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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8. 길을 잃다

기나긴 장마는 끝이 났고 침수를 걱정해 모였던 사람들도 끝이 났다. 비가 쏟아지던 날 교회에 왔던 사람들이라면 주일 예배에는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봉숙이었다. 그러나 백 부장이 한 번 와서 졸다가 가버린 게 다였다. 교회와 자신을 걱정했음이 분명한 그들이 왜 오지 않는지 봉숙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쉬운 일이 아니겠지. 나도 오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봉숙은 이유를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진은 교대 근무라서 쉬지 않는 때가 많을 것이고, 백 부장은 술이 덜 깨면 못 오고, 이 과장은 사람들 만나기를 꺼리니...... 그런데 한재상은 뭐지? 어디에 사는 걸까?’

폭우가 내리던 날 한재상을 싣고 간 김현준에게 물으니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줬다는 얘기가 끝이었다. 


‘왜 그 노인네가 마음에 걸리지? 맨날 구박만 하는 영감탱이가.’


그러다 지난 봄날 한재상이 다 시들어빠진 개나리꽃 한 다발을 가져왔던 기억이 났다. 봉숙은 그 꽃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편없는 꽃다발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꽃을 백자 항아리에 꽂지 않았던가.  


‘꽃은 마음이라던데 그 영감이 형편없고 볼품없는 마음을 가져온 것이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의자를 흔들던 봉숙을 백 부장의 소리가 깨웠다.


“사모님, 바이어 왔는데 한 번 보실래요? 그 여자가 만나고 싶어 하던데?”

봉숙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 부장을 바라봤다. 


“502달러요? 오늘은 빵도 없는데, 왜요?”

서랍 속에 처박아둔 502달러가 생각났다. 


“사모님도 참, 그건 아니고......”

백 부장은 더욱 시커메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 따위 일로 아직까지 꽁하고 있냐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만나고 싶지 않았으나 언젠가 꿈속에서 분홍색 천을 휘감은 그녀가 생각났다. 


“그러죠 뭐.”

봉숙이 올라갈 채비를 하자 문간에 선 채 백 부장이 손을 저었다.


“아니요, 사모님이 괜찮으시면 그 여자가 내려온대요.” 


“그래요? 그러시던지요.”

시큰둥한 반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백 부장은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에 화한 향기를 풍기며 라일라가 반지하로 들어섰다. 향은 독특하게 강했지만 싫은 냄새는 아니었다. 핑크색 슈트에 코발트빛 히잡을 쓴 그녀는 향수만큼 강렬했다. 

봉숙은 엉겁결에 일어나 그녀를 맞았으나 인사말을 하진 않았다. 가늘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또박이며 걸어오는 그녀의 발목에 달린 고리 장식이 빛을 내며 잘랑거렸다. 봉숙은 보기에도 아찔해서 혹시 바닥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여자는 어느 한구석 어울리는 데가 없었다. 라일라가 산유국의 부유층 여성이라면 봉숙은 몽골의 초원에서 양 몰다 온 여자였다. 알록달록하고 풍성한 셔츠와 시원한 마직 몸뻬 바지가 봉숙을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백 부장은 사모님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목사님이라고 하던데......”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요.”

봉숙의 대답에 라일라는 피식 웃었다. 꽤나 재밌는 여자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봉숙은 그래도 손님인데 싶어 커피나 차를 물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그럼 저는 목사님이라고 할게요. 남편과 문제가 생겨서요. 그럼 ‘중동 컴퍼니’도 문제가 될 것 같거든요?”

봉숙은 뜬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동 컴퍼니’가 뭔지를 한참 생각하다가 이 건물 위층의 회사라는 생각이 났다. 


라일라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남편이 바람이 났는데 이혼은 자기가 당할 처지라고 했다. 그리고 바이어 일은 자기가 하지만 사업자는 남편이기 때문에 ‘중동 컴퍼니’와 무역관계도 바뀌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요?”

봉숙의 떨떠름한 반응에 라일라는 쏘는 듯한 눈길로 봉숙을 바라봤다. 그러나 봉숙은 괘념치 않고 반짝이는 장식들로 현란한 그녀의 손톱에 시선을 놓았다. 이 여자는 반짝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목사님이 신통력이 있다고 해서요”

갑작스러운 얘기에 봉숙은 의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이 여자가 제정신인가 얼른 머릿속으로 검토에 들어갔다. 여자의 남편이 바람난 것과, ‘중동 컴퍼니’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자신의 신통력이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부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찾아가면 답이 있을 거라고요. 자기도 그랬다고.”

