려 드리러 왔어요. 아마도 손님께서 두신 것 같다고 해서요. 또 바게트는 올리브유와 발사믹초와 세트니까 함께 가져가시라고.”

봉숙은 사장인지 백 부장인지에게 통역을 부탁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천천히 했다. 

     

“아닙니다. 제가 행운을 드리고 싶어서 2달러를 놓은 거예요.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는 받을게요. 가져올까 하다가 모닝빵에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놀랍게도 대답을 한 여자는 한국인의 어법과 말투였다. 봉숙이 멀거니 바라보자 여자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라일라입니다. 놀라셨죠? 제 남편이 중동 사람이지요. 목사님 얘긴 들었어요.”

봉숙은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손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향긋한 냄새가 여자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빵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질문을 해 놓고 곧 바보 같단 생각을 했다. 빵을 가져가라고 써놓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당연하죠. 빵을 좋아해요. 그리고 나머지 500달러는 헌금으로 사용해 주세요. 저는 무슬림이지만 상관없죠? ”

여자의 말에 사장이 나섰다. 부담 없이 받으셔도 된다고. 종교가 다른 게 무슨 상관이냐고. 자기는 불교지만 무당이 지하에는 교회를 내주어야 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들은 거라고. 그런데 손님이 없어서 어쩌냐고. 월세를 더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까지 사장은 묻지도 않은 말을 느릿하고 지루하게 했다. 그러는 중에 바이어 여자는 까르륵 대며 웃기도 하면서 진지하게 사장의 말을 들었다. 

     

‘리액션이 대단한 여자네. 불교가 무당하고 무슨 상관이람.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젊은 사람이 점집이나 다닌다니. 그리고 이 시커먼 여자는 행운의 2달러 같은 소리나 하고 있고, 유유상종이다.’     

얘기를 들을수록 마음이 산란해져서 봉숙은 사무실을 나왔다. 백 부장도 따라 나왔는데 마침 3층으로 올라오던 이 과장과 부딪쳤다. 봉숙이 반갑게 아는 체를 하려고 했으나 이 과장은 쌩하니 문을 닫고 검수실 안으로 들어갔다. 

     

“못 알아봤을 거예요. 지독한 근시에다가 사람을 안 쳐다봐요. 또 사모님이 여기 올라오셨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요. 신경 쓰지 말고 내려가세요.”

마치 봉숙이 상처라도 받을 것 같았는지 백 부장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봉숙은 괜찮다며 계단을 천천히 걸어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완전히 퍼져서 온화한 공기가 대기에 편만했다. 

빵이 놓였던 테이블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칠판에 써 놓았던 글씨는 여기저기 지워져서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언어가 되어 있었다. 

     

“애들이 와서 빵 다 집어갔어요. 칠판도 지우고. 전에 장난한 그 놈들.”

앞치마를 두른 채 밖으로 나온 순댓국집 사장이 애들처럼 일러바쳤다.    

  

“먼저 본 놈이 임자지 뭐. 누가 공짜를 놔두나요? 목사님,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순댓국집 사장의 목소리에 입 다물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돌아서서 혼자 중얼거렸다.  

   

‘공짜든 뭐든 제가 알아서 할 거고 제 일입니다.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교인이고 아니고, 애고 어른이고 다 속물이지 뭐. 에휴!”     

순댓국집 사장의 말이 그녀의 뒤통수에 꽂혔지만 외면하고 반 지하로 부지런히 내려갔다.  

그녀의 손에는 꼬깃하게 접힌 달러가 휴지처럼 쥐어져 있었다. 사무실의 서랍에 구겨진 달러를 휙 던져 넣고 천천히 닫았다. 굳게 봉함하듯이.  

        



드디어 산책로엔 철쭉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철쭉의 색깔은 치열한 핑크빛과 우윳빛이었는데 우윳빛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우윳빛의 철쭉은 마치 간유리 같아서 바람이 불면 잘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꽃들의 그런 풍경만으로도 하루가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토요일이어서 회사 사람들은 출근하지 않았고 양쪽의 음식점도 오전이라 한가했다. 늦은 아침을 점심 겸 해장하러 오는 근처의 주민들도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봄의 정점에서 

철쭉의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오늘의 커피는 스페셜 블렌딩입니다.>  

   

봉숙은 블랜딩 커피를 좋아하지 않지만 경희가 가져다주는 것은 달랐다. 전문 로스터가 있는 그녀의 카페는 특별한 블랜딩 커피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래서 봉숙은 경희의 커피를 스페셜 블랜딩이라고 이름 붙였다. 

산미도 알맞았고 무엇보다 먼저 풍겨오는 꽃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목 안으로 슬며시 화하게 퍼지는 묘한 향이 적도의 느낌을 주었다. 

