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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7. 장마

김현준이 오고부터 봉숙은 토요일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는 토요일이면 아침부터 와서 거의 종일 머무르며 기타를 치다가 노래를 하다가 색소폰을 불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오전부터 폭우가 예보된 상태여서 봉숙은 토요일이지만 일찍 출근했다. 

아직 김현준은 오지 않아서 혼자 커피를 내려 들고 흔들의자로 갔다. 11시가 되도록 하늘은 꾸물거리기만 할 뿐 비는 없었다.      

봉숙이 흔들의자에서 커피를 다 마시고 사무실로 들어가 설교 원고를 다듬고 있을 때  김현준과 박 집사의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봉숙이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의 노랫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사이사이 김현준이 기타를 치기도 하고 박 집사는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 소리를 들으며 봉숙은 의아했다.  


‘박 집사가 토요일에 교회엘 온다고?’

김현준이야 매주 토요일에 오는 것을 알았지만 박 집사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토요일에 김현준과 만나 노래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주일날 예배에만 참여하는 것이 다였고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봉숙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이에 노래가 끊어지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가끔 박 집사의 ‘아이 참.’하는 애교 섞인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김현준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모든 상황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봉숙은 마치 숨어서 엿듣는 느낌이어서 불편했다. 언제쯤 자신의 존재를 그들 앞에 드러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얼마 전 경희가 흘리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김현준, 기러기 아빠라 그랬지? 같이 살진 않아도 유부남이란 거네.”

봉숙은 당연한 얘기를 왜 묻느냐며 그냥 쳐다보고 말았다. 경희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곁눈으로 박 집사를 훔쳐보며 봉숙을 찔렀다.      

주일날이었고 예배는 끝났지만 김현준은 여전히 노래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김현준을 박 집사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우러르듯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해. 교회서 스캔들 터지면 답이 없어.”

그때 봉숙은 풋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스캔들의 어원을 소개했던 신약학의 멋쟁이 여자 교수가 떠올랐다.


 “헬라어의 스칸달론에서 유래한 건데 올무, 함정, 그런 뜻이죠. 올무에 걸리면 못 빠져나오는 건 물론이고, 구경거리 되기 십상이잖아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목회현장은 사방이 함정입니다.”

그때도 웃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는 왜 웃었을까?   

  

“말이 되는 얘길 해. 두 사람 나이가 거의 열다섯 차이는 날 걸? 거의 엄마뻘이라고.”

그러자 경희는 봉숙을 잡아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봉목사, 쟤들이 같은 차에서 내렸어. 김현준 차에서 내렸다고. 박 집사는 이 동네에 산다며? 모든 걸 떠나서 은밀한 남녀의 눈빛을 내가 몰라? 일 생기기 전에 미리 떼어 놔.”

봉숙은 경희가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길에서 만나 태워 올 수도 있지.

무엇보다도 저렇게 해맑은 김현준과 현숙한 박 집사가 함정에 빠진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됐다.       

봉숙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는데 특정한 단어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은주 누나는......”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중 얼핏 들린 김현준의 목소리였다.      

봉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은주 누나? 박 집사 이름이 은주였어? 자신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이름 앞에서 봉숙은 낭패감과 염려가 함께 몰려오는 걸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그들을 쫓아가서 사실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너희 사귀니? 그러나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둘 밖에 없는 교인이 남녀상열지사로 엮이면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아니지, 내가 경희의 추측만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저들이 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닐 확률이 높지. 절대 아니지.’     

혼자 결론을 내며 서성대다가 창문을 보는데 익숙한 어떤 모습이 눈에 잡혔다. 봉숙은 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한 노인이 종이박스를 손수레에 실은 채 천천히 끌고 갔다. 한재상보다는 좀 더 젊어 보이는 낯선 노인이었다. 노인의 야윈 몸매를 보니 한재상이 강렬히 생각났다. 

왜 틈틈이 그가 생각날까? 화를 돋우고 사라지곤 했던 그는 살아있긴 한 걸까? 스스로도 수수께끼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짙은 회색이었다. 그러자 비 맞고 들어왔던 한재상이 또 생각났다. 저 노인네 비 맞으실라.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우산을 들고 산책로로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고 노인은 느리게 전 순댓국집 처마 밑으로 걸어갔다. 


“받으세요.”

봉숙이 우산을 내밀자 노인은 처진 눈을 힘들게 열었다. 놀랍게도 노인은 할아버지가 아니고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이 역력했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리시니까 우산 가져가세요.”