라일라는 얼빠진 봉숙을 한참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아마 봉숙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모양이었다. 봉숙은 주문받은 커피를 내리러 가는 직원처럼 구석의 카페 테이블로 갔다. 커피 물을 끓이고 천천히 커피를 갈며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은 라일라를 살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공연히 화가 솟았으나 마음을 다스리며 커피를 내려 두 잔을 들고 테이블로 갔다. 그 사이에 라일라는 히잡을 벗어버렸다. 머리를 덮었던 베일을 치웠을 뿐인데 라일라는 중동이 아닌 강남 한복판의 여자로 보였다. 단발로 자른 그녀의 흑색 머리칼이 조명을 받아 빛났고 생각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에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찰 뻔했다.

 

“남편은 습관적으로 와이프를 바꿔요. 물론 저도 3번째인 것을 알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죠.”

봉숙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세 번째면 첫 번째, 두 번째가 있는 것 아니냐. 그럼 네 번째 다섯 번째도 있단 생각을 왜 못해? 네 말대로라면 이혼에는 이혼이네. 뭐가 문제야?’

그러다가 이혼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혼으로 맞서는 것은 아니지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날 뻔했다. 


“솔직히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80이거든요. 우습죠, 제가? 이 나이에 할아버지와 사니 말이에요.”

라일라의 말을 들으며 우스운 게 아니라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서른을 넘었을까 한 젊은 여자가 처한 상황이라니. 그래서 저절로 혀를 차고 싶었던가. 


“부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목사님한테 얘길 하면 하여간 무슨 일이 일어난대요. 이 옆에 순댓국집도 문 닫았던데 그 집도 그랬다면서요?”

봉숙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백 부장이 드디어 제정신을 잃고 알코올성 치매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입술을 꽉 물었다가 확고하게 선언했다.  


“그건 잘못 전달된 얘깁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백 부장이 뭘 잘 못 알고 하는 얘기죠. 순댓국집이나 백 부장이나 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라일라 씨도 남편과의 문제라면 법적으로 해결하셔야죠.”

라일라는 턱을 괴고 있다가 봉숙의 말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앞에 놓인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부장님이 자기도 목사님이 해결해 줬다고 했어요. 죽고 싶었는데 못 죽었다고요.”

그러자 일전에 백 부장이 반지하에 내려와 오랫동안 앉아 있다 떠난 사건이 생각났다. 다디단 믹스커피 애호가가 맛없는 박하차를 두 주전자나 마시며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 그랬었지. 그래서 뭐?

잠깐의 백 부장 생각으로 사이를 둔 순간 라일라의 혼잣말이 들렸다.

 

“뭐, 죽이고 죽으면 되겠네요.”

라일라의 눈에 분노가 일었고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려 커피가 조금 넘쳤다. 봉숙은 무심하게 있다가 죽는다는 얘기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했다.

“아니,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라일라는 주춤거리며 봉숙을 바라봤다. 그녀가 손에 움켜쥔 코발트색 베일은 한 줌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크였다. 그 베일을 공중에 던지며 라일라는 크게 웃었다. 


“미쳤지. 난 내 얘기를 했어요. 이젠 목사님 차례예요. ”

라일라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서 있는 봉숙을 올려다봤다. 그 검고 깊은 눈을 보는데 봉숙은 서늘함을 느꼈다. 


‘이 여자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 어쩌면 좋아?’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당장 서랍에 있는 502달러를 가지고 와서 라일라에게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라일라 씨, 생명이 생명을 대신하지요.” 

봉숙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분명했으나 자신의 의지로 한 말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스스로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한 거지?

다시 벌떡 일어선 라일라의 시커먼 눈이 등잔불처럼 커지며 반지하가 떠나가게 소리 질렀다. 


“오 마이 갓, 무슨 소리야, 와우!” 

라일라는 두 손을 펼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봉숙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불쾌한 표정으로 낮게 소리치며 문을 나가 버렸다.

 

“라일라라고 부르지 마요. 난 이하영이야!”