커피를 내려 그 향을 마음껏 음미하며 드보르작의 음악을 틀었다. 낭만적 소품이란 것만 알고 있는 바이올린 곡이 조용히 흘렀다.  

    

“두둥둥 찬찬찬 둥두두두두......”

갑자기 울리는 드럼 소리에 봉숙은 하마터면 커피를 엎을 뻔했다. 도대체 누구야? 놀라서 벌떡 일어서자 흔들의자가 괴로운 소음을 냈다. 봉숙은 마음을 다스리며 드럼 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 과장이야! 그녀가 드럼을 치러 왔네.’

특별히 설치해 놓은 핀 조명도 켜지 않고 실내 조명도 물론 켜지 않은 채 이 과장이 드럼 앞에 버티고 앉아 스틱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보면대에 악보를 놓고 헤드폰을 낀 것으로 보아 음악을 들으며 치는 모양이었다. 봉숙이 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의 음악에 몰두해서 발과 손을 움직여 드럼을 쳤다. 

봉숙은 그녀의 음악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연주는 계속되어 봉숙은 자신의 흔들의자로 돌아갔다. 그녀의 드럼 연주는 얇고 가벼웠으며 어찌 보면 경쾌했다. 봉숙은 무슨 음악인지 묻고 싶었으나 여전히 연주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같은 곡을 반복해서 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자 소리가 멎었다.      

“이 과장님, 드럼 잘 치시네요. 무슨 곡이에요?”

봉숙이 서둘러 나와 그녀를 불렀다. 


“헤어지자 말해요.”


“네?”


“곡명이요.”

이 과장은 평소의 그녀처럼 여전히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아주 따스한 봄임에도 불구하고 일전의 회색 터틀넥 니트 차림이었다.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해요.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시간 되죠?” 

이 과장은 약간 망설이더니 드럼 근처 테이블 의자 끝에 불안하게 앉았다.  

    

“드럼 경력이 꽤 됐나 봐요. 저는 잘 모르지만 굉장히 듣기가 좋네요.”

봉숙이 재빨리 루이보스차를 만들어 권하자 그녀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네, 시작한 지는 한 10년 됐어요. 안 친 지도 몇 년 되었구요.”  

   

“그랬구나. 어쩐지. 드럼 치는 사람 보면 참 멋지단 생각이 드는데 저는 안 해 봐서요.”

이 과장을 부르긴 했으나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봉숙 자신도 난감했다. 

그런데 이 과장이 배시시 웃었다. 멋지단 말이 웃음을 부른 것 같았다. 처음 본 그녀의 표정 변화에 봉숙은 감탄했다. 저렇게 천진한 표정이라니.   

  

“과장님, 참 예쁘네요. 웃는 모습이.”

봉숙의 말에 이 과장은 얼굴을 붉혔으나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저는 이지영이에요. 이름이. 회사가 아니니까 과장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미안, 미안해요. 이름을 몰라서 그랬어요. 참 예쁜 이름이네요. 지영 씨.”

이지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잠깐 했다. 백 부장과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이 회사 사장 마누라는 자기보다 세 살 아래의 동생이라고 했다. 거기까진 백 부장을 통해 봉숙이 알고 있는 얘기였다. 끊어질 듯 말 듯 이야기를 하던 이지영은 잠시 멈추고 한숨인지 길게 내쉬고 한참을 있었다. 

     

 “지금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어요. 안 본 지 10년은 된 것 같아요.”

봉숙은 깜짝 놀라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으나 말을 삼켰다. 그런데 일단 화가 났다. 사연이야 있을 테지만 어미가 아이를 못 본다는 사연이란 것 자체에 불같은 화가 났다.  

    

“연락을 끊었더라고요. 전 남편이.”

이지영의 한숨은 봉숙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아 멀리 가 있는 그녀의 아들을 소환했다. 

세상의 어딘가를 걷고 있는 봉숙의 아들은 잊어버릴 만하면 보이스톡을 했다.  

    

‘아이를 못 보는 것은 지영 씨나 나나 똑같네. 화낼 일이 아닐지도 몰라.’

따져보니 이지영은 이혼과 함께 드럼 스틱을 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선택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우울증 약을 달고 살고 상담과 치료를 받느라 월급을 다 탕진하고 있단 말을 백 부장이 하지 않았던가. 

    

“그렇구나, 지영 씨. 드럼이 위로가 된다면 언제든 와서 치지 그랬어요? 여긴 늘 열려 있었는데.”   

  

“밤에 몇 번 왔었어요. 그런데 무서워서 조금 하고 갔죠.”

하긴 평소에는 일하느라 시간을 못 냈을 것이고 그녀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캄캄한 밤뿐이었을 것이다. 