노인은 우산 받을 생각은 않고 천천히 봉숙을 살폈다. 


“여기 지하실 목사님이신가?”

놀란 것은 봉숙이었다. 그러면서도 지하가 아니고 반지하라고 고쳐주고 싶은 자신이 가엾기도 했다. 


“저를 어떻게 아세요?”

봉숙의 질문에 할머니는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파지 줍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어디에 무슨 교회가 있는지.”

할머니의 발음은 약간 새긴 했지만 알아듣기에 무리는 없었다. 


“혹시 한재상 할아버지를 아세요? 그분도 박스와 병을 주우셨거든요.”

 별 기대가 없어도 묻고 싶었다. 


“아니, 이름은 모르지요, 여기 파지 줍는 영감들이 몇 있어요. 그런데 요즘엔 파지 값이 너무 싸서 다 그만둔 모양이요. 어디서 죽었던지. 죽어도 모르긴 하지.”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잠깐 사이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있었다. 방정스럽게 내리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멎었다. 

결국 우산을 도로 가지고 반지하로 들어온 봉숙은 다시 흔들의자에 앉았다. 설교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김현준과 박 집사보다는 한재상이 봉숙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정말 어디에서 죽어 버렸나? 모르겠다.’

벌떡 일어나 사무실로 가려는데 김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사님, 식사하세요. 비 오는 날은 치킨이죠.”

김현준이 근처의 파O이스 포장을 테이블에 펼쳐 놓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박 집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 있는 줄 알았어요? 박집사님은요? 아까 소리가 들리던데?”

김현준은 의자를 꺼내 봉숙을 앉히고는 여전히 밝은 소리로 말했다.


“아침에 커피 내리셨던데요 뭐. 그래서 오늘은 오셨구나 하고 치킨 사러 간 거예요. 집사님은 가셨어요. 모셔다 드리고 온 거예요.”


“박 집사 집엘요? 왜요? 아, 비가 와서.”

왜냐고 물어놓고 김현준의 말을 듣기 전에 비 얘길 한 것은 그렇게 얘기해 주길 바라서였다. 그게 김현준도 편할 것이고 또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아뇨, 휠체어 대여하신다고 해서 가져다 드렸어요. 필요하시다고.”

전혀 다른 답변에 봉숙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 남자는 카드 회사를 한다더니 의료기도 판매하나? 그리고 박 집사가 휠체어가 왜 필요해?’

그러나 봉숙은 묻지 않았다. 김현준이 알아서 얘기할 것이니까.      

풀어놓은 치킨은 비와 상관없이 바삭했다. 김현준은 콜라 대신 스파클링 워터로 가져왔다며 그녀에게 한 병을 내밀었다. 봉숙은 한 조각 먹고 물만 마셨고 김현준은 말도 없이 나머지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노래를 하느라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집사님 남편이 몸이 불편하신데 별로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우리 누나가 의료기 업체를 한다니까 부탁한 거예요. 지난주에 말씀하셨는데 그게 늦어져서 오늘 갖다 드렸죠. 혹시 목사님도 필요하시면.”

김현준은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흰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라파 의료기 대표 김은주>


봉숙은 가슴에 막혔던 것이 뚫린 듯 시원했다. 고양이가 헝클어놓은 털실 뭉치를 가위로 싹둑 잘라 정리한 기분이었다.

     

‘야! 서 경희! 너야말로 정신 차려! 스캔들은 나발!’

경희가 있다면 소리를 질러서 내쫓고 싶었다. 그러나 한 편 경희의 촉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이들은 아무 사이도 아닌 걸까?  

   

“현준 씨, 필리핀의 가족들은 잘 지내죠?”

짐짓 무심하게 물었다. 


“그렇잖아도 지난 주중에 잠깐 다녀왔는데 딸은 여전히 저를 무시하더라구요. 하하. 와이프는 좀 힘들어 보이기는 했는데 아직 이혼하자 소리는 안 하네요.”

무슨 뜻이냐는 듯 봉숙이 눈으로 묻자 김현준은 손을 씻고 오겠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얼굴이나 표정은 ‘이혼’이란 단어와 상관없이 명랑했다. 좀 모자라나? 

김현준이 늘어놓은 닭 뼈와 휴지를 뒷정리하다가 다시 경희의 소리가 들렸다. 

    

‘미리 떼어 놔.’     

체격이 좋은 김현준은 층계를 오르내리는 소리도 남달랐다. 우당탕탕 거리지만 가벼웠다. 그렇게 내려오다가도 반지하 입구에서는 아주 조신하게 걸어 들어왔다.