위층을 향해 올라가는 그녀의 날카로운 구두 소리는 반지하를 울렸고 봉숙의 머리통을 흔들었다. 


‘뭐래? 저 철딱서니가. 내가 네 이름을 왜 알아야 되는데? 아니, 나를 점쟁이로 알고 온 거야 뭐야? 기가 막히다. 올라가다가 엎어져서 코피나 쏟아라.’

속이 부글거리고 역겨워서 화장실에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려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라일라가 방금 올라간 그 길을 밟고 싶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흔들의자로 걸음을 옮기는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현관으로 나가 위층을 바라봤다. 


“앰뷸런스 불러. 아니다. 내가 싣고 갈게.”

백 부장의 소리가 들리고 라일라가 신발이 벗겨진 채 남자 직원의 등에 업혀 있었다. 현관에 서 있던 봉숙을 향해 백 부장이 알리듯 소리쳤다.


“넘어져서 골절된 것 같아요. 그따위 신발을 신고 뛰긴 왜 뛰어? 하여간.”

순간 봉숙은 자신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글거리며 욕지기가 올라오던 속이 깨끗이 정리되었다. 

다시 반지하로 내려와 라일라가 앉았던 테이블을 보니 그녀의 베일만 향기와 함께 놓여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흔들의자로 향하는 봉숙의 발걸음이 흔들렸다. 의자에 걸터앉아 창문을 바라보는데 라일라의 짙은 화장 속에 감춰진 앳된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녀가 했던 얘기들이 오래전에 들었던 것처럼 아련했다. 어쩌면 봉숙이 경험하지 못한 어떤 세계를 그녀는 살아왔고 그것이 버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호기롭고 여유 있게 502달러를 투척했던 젊은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반지하로 내려왔을 땐 뭔가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자신은 그저 뒤통수를 세게 때려 보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세상과 너는 너무 다르고 네가 가진 생각은 나와 너무 달라서 아무 답을 해 줄 수 없어. 그게 이유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얻은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오보에 곡을 골라 틀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이하영? 누가 이름이 궁금하대?’

봉숙은 기분 나쁜 기억을 털어버리듯 몸을 부르르 떨고는 흔들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은 어지럼증에 다시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어지럼증은 계속되었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땅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혼미해졌다.  

    

‘서로 물드는 거야. 같이 있어야 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소리인 듯 아닌 듯 한 문장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감은 봉숙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라일라의 사건 이후 봉숙은 불면증에 시달렸다. 거의 토끼잠이었고 날밤을 새기도 했다. 출근하면 흔들의자에 앉아 잠깐씩 조는 게 일이었다. 늘 피곤에 시달렸고 입맛도 잃었다. 여전히 수진이는 빵을 만들어왔고 이 과장도 자신들의 점심거리를 공수해 주었지만 거의 입에 대질 못하고 냉동실 행이었다.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 그녀의 불면증을 바로 알아차린 건 경희였다. 경희는 다크 서클이 턱에까지 내려왔다며 당장 휴식을 가져야 한다고 봉숙을 닦달했다. 그리고는 칠판을 가져다가 자기 생각대로 썼다.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문을 닫습니다. 

  회복되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풀잎교회 봉숙목사> 

    

칠판을 밖에 내놓겠다고 우기는 경희에게서 빼앗아 지워보려 했으나 매직펜으로 쓴 것이라 지워지지 않았다. 초창기에 ‘불옆교회’라고 낙서한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 아이들이 썼던 붉은색은 아니었지만 경희의 것도 안 지워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때처럼 백 부장이 와서 물파스로 지워주면 좋으련만 그를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할 수없이 경희의 글씨가 담긴 칠판을 한쪽으로 치워놨다. 누구라도 보면 안 될 텐데 하면서 봉숙은 흔들의자로 갔다. 경희가 부지런히 쫓아와 테이블 의자를 끌어당겨 옆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지, 봉숙아?”