봉숙은 한없이 야윈 그녀를 바라보며 오늘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느냐 물었다. 그동안 김밥도 갖다 주고 해서 고마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저는 밥은 잘 안 먹어요. 드럼을 조금만 더 치다 갈게요.”

할 수 없이 봉숙은 이지영을 떠나 흔들의자로 돌아갔다. 다시 드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계세요?”

경쾌하고 밝은 남자 목소리가 반지하 주인을 찾고 있었다. 

이지영은 여전히 헤드폰을 낀 상태로 드럼에 몰두하고 있어서 봉숙이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출입문에는 거대한 크기의 남자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풀잎교회 맞죠? 드럼 소리가 나서 잠깐 들어왔는데요. 괜찮나요?”     

“아, 그럼요. 커피 한 잔 하실 수 있어요. 들어오세요.”

남자는 들어와서 드럼을 치는 이지영을 한참 바라봤다. 경이로운 눈빛이었다.   

   

‘지영이 드럼을 잘 치나 봐.’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이지영의 드럼 솜씨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목사님이시죠? 저는 김현준이라고 합니다. 제가 좀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남자는 대뜸 명함을 한 장 내주었다. 

명함에는 ‘OO카드 대표 김현준’이라고 단순하게 씌어 있었다.   

   

‘카드 영업하려고 들어왔나? 더 필요 없는데.’ 

봉숙이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을 깼다.   

  

“제가 여길 가끔 지나다니는 데 올 때마다 조용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드럼 소리가 들리기에 용기 내서 들어와 봤어요. 제가 음악을 좋아해서요.”

봉숙은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미심쩍었다. 드럼 소리와 자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셨군요. 일단 커피 한 잔 드릴게요.”

봉숙이 커피를 가지러 가려고 하자 남자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  

    

“목사님, 커피는 됐구요. 제가 여기 교회에 와서 찬양을 하면 안 될까요? 기타와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어요. 물론 노래도 하구요.”

봉숙은 이 남자가 여기 사정을 알고 얘길 하나 싶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물론 교인도 없는 것 같고 같이 찬양할 사람도 없겠지요.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평일 저녁에도 좀 하고 예배 전에는 두 시간씩만 할게요. MR을 사용해서 하면 되니까요.”

남자의 이야기가 폭포수같이 쏟아져서 봉숙은 정신을 잘 붙잡고 들어야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 예배 전에 찬양을 하고 가신다는 건가요? 예배에 참석을 하신다는 건가요?”

     

“당연히 예배 참석 하죠. 제가 일전에 다니던 교회에다 이런 부탁을 했는데 거절당했거든요. 맘대로 찬양할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서 드럼 소리가 들리기에.”

봉숙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커다란 키에 인상도 훈훈한 남자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물론 그 교회 목사님이 부담이 되셨을 거예요. 시간 나면 언제나 찬양할 수 있게 열쇠를 달라고 했거든요. 제가 좀 무례했죠. 그런데 여긴 늘 열려 있는 것 같아서요. 방해가 안 되신다면 허락해 주시면 좋겠어요.”     

봉숙은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과장 아니, 이지영이 걸렸다. 만일 둘 다 야심한 밤에 와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막을 생각은 없었다.

      

“교회는 늘 열려 있긴 한데, 그래도 제가 있을 때 오시면 좋겠어요. 저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나 8시까지도 있거든요. 오늘 같은 토요일일엔 낮이 좋을 것 같구요.”

남자는 뛸 듯이 좋아했다. 이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었다. 얼마든지 음악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왜 굳이 반지하 교회를 선택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음악연습실에서 찬송가나 가스펠을 불러대는 것보단 교회가 낫다는 생각을 했겠지. 

남자는 드럼에 몰두하고 있는 이지영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드럼이 찬송가나 가스펠도 충분히 하겠는데요.”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불분명하게 남자는 나직이 말했다. 

잠시 후 드럼 소리가 그치더니 이지영이 드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남자나 봉숙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가게요? 지영 씨, 여기 소개할 분이 있는데.”

봉숙이 이지영을 불러 세웠지만 들은 체도 않고 나가버렸다. 그런 이지영을 멀뚱하니 보던 남자는 봉숙에게 물었다.  

    

“본래 이 교회 드러머인가요? 솜씨가 꽤 좋던데요?”  

   

“아직 교인은 아녜요. 이 건물 회사 직원이죠. 드럼 치러 오늘 처음 온 것이구요. 그런데 김현준 대표님은 함께 노래할 사람도 없는 빈 교회엘 오셨는데 괜찮을까요?”

봉숙의 질문에 남자는 활짝 웃었다.  

    

“목사님, 저는 그냥 혼자 해도 좋아요. 그러다 보면 사람들도 오겠죠? 사실 대개의 교회는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런가.”