 “목사님이 걱정하실 일은 아녜요. 이혼 때문에 그러시죠? 그 사람이나 저나 뭐 혼자 사는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더라구요. 괜히 말씀드렸네요. 목사님 얼굴에 다 나타나요. 걱정하시는 거.”

봉숙은 김현준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사족을 붙일 일도 아니었다.


 “목사님도 혼자 사시잖아요. 가족이란 게 글쎄요. 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 같아요. 참, 저 지난 토요일엔가 할아버지 한 분이 다녀가셨는데 안 오시네요. 오신다고 했는데.”


“누구요?”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묻는데 놀란 것은 김현준이 아니라 봉숙 자신이었다.


 “목사님 안 계시다고 화를 내고 가셨어요. 그래서 주일날 오시라 그랬거든요.”

한재상이 틀림없었다. 그녀에게 화를 내는 유일한 사람. 봉숙은 갑자기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경희를 놀리고 싶어졌다. 

     

‘스캔들은 김현준과 박 집사가 아니라 나와 한재상의 확률이 더 높은데.’     

김현준은 저녁때까지 노래하고 기타를 치다가 돌아갔다.

      

반지하에 정적이 흐르고 봉숙이 틀어놓은 합창곡의 화음만 가득 찼다. 남녀 4 성부가 만들어내는 황홀한 어울림에 가슴 한편이 따스해졌다.


‘경희 네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무관심하구나.’

창문 너머로 백 부장이 설치해 놓은 차수막이 적막해 보였다. 

그 좁은 면 위를 얼룩 고양이가 곡예하듯 지나갔다.      

  



장마는 지루하게 이어졌고 7월에 들어서도 그칠 기미가 없었다. 반지하에 들어서면 습기와 더불어 어쩔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나곤 했다. 김현준은 교회를 지상으로 옮기자며 자신이 책임지겠단 얘길 했지만 봉숙은 말렸다.


“현준 씨 노랫소리를 감당할 건물이 없을 텐데요?”

방음을 기가 막히게 하면 된다느니 엘리베이터 있는 꼭대기 층도 괜찮지 않냐고 김현준은 졸랐다. 그러나 봉숙은 반지하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아직 이 공간이 우리 네 명을 커버하는 데 무리는 없지 않나요? 꿉꿉한 건 사실이지만 이 장마가 지나면 건조한 가을이 올 텐데. 좀 견디죠.”

봉숙이 이야기할 때 경희는 김현준과 박 집사를 스캔하듯 훑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여기 더 있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아요? 봉목사님. 이 두 사람 빼고는 아무도 오지 않잖아요? 하긴 뭐 우리도 언제 튀어 나갈지 모르지만. 현준 씨, 지상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교회를 통합하는 게 어때요? 저기 위에 있는 교회는 덩치도 크고 시스템도 엑설런트 하던데, 그리 옮겨가심이 어떠신지.” 

툭 튀어나온 경희의 말에 좌중은 무더위가 무색하게 얼어붙었다.


“그게 무슨......”

해맑은 김현준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박 집사의 잘 관리되던 표정도 살짝 무너졌다.  


“그냥 이 친구가 해보는 소리예요. 아무래도 장마철이라 끈적이니까 좀 힘들죠. 두 분은 좀 더 계시겠어요? 저는 먼저 실례할게요.”

봉숙은 경희를 잡아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경희의 높은 굽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김현준과 박 집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경희야, 그건 예의가 아니지. 저 사람들이 왜 여길 있겠어? 이런 곳이 필요하단 얘기지. 적어도 두 사람 때문에도 난 못 그만둬.”

봉숙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튕겨내며 경희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드디어 밖에서는 김현준의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봉숙아,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 생각이 바뀐 거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봉숙은 차분하게 얘기하자며 박하차를 준비해 왔다. 백 부장이 마셨던 그 박하차가 이 친구의 마음을 잠재웠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네 마음을 알아. 그런데 아직은 이곳이야.”

봉숙은 박하차를 경희의 컵에 반쯤 따랐다. 경희가 박하차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몰랐다.


“뭐가 아직이야? 하여튼 내가 볼 땐 빨리 접어야 돼. 밥을 제대로 먹나 잠을 제대로 자나 얼마나 견디려고 그래? 그렇다고 목회에 올인하는 것도 아니잖아?”

경희의 작은 소리에 힘이 실리니 날카롭게 들렸다. 봉숙은 희미하게 웃었다.