무슨 일인지 아닌지 봉숙 자신도 구별이 되지 않아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라일라의 사건 말고는 일상을 건드릴 만한 어떤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라일라의 이야기를 경희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한 번도 라일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데 놀랐다. 그 난리를 내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을 텐데 이후에 상태가 어떤지, 그녀의 말대로 ‘중동 컴퍼니’는 멀쩡한지, 남편과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지 다 깜깜했다. 만일 백 부장이 출근을 했다면 반드시 무슨 소식이라도 물어다 주었을 텐데 그조차 만나질 못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자조 섞인 질문에 한숨이 나왔다. 봉숙은 경희를 내버려 둔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경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으나 그뿐이었다. 1, 2층의 기계는 여전히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남자 직원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 부장도 이 과장도 보이지 않았다. 봉숙이 돌아 나와 3층으로 향하는데 남자가 불렀다. 


“부장님 찾으시나요? 계속 병가 중이세요.”

가만히 보니 차수막을 설치하러 같이 왔던 직원인 것 같았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봉숙은 ‘이 과장은요?’하고 물으려다가 일단 백 부장의 상태를 물었다.


“아시다시피 중독이잖아요. 아마 알코올 병원에 강제 입원시킨 것 같아요. 사장님이.”

남자는 봉숙을 빤히 바라보며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남자가 얘길 마치기 전에 봉숙은 3층으로 올라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이 과장도 알았을 텐데 왜 얘길 안 했을까? 

결국 다시 반지하로 내려온 봉숙은 경희에게 백 부장의 얘기만 알렸다. 어느 병원인지 가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중얼거리자 경희는 정색을 했다. 


“봉숙아, 모르겠니? 그 사람들이 디스하고 있잖아? 백 부장인가 뭔가 하는 남자나 드럼 친다는 여자나. 너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단 얘기지. 그럼 답이 나왔네. 네 불면증의 원인. 생각해 봐.” 

경희의 낮지만 확실한 목소리는 무거운 돌이 되어 봉숙의 가슴에 턱 내려앉아 숨쉬기가 버거웠다. 


“일단 너부터 병원에서 링거 한 대 맞아라. 죽게 생겼네. 차 가져올 테니까 준비해.”

경희가 일어서서 나가려는 데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 과장이 점심을 가져오는 소리였다. 이 과장은 검은 봉지를 들고 들어서다가 경희를 보자 잠깐 멈칫했다. 봉숙이 손짓하자 경희는 잠시 후에 오겠다며 문을 나섰다.

 

“오늘은 깻잎 김밥으로 가져왔어요. 부장님도 이걸 좋아하거든요.”

검은 비닐봉지만 두고 나가려는 이 과장을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잡힌 그녀의 팔은 허수아비의 그것처럼 한없이 허전했다.

 

“미안해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이 과장은 다른 때와 다르게 봉숙과 눈을 맞추고는 다소 놀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목사님도 아프구나.”

혼잣말이었지만 봉숙은 알아들었다. 


“백 부장님 회사에 안 와요? 아픈가요?”

봉숙은 간단하게 물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 과장이 말해 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 과장은 겁먹은 눈빛으로 봉숙을 바라볼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겁먹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시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봉숙은 기다렸다. 


“부장님 병원에 갔어요. 치료받으러. 그런데 이상해요. 목사님, 왜 그랬어요?”

힐난하듯이 묻는 질문에 봉숙은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부장님이 바이어 보냈잖아요. 바이어가 죽고 싶다고 했대요. 그래서 목사님 만나면 그런 마음이 없어지니까 가 보라고 했다는데 목사님 하고 싸웠다면서요? 다리도 다치고. 부장님이 너무 화가 나서 매일 술을 엄청 마셨어요. 제가 깨우러 갈 때마다 못 일어났거든요. 그러다 정말 죽을 거 같아서 병원에 사장님이 입원시킨 거예요. 부장님이 목사님 정말 좋아하는데요.”

이 과장은 백 부장이 봉숙을 좋아한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고 이야기를 마쳤다. 라일라의 일도 궁금했지만 싸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무런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내가 싸웠던가? 다시 되짚어 보았지만 싸움이라고 할 만한 어떤 정황도 없었다. 


“병원을 알 수 있을까요?”

이 과장은 봉숙의 질문에 근처에 있는 정신과 의원을 알려 주었다. 출퇴근길에 정신과 간판을 보긴 했으나 그곳이 알코올 전문 의원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라일라와 싸웠다고 생각하는 남자한테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니, 일방적인 말만 들은 사람인데 내 방문이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왜 싸웠다는 결론을 얻은 것일까?’ 