김현준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길 하면서도 싱글거리며 웃었다. 뭔가 부족하거나 혹은 조금 넘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당신을 좋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 아직은.’

봉숙은 당장이라도 찬양을 하고 싶어 하는 이 남자가 잘 파악되지 않았다. 

과연 남자는 바로 질문을 들이댔다. 

     

“목사님, 제가 지금 좀 해도 되겠어요?”


“예? 아무런 악기도 없는데요?”


“컴퓨터만 있으면 됩니다. 제가 USB는 있어요.”

봉숙은 어쩔까 하다가 그러라고 허락했다. 컴퓨터를 열고 그에게 넘기니 그는 능숙하게 자신의 MR속에서 곡을 꺼냈다. 곧 앰프를 손보고 마이크를 켜더니 바로 찬양에 들어갔다. 봉숙이 있건 없건 그는 마치 노래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인 사람처럼 열창을 했다.  

    

‘좋은 소리도 아니고 가사 전달도 잘 안되는군.’ 

팔짱을 끼고 찬양을 듣는 봉숙에게 그는 함께 해도 된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봉숙은 소스라치게 팔을 흔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는 흔들의자로 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것 같았다.  

    

‘내일이 주일이잖아. 저 남자가 온다는 거야?’

일요일에 남자가 오든지 않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너무나 여러 사람이 공수표를 날린 터라 이 남자 또한 안 온다고 해서 좌절할 봉숙은 아니었다. 

목이 쉴 정도로 노래를 부른 남자는 곧 앰프를 잠그고 잠잠해졌다.  

    

‘저 남자도 제정신은 아니군.’

봉숙이 신경을 끈 채 자신의 흔들의자에 있는데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11시죠? 드러머도 오면 좋겠네요.”

남자의 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봉숙은 빙긋이 웃었다. 심란하고 싱숭거렸던 마음이 가라앉았던 것이다.  

    

‘저 남자 찬양을 들어서 그런가? 소리는 못났어도 그 열심은 칭찬해.’

다시 산책로를 바라보고 앉아 책을 펴드는데 한 재상 영감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다.   

   

‘어찌 된 일일까...... 그런데 내가 왜 걱정을 하고 있지?’

그래도 그가 와 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중년의 박집사와 김현준, 그리고 올지 모르지만 경희와 한재상이 한 테이블을 만들어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반대로 풍비박산의 싸움터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로 이지영의 드럼 비트와 김현준의 칼칼한 찬양 소리가 스며들었다.      

‘다이내믹 토요일’이라고 칠판에 적고 싶단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크게 켰다.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봉숙은 머리에 헤어 롤을 말았다. 곱슬머리라서 조금의 습기에도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머리카락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다른 때보다 신경이 쓰이기는 옷매무새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몇 년 만에 처음 하는 외출 같았다. 

날씨가 완연하게 더워지기 시작해서 비교적 얇은 하늘색 남방에다 짙은 회색 재킷을 입었다. 같은 색깔의 바지까지 맞춰 입자 갑자기 남편이 생각났다. 이 차림은 남편이 생전에 즐겨 입던 조합이었다. 거기에 은회색의 넥타이만 곁들였을 뿐. 거실의 가족사진에서도 남편은 그렇게 입고 있었다. 봉숙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흰색 바이어스가 목과 소매 주변을 두른 갈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반지하를 향해 출발했다. 아침 8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데 순댓국집 사장이 반지하를 흘끔 대고 있었다. 뭔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들어가 보시지 그래요.”

봉숙은 마음에도 없는 초청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했지만 그렇게 말했다. 

     

“아니 새벽부터 누가 고래고래 노래를 하길래. 교인이에요?”

순댓국집은 관심과 귀찮음을 동반한 표정으로 물었다. 봉숙이 귀를 기울이니 소리가 나긴 했으나 순댓국집의 표현처럼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예. 뭐 그렇게 시끄럽게 들리지도 않네요. 제가 방음은 확실하게 했거든요. 문을 닫으면 완전 괜찮을 겁니다.”

순댓국집을 뒤에 두고 안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쾅 닫았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준이 열심히 노래를 하고 있었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 있는 김현준은 보기에는 좋은 비주얼이었다. 듣기에는 다소 인내력이 필요했지만. 그가 하는 찬양은 봉숙이 대개 다 아는 것이었으나 때때로 알 수 없는 외국어가 튀어나오곤 했다. 

     

“아, 목사님, 오셨어요? 정말 일찍 오시네요. 제가 10시까지만 할게요.”

봉숙이 끄덕이며 흔들의자 쪽으로 직진하자 그는 줄였던 볼륨을 다시 조금 높여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다. 봉숙은 그의 실력이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내려 김현준에게 가지고 갔으나 그는 받기만 했을 뿐 마시지도 않고 열심히 찬양만 불렀다.  