“들켰네. 내 친구한테. 그래, 네 말대로 대강 하다가 굶어 죽으려고 하는데 자꾸 먹이시네. 잠도 가끔은 잘 자고.”


“야! 너 무슨 말이 그래?”

경희가 소리를 질렀지만 김현준의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다. 


“쟤는 도대체 뭐니? 아휴, 복장 터져. 기운도 좋다.”

경희는 쌩하고 가버렸다. 김현준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경희의 응답은 없었다. 김현준의 기타 소리만 다시 들려왔다.

경희가 손도 대지 않은 박하차를 봉숙은 천천히 마셨다. 김현준의 노래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멈추지 않아 봉숙은 산책로로 나섰다. 비 냄새를 가진 공기가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웬일인지 산책로엔 사람이 뜸했다. 보통 일요일엔 아이들과 강아지들로 제법 붐비던 길이었다. 봉숙이 천천히 산책로를 돌아 다시 반지하로 들어왔을 때는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몰려오고 있었다. 바람까지 세서 마치 태풍이 오는 것 같았다. 김현준은 그 사이에 가고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쫄쫄 굶었다는 생각에 김현준과 박 집사도 같이 굶었나 싶었다. 돌발적인 경희의 발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치킨을 사다 먹었거나 뼈다귀해장국집에 갔을 것인데 미안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비도 올 것 같아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고 밖을 보니 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물동이로 퍼붓는 게 이런 건가 싶게 순식간에 땅에는 골이 생기고 물이 모여 흐르기 시작했다. 현관 쪽은 시멘트로 발라지고 커다란 하수관이 묻혀 있어서 괜찮았지만 산책로 쪽은 달랐다. 흙이 모여 내리고 검불과 쓰레기가 몰려들었다. 봉숙은 백 부장이 설치한 차수막을 살폈다. 현재까지는 견고했으나 비가 더 거세지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산책로 잔디는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 속에서 봉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혹시 모를 침수에 대비해서 중요 물품은 옮겨야 했지만 저 악기와 앰프와 테이블들을 혼자서 어찌할 것인가. 


‘아직은 아니잖아. 침착하자. 비가 그칠 수도 있어.’

봉숙이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자 안전 문자가 몇 개씩 올라와 있었다. 이미 어제부터 홍수 경보가 내려져 있었고 저지대의 주민들은 대피명령이 내려졌다. 

비는 잠시 멈췄다가 숨을 고르곤 다시 퍼부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봉숙은 두려움을 느꼈다. 무서운 기세로 모여 흐르는 황톳물은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일단 전기를 차단하고 가스 밸브를 잠갔다. 사방이 온통 암흑이었다. 어둠 속에서 봉숙은 눈을 감았다. 지나갈 거야. 다 지나갈 거야.


“목사님!”

어둠 속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비에 젖은 수진이가 뛰어들었다. 


“어떡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목사님 여기 계신 것 같아서.”

비에 젖은 수진이는 새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봉숙에게 달려들었다. 봉숙은 다시 전원을 올렸다. 환해진 사방에 아직 비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아니, 이렇게 위험할 때 여길 오면 어떡해요. 아유, 밖에 걷기도 힘들 텐데.”

봉숙이 무릎 담요를 찾아 수진을 감쌌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백 부장이 이 과장과 함께 들이닥쳤다. 저 인간이 아직 죽진 않았군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차수막도 해 놓으셨는데 별 일이야 있겠어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긴 하네요.”

봉숙은 짐짓 태연하게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저 아래쪽 동네는 벌써 침수가 시작됐어요. 제가 사는 빌라도 지하는 물이 찬다고 다들 짐 

꺼내느라 정신이 없던데요. 저 앰프부터 옮길까요?"

백 부장은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있는 이 과장을 수진에게로 이끌어 놓고는 일할 태세로 돌입했다. 


“목사님, 아유! 제가 집엘 안 갔어야 했는데. 앰프 저랑 옮겨요. 분해하면 옮길 만할 거예요.”

잠시 후 뛰어 들어온 김현준은 비옷까지 입고 장화 차림이었다. 

남자 둘은 앰프를 분리해서 위층으로 가져가고 여자들은 기타와 신디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 과장은 끙끙대며 드럼을 들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남자들이 와서 하나씩 옮겨가니 이 과장의 표정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테이블과 의자도 하나씩 들어 나를 때 박 집사가 조용히 들어섰다. 처음 보는 트레이닝 복장에 장화까지 신고 온 박집사는 훨씬 날씬해 보여서 봉숙은 자칫 못 알아볼 뻔했다. 그녀까지 합세하자 일은 좀 더 수월해졌고 대부분의 옮김이 끝났을 땐 차수막 근처에서 물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모두들 물의 수위만 바라보며 마음을 조리고 있을 때였다.