생각은 복잡했지만 어쨌든 나서야 할 길인 것 같았다. 겉옷을 챙겨 계단을 오르는데 경희의 자동차 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OOO 정신과 좀 다녀올게. 집에 가라.”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였으므로 경희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삼각별을 단 자동차는 졸졸 따라왔다. 


“생각 잘했어. 상담 좀 받고 치료도 받아. 내가 용약 한 재 지어 보낼게.” 

정신과에 도착한 봉숙을 확인하고 경희는 떠났다. 머지않아 진공팩에 든 고동색의 액체가 박스로 배달될 것이란 생각에 봉숙은 더 머리가 아팠다. 

정신과 면회는 예약제였지만 근처의 풀잎교회 목사란 봉숙의 타이틀이 즉시 면회를 가능케 했다. 의사는 쉰이 좀 넘었을까 싶은 푸근한 인상의 여자였다. 지금은 프로그램 시간이니 30분 후에 테라스 정원을 사용하라고 했다. 봉숙은 복도에서 프로그램실을 들여다보았다. 20여 명 남짓의 남자와 여자가 둥글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봉숙은 눈으로 백 부장을 찾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백민기 씨 면회하러 오신 목사님이시죠?”

하늘색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백 부장을 데리고 봉숙에게로 왔다. 아, 그의 이름이 백민기였지 맞아. 백 부장으로만 생각하고 불렀던 그의 이름이 민기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면회자 명단에도 백민기라고 적었을 텐데 왜 기억을 못 했을까? 봉숙은 자신의 기억이 점점 못 미더웠다. 

면회장으로 사용되는 테라스는 사방이 훤히 보이는 유리였고 열 평 남짓의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렇다고 폐쇄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담배를 피우려는 환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백 부장은 입원 전보다는 혈색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술을 못 먹게 하니까 담배는 자유롭게 놔둬요. 그렇다고 제가 피우는 건 아니고요.”

 

“오실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봉숙의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백 부장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갈색 푸들 같은 머리칼의 여자가 백 부장의 얼굴에 장난스럽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웃어댔다. 


“민기 오빠 애인?”

손짓으로 여자를 물리친 백 부장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쳤다. 그 바람에 손가락에 있던 담배가 테이블로 떨어졌다. 


“아까운 담배를! 오빠, 내가 가져간다.”

다시 다가온 갈색머리가 담배를 날쌔게 가지고 달아났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담배연기가 함께 어우러졌다. 무슨 병원이 이래? 봉숙은 주변을 둘러보며 마음이 상했으나 백 부장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모님, 바이어한테 왜 그러셨어요?”

한참 만에 입을 뗀 백 부장에게서 나온 질문에 봉숙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사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 마음속으로는 라일라가 내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나 하는 얘기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사모님, 바이어 얘길 들었는데 불안하고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더라구요. 그 여자가 그러는 거 처음이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사모님 하고 같이 있으면 될 것 같은 확신이요. 그래서 얘길 한 거예요. 내려가 보라고. 제가 그랬거든요.”

봉숙은 수치심이 올라와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부끄러웠다.


“죄송해요. 사모님을 힘들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경험한 것이 너무 신기해서 바이어를 돕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백 부장은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봉숙은 한동안 나갔던 정신을 수습하듯 모아서 물었다. 


“뭔가요? 백부장님이 경험한 것이?”

백 부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다시 침묵했다. 저 담배를 입에서 빼야 말을 할 것이란 것을 알고 봉숙은 조용히 기다렸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요. 그냥 저절로 솟는 샘물처럼 그 생각이 마음속에 점점 차오르더라구요. 나중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찼어요.”

봉숙은 번개라도 맞은 듯 정신이 휘청거렸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신을 차리자.


“하지만 부장님, 그건 제가 뭘 해서가 아니잖아요? 저는 그냥 박하차만 드린 건데.”


“알죠. 사모님, 알아요. 그런데 사모님, 사모님이 끝까지 같이 계셨잖아요.”  

   

백 부장과 헤어져 나오며 만난 하늘에는 이미 저녁놀이 비끼고 있었다. 반지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뺨에도 온화한 볕이 머물렀다. 그러나 어깨를 움츠리고 석양 속을 걷는 그녀의 모습은 추워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걸어도 걸어도 어디에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이 그녀의 그림자만큼이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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