    

‘성대가 얼마 못 가 아작 나겠네.’

봉숙의 생각이 들린 것처럼 김현준의 노래가 잠깐 멈췄다. 그러곤 다시 10시까지 그의 라이브는 이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예배 전 행사는 계속되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봉숙과 순댓국집 외엔 없었다. 

예배에는 지난주에 왔던 여인과 한재상을 견지하려는 경희가 참석했다. 한재상이 여전히 안 보이자 경희는 다소 김 빠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인물인 김현준이 있어서 모두 넷이었다. 


“처음이신데 잠깐 대화를 하죠.”

김현준은 쾌활한 소리로 제일 먼저 자기를 알렸다. 자기는 다른 교회엘 다녔는데 이곳이 문이 열려 있어서 그냥 끌리듯 왔단 얘기였다. 아내와 중학생 딸은 호주에서 유학 중이라 기러기 아빠라고 했다. 카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아이 유학비와 밥 먹을 정도는 된다고 했다. 

     

“와, 요즘 사업으로 밥 먹기 힘든 땐데,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네.”

경희가 봉숙에게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소리가 여인에게도 당연히 김현준에게도 들렸다. 

그러나 김현준은 눈을 찡긋하며 우스운 표정으로 좌중을 웃겼다. 

경희는 봉숙의 친구이며, 여인은 근처에 사는 박 집사라고 인사를 끝냈다. 

     

“그런데 풀잎교회 뜻을 여쭤 봐도 될까요?”

김현준의 질문에 경희가 끼어들었다.


“말 그대로예요. 풀잎 같은 인생들이 모인 교회라는 뜻이죠. 뭐.”


“예, 그렇게 짐작은 했지만 왜 인생이 풀잎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김현준의 질문은 봉숙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럼 현준 씨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경희는 지지 않고 김현준에게 재차 물었다. 마치 봉숙의 답변을 막아 버리려는 듯이.


“물론 저도 인생이 풀잎 같은 연약한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죠. 그렇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최고의 창조물 아닌가요? 아름답기도 하고. 그래서 뭐, 창조 교회나 소나무 교회, 아름다운 교회 같은 이름도 괜찮지 않은가, 제 생각입니다.”

말끝에 김현준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누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봉숙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빵이 좀 있는데 제가 가져올게요.”

봉숙이 일어나 사무실 쪽으로 가려는데 김현준이 나섰다. 

     

“점심땐 데 빵보다는 함께 식사들 하고 가시죠. 여기 순댓국집이 맛 집이라던데요.”

김현준은 마치 반지하의 주인처럼 사람들을 식당으로 초대했다.

 

“모든 밥값은 언제나 제가 냅니다. 몇 분 안 되니까 다행입니다만.”

그러나 경희와 박집사는 사양했다. 봉숙도 김현준과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자기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김현준과 반지하를 벗어나 순댓국집에 들어서던 봉숙은 숨이 멎는 듯했다. 순댓국집의 아내, 인도네시아인 여자가 주방에서 머릿수건을 쓴 채 봉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작은 체구에 얼굴도 작은 데다 눈망울은 커서 마치 어린 소녀 같았다. 그 옆에는 키 큰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도마질을 하고 있었다. 봉숙은 무언가에 끌리듯 그녀 쪽으로 향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인도네시아 여자는 고개만 까딱이고는 키 큰 여자 옆으로 옮겨 몸을 숨겼다.


‘한재상 말이 맞는 건가? 도망쳤다 잡혀오곤 한다던. 그러기엔 너무 편안한데?’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는 봉숙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김현준은 곧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장님. 듣기론 맛 집이라던데 수육 한 접시하고 순댓국 주시죠?”     

사장은 기분 좋은 듯 궁둥이를 흔들며 주방에 주문을 넣었다. 


“목사님은 한 번 오셨었는데, 사장님은 처음이시죠? 잘해 드리겠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사장의 표정에 봉숙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깍두기와 김치 항아리를 가져다가 상차림을 해 주며 사장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목사님, 집사람이 임신을 했지 뭡니까? 제가 잘 돌봐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도 많이 좋아졌어요.”

순댓국집 아내가 건강해졌는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얼마 전 도망갔다고 했던 여자가 아닌가? 그렇다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봉숙은 음식이 나오기 전에 마음먹고 주방으로 향해 갔다. 

사장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만 따를 뿐 별다른 얘긴 없었다.  

   

“저기, 그동안 안 보여서 아프신가 했어요.”

인도네시아 여인에게 들리도록 크게 얘기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언제라도 우리 교회에 놀러 오세요.”

사장과 그 아내에게 하는 이야기였으니 둘 다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돼지의 특이한 냄새와 더불어 김이 펄펄 나는 국밥이 차려졌고 두 사람은 식사를 했다. 