  

“저 의자 가져가야지. 목사가 맨날 조는 덴데.”

밤 10시나 되었을 때 한재상이 나타났다. 그는 곧 죽을 사람처럼 더욱더 비쩍 여위어 있었다. 어떻게 걷나 싶을 정도로 힘이 없어 보였지만 지팡이를 짚은 자세는 여전히 곧았다.


“어르신, 이 밤에 어떻게 여길.”

봉숙은 갑자기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한재상을 보아서인지 아니면 곧 물이 차버릴 반지하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저거 옮기라니까. 목사는 저거 없으면 잠도 못 자.”

한재상이 지팡이로 흔들의자를 가리키자 사람들이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갔다. 

흔들의자까지 위층으로 옮기자 반지하는 거의 비었다.


“물이 들어오진 않을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계속 퍼부으면 답이 없죠. 어떻게, 여기들 계실 건가요? 제가 있을 테니 들어들 가시죠.”

백 부장이 떨리는 손으로 산책로 유리창 턱을 짚으며 말했다. 


“그냥 있을래요. 물이 들어오면 저 책도 옮겨야 되잖아요?”

수진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뒤쪽의 서가를 가리켰다. 그러나 사람들의 침묵 속에 그녀의 의견은 묻혔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묻혀 온 물로 얼룩이 생겼다.


“물이 차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요. 우리 모두 밖으로 나가죠.”

정신을 차린 봉숙이 소리쳤다.


“제가 2층 열어 놓을 테니까 일단 거기서 몸 좀 말려요. 다들 젖으셨는데.”

백 부장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황토색 물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적어도 종아리 중간의 수위를 유지한 채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


“이 나라 하수 시설은 도대체 언제나 달라지는 거야.”

모두 다 2층으로 올라가 있는데 경희의 무신경하나 뾰족한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온 거야?”

봉숙이 넋 나간 표정으로 묻자 경희가 여전히 좋은 냄새를 풍기며 웃었다.


“헬기로 왔지.”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참 말도 재수 없게 한다는 얼굴이었다.


“제 농담이 지나쳤나요? 죄송해요. 너무 긴장들 하고 계셔서. 아직 차는 다닐 만해요. 지하차도만 피하면.”

경희를 보자 봉숙은 갑자기 다리에 맥이 풀리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가 치킨 좀 사 오겠습니다. 아니, 가서 먹죠. 아까 보니까 불은 켜져 있던데.”

김현준이 밝게 소리쳤다.


“현준 아저씨, 지금 시간이 몇 신데요. 그리고 이 비에 무슨 장사를 하겠어요?”

경희가 한심하다는 듯 느릿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김현준과 경희를 교대로 바라봤으나 둘 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고 박 집사만 시선을 창문에 두고 있었다. 


“이젠 침수가 되던 비가 그치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돌아가시죠. 너무들 고생하셔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봉숙이 나서서 귀가를 권유했지만 자정이 될 무렵까지 그들은 그렇게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또 오면 어떡해요? 목사님 혼자서.”

수진이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이 정도까지 내린 비에 침수되지 않았으니 괜찮을 겁니다. 저도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여기가 그래도 1층 같은 반지하고, 그나마 이 동네 하수시설은 쓸 만해요.”

백 부장이 지쳐서 흙빛이 된 얼굴로 경희를 스윽 쳐다보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봉숙은 그를 보며 측은한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제가 댁까지 모시겠습니다. 다들 내려가셔서 제 차에 타시죠.”

김현준이 단체관광객 가이드처럼 사람들을 모아 데리고 나갔다. 수진이와 박 집사 그리고 한재상까지 모두 김 현준의 밴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봉숙은 한재상이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백 부장이 오래된 지프에 이 과장을 싣고 떠나자 봉숙은 경희와 함께 반지하로 내려갔다. 텅 빈 반지하는 물난리와는 상관없이 생뚱맞게 평안했다. 한참을 서 있던 봉숙은 여기저기 젖어 있는 바닥에 주저앉더니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었다. 

     

“하......!”     

봉숙의 알 수 없는 신음이 반지하를 가득 채웠다. 

경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팔짱을 낀 채 봉숙을 망연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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