이전에 한재상과 먹을 때는 도저히 넘어가지 않던 국밥이 제법 맛있었다. 

     

“목사님 순대국밥 좋아하시는구나. 그럼 매주 먹어요. 이 집 음식이 괜찮네요.”

봉숙은 단순한 이 남자의 생각을 뒤집고 싶지도 않았고, 사실 잘 먹기도 했기에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식사를 끝낸 김현준은 다시 반지하로 복귀했고 봉숙은 산책로 벤치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에 노랫소리가 들려왔으나 문을 닫았는지 아련했다. 

흐드러진 우윳빛 철쭉에 갇힌 봉숙의 앞으로 익숙한 흑갈색 고양이가 지나가다 멈췄다. 고양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곧 반지하 창문 옆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야행성 동물인 고양이가 무슨 사연으로 이 대낮에 나와 돌아다니는지 봉숙은 잠깐 생각했다. 강한 햇빛 때문에 눈조리개도 한없이 졸아든 그런 눈으로. 

     

‘목사가 교회에 있어야지.’

한재상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봉숙이 옷을 털고 일어나도 고양이는 꼼짝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목사가 있는 곳이 교회지 뭐.’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따라 봉숙은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그 사이 순댓국집은 사람들로 붐볐고 주방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홀에 서너 명의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인도네시아 여인을 발견하곤 숨을 멈췄다. 보기에도 그들은 같은 나라 사람들 같았고 여인은 가끔 웃으며 뭔가 얘길 했다. 웃을 때 드러나는 이가 참 희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고 여인은 재빠르게 음료수를 가지고 왔다. 제대로 드러난 몸이 작고 가늘어서 임신을 어떻게 감당해 낼까 봉숙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사장은 즐거운 얼굴로 그 분주함을 즐기는 듯했지만 때때로 자기 아내를 주시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모르겠다. 주님, 여기서 제가 할 일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잘 사는 것 같기도 해요.’

터벅거리며 반지하를 향해 오는데 맑았던 하늘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며 소나기가 뿌렸다. 

    

“목사님, 비 와요. 빨리 들어오세요.”

반지하의 문이 벌컥 열리며 김현준이 소리쳤다. 불과 몇 발자국인데 비 좀 맞으면 어떠랴 하는 봉숙의 생각과는 상관없었다.    

 

‘내가 비 맞을까 봐 염려하는 사람이 있네요.’

봉숙이 반지하로 들어가는 데 동시에 뛰어내려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이지영이었다. 그러나 곧 멈칫하고는 다시 튀어 나갔다. 우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드럼 치러 왔나 본데 현준 씨가 있어서 그냥 가는 것 같네요.”

김 현준은 상당히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1시간은 더 노래를 부르고 갔다. 그가 떠날 때쯤 비도 그치고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봉숙은 혼자 남아 반지하의 흔들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철쭉에 남아 있는 빗방울이 햇빛을 받아 더없이 영롱하게 빛났다.  

    

‘어르신, 순댓국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마치 한 재상이 옆에 있는 듯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르신 말이 맞는 걸까요? 여자가 도망치면 잡아다 놓는다던. 그런데 오늘의 표정은 아니던데요? 친구들일까요? 그 사람들은?’


‘김현준은 정상 범위일까요?’


‘이 과장, 아니 이지영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생각이 생각을 잡아끌어 복잡해지다가 갑자기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 거야.   

        



“오늘 시간 되시면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커피 한 잔 하시면서요.”

박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이 반지하에 방문한 날은 화요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뒷좌석에 자리를 잡은 여인은 1시간여를 입술만 움직여 기도를 했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기도가 끝나길 기다려 봉숙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중심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봉숙은 내려놓은 커피를 흰색 도기 잔에 가득 채워 조심스럽게 여인에게 권했다. 

    

“빵이 좀 있는데 같이 드시겠어요?”

수진이 놓고 간 빵 중에 소금빵과 통밀빵이 하나씩 있었다. 주일날 함께 먹으라고 했으나 그러질 못했으니 오늘이라도 먹여야 수진에게 미안하지 않을 터였다. 함께 준 사과잼도 곁들였다. 

     

“제가 며칠 전에 무슬림 여자한테서 돈을 받았거든요. 헌금이라고 502달러를 주고 갔는데 그게 참 묘하게 신경 쓰이더라고요. 이 건물 회사 바이어래요.”

여인은 말없이 봉숙을 찬찬히 바라봤다. 그 표정이 애잔해 마치 동생을 보는 언니 같았다.  

    

“아니, 뭐 꼭 무슬림이라서 그런 건 아니구요. 하여간 그랬어요. 별 일은 아니죠.”

별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여인에게 달러 얘길 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러나 대화가  없는 상황에서 피차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인은 무슬림 달러에 대해서는 빙긋 웃었을 뿐 별 반응 없이 커피를 차근차근 마시고 빵도 조금씩 떼어먹었다.  

    

“이 빵, 좋은 효모를 썼네요. 밀도 그렇고.”

달러가 아닌 빵 얘기였으나 여인이 말을 시작했다는 게 좋았다. 빵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것 같아서 수진이와 뭔가 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수진이라는 친구가 빵을 만드는데 가끔 가져오거든요. 한동안 뜸하다가 얼마 전에 들렀는데 제가 못 만났지요.”    

 

“그분이 빵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 같아요. 저도 파티셰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여긴 거의 비어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쁜데 안타깝네요.”

핀 조명을 켜둔 드럼과 기타의 자리는 제법 그럴싸했다. 파벽돌로 붙인 뒷면의 서가와 벤치에도 부분 조명을 켜 두어서 그 모든 느낌은 작지만 모던한 카페의 분위기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하는 여인의 말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뭐, 아직은 그렇죠. 또 끝까지 그럴 수도 있구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박집사님이라고 하셨죠? ”     

여인은 자신을 박 집사라는 것 외에는 알리지 않았다. 성이 박 씨이며 교회 직분이 집사라는 것, 그리고 파티셰 출신이라는 것을 오늘 알긴 했으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하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랬다.  

    

“목사님, 혹시 목사님 마음에 무슬림이 걸리신 거 아닐까요? 이교도가 헌금한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될 수 있잖아요.”

달러 얘길 허투루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차 질문으로 보여준 여인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물론, 헌금으로 받은 건 아니에요. 그냥 기부금 정도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아무에게서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여기가 가난해 보이나 싶어서요. 그게 싫었던 거죠.”

여인은 남은 커피를 아껴가며 마셨다.  

    

“더 리필해 드릴게요. 얼마든지요.”

봉숙이 커피 주전자를 가지러 일어서는데 경희가 불쑥 들어섰다. 한 손엔 예의 브런치 봉투를 들고 다른 손에는 고급스러운 파우치를 든 여전히 맵시 있는 차림새였다.  

    

“아, 안녕하세요?”

여인을 발견한 경희가 먼저 인사를 하고 둘은 서로 마주 앉았다. 

    

“참 다행이에요. 집사님 같은 분이 계셔서요. 혹시 그 영감님이 또 와 있나 해서 긴장하며 왔거든요.”

경희가 말한 영감님이 한 재상임을 알 까닭이 없는 여인은 잠깐 의아한 눈빛이었지만 곧 경희에게 집중했다. 세 사람이 원탁에 둘러앉아 커피와 빵을 먹는 모습은 브런치를 즐기는 중년 여자들의 평범한 그림이었다. 

경희는 한 재상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설명을 했고 여인은 웃어가며 조용히 들었다. 봉숙은 가끔 끼어들어 경희의 잘못된 설명을 고쳐주곤 했는데 경희는 무시했다. 


“요샌 안 오나 봐? 돌아가셨나?”

경희가 까르륵 대며 농담 삼아 하는 말이었지만 봉숙은 공연히 맘에 걸렸다. 한재상을 본 지 벌써 한 달은 지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502달러? 그걸 받았다고? 뭐야? 봉목사. 난 그건 아니라고 봐.”

달러 사건을 들은 경희는 차분했지만 불만이 가득한 소리였다. 여인은 말없이 경희에게 동의하는 듯한 우호적인 시선이었다. 

     

“그러니까 궁상떨지 말고 여길 떠나자고. 그럼 한재상 영감인지 뭔지도 해결되고 이런 이상한 일도 안 생길 거 아냐? 그 무슬림이 올 때마다 달러 꽂아주면 그때그때 받는다고? 안 그런다고 누가 장담해. 여기 곧 모스크 생기겠네.”

경희의 말에 여인은 웃었고 봉숙의 표정은 굳었다. 

    

“경희야, 그런 얘기는 아니지. 모스크는 무슨. 난 그 사람이 이교도라서가 아니라 내가 도움을 요구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어. 그래서 돌려주려고 했던 것이고.”  

   

“결국 못 돌려줬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너도 돈 좀 벌어서 작고 힘든 이런 지하 교회에 달러 꽂아주면 얼마나 좋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인이 가만히 끼어들었다.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제가 여기 살아보니까 이 지역이 정처 없는 사람들의 정류장 같은 곳이더라구요. 망해서 왔다가 돈 벌면 떠나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시작하신 거 아닌가요, 목사님?”

여인의 제법 긴 얘기에 경희와 봉숙은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봉숙이 기대를 가진 눈빛이었다면 경희는 한심한 시선이었다. 

     

“물론 집사님 얘긴 옳아요. 하지만 목사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 봉목사는 너무 힘든 사람이거든요. 아마 밥을 제대로 먹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되었을 거예요. 저는 친구인 봉목사가 안타까워서 하는 얘기예요. 계속 괜찮을는지.”

여인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큰 눈을 껌벅거렸다. 덩치 좋은 봉숙이 밥을 잘 못 먹었다는 말이 다소 충격적인 것 같았다. 듣던 봉숙은 경희를 제압하고자 결심하고 벌떡 일어섰다. 

     

“경희야, 그만해. 집사님 말씀이 맞아요. 정처 없는 영혼을 위해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꼭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돼요. 오랜 걸음으로 지쳤을 때 쉴 수 있는 벌판의 나무 등걸이나,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처마가 되면 족하다 생각했어요. 누가 벌판에서 살 것이며 처마에서 생활하겠어요? 쉼이 끝나거나 비가 그치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곳이죠. 어려움을 각오했고 해피엔딩이 아닐 것도 예상하고 있어요. 다만 제 친구는 저를 너무 생각한 나머지 계속 새로운 제의를 한답니다. 이해해 주세요.”

경희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고 여인은 조금씩 뜯어먹던 소금빵에서 손을 뗐다. 경희가 가져온 브런치 메뉴까지 펼쳐진 식탁은 풍성했지만 누구도 열심히 먹지 못했다.  

    

“여기 oooo 벤츠 , 차 좀 빼주세요”

밖에서 처음 듣는 남자 소리가 났다. 백 부장도 순댓국집도 아니었다.

경희가 호다닥 일어나 나갔다. 잠시 후에 들어온 경희는 뼈해장국집 주차장이 비어서 주차했는데 그새 손님이 온 모양이라고 했다. 

 

‘빼 해장국 사장 목소리였구나.’

봉숙은 낮고 퉁퉁한 목소리를 기억해 두었다.  

    

“저는 무슬림의 헌금이든 기부금이든 좋은 곳에 쓰시면 좋다고 생각해요. 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잖아요?”

경희가 수선스레 드나드는 것과 상관없이 여인은 달러 얘기를 계속했다. 

     

“물론 돈을 버는 방법이나 목적도 중요하지만요.”

여인의 말을 놓치지 않고 경희가 꼬리를 잡았다.  

    

“제 말씀이 그거잖아요. 그 무슬림이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었는지는 모를 일이죠. 물론 바이어라니까 무역을 해서 버는 돈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 의도 또한 무시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물량으로 공세를 한다면요?”     

생기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경희의 말에 모두들 입을 닫았다.  

여인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한 것 같고, 봉숙은 대화의 끝이 안 날 것 같아서였다. 

다행인지 여인은 간다고 일어섰고 봉숙은 그녀를 배웅하며 부탁했다. 

    

“이곳에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저 친구는 나름 저를 위하는 선한 생각으로 한 얘기니까 괘념치 마시고, 주일에 봬요.”

봉숙의 말에 여인은 웃는 얼굴을 한 채 말없이 떠났다. 지난번처럼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없었다. 봉숙은 속이 상했지만 깊은 숨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끝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봉숙아. 저 여자는 다시 올 거야. 네 말대로 저런 사람들이 오는 데야 여기는. 나도 알아. 그런데 그 힘든 사람들을 네가 어떻게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가 걱정이야.”     

경희는 먹던 테이블을 정리하고 봉숙을 도와 바닥 청소까지 마친 후 돌아갔다. 

사무실로 돌아온 봉숙은 생각난 듯 서랍을 열어 꿍쳐 넣은 달러를 나란히 펼쳐 놓았다. 꼬깃꼬깃해진 화폐의 네 귀퉁이에는 100과 2자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돈을 보고 창의적이라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드느라 참 애썼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을까. 저 돈의 인물 때문에. 혹은 색깔이나 디자인 때문에.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돈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달러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별 짓을 다하고 있네.’

그러다가 환율이나 따져보자고 502달러를 환산하니 60만 원 정도로 꼭 한 달 치 월세였다. 

꼬깃꼬깃해졌지만 이 다섯 장의 종이가 월세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래서 돈을 신이라고 한 거야.’

그녀의 마음이 종이에 벤 듯 흔적 없이 쓰렸다.

봉숙은 여섯 장의 지폐를 잘 펴서 봉투에 넣은 다음 테이프로 붙였다. 그리고 돈을 준 라일라의 이름을 봉투 앞면에 네임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봉투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소리 내어 인사했다.  

    

“안녕, 라일라.”

그렇게 라일라를 완전히 떠나보냈다.      

다시 흔들의자로 와서 몸을 부리고 앉았는데 시선이 자연스레 산책로로 향했다. 

‘한재상이라면 이 돈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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