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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10. 겨울잠

봉선화가 경희의 연락을 받은 것은 첫서리가 내리던 날 아침이었다. 아직 서리철은 아니었으나 기온은 맘대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겨울옷을 입기에는 이르고 가을옷은 추웠다. 햇살만 비추면 기온이 오를 것이란 예보도 있어서 봉선화는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나섰다. 

경희와 만나기로 한 반지하에 이르렀지만 봉선화는 얼른 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했다. 밖에서 보아도 쓸쓸한 것이 빈집 같았다.


‘도대체 며칠이나 비웠기에 이 모양이야? 모든 게 제멋대로야.’

한숨을 쉬며 돌아보니 경희가 휴업상태를 써서 밖에 세워둔 칠판에 댓글처럼 낙서가 있었다.

      

<쌤통이다>

<빵 먹고 싶어요.>

<폐업 ㅋㅋㅋ>

<이상한 교회 뽕목사>    

 

장난 글과 낙서가 뒤섞여서 칠판은 시끄러웠다. 

봉선화는 칠판을 흘끗 쳐다보곤 발로 툭 차서 쓰러뜨렸다. 


‘저런 걸 왜 세워 놓은 거야? 봉숙이나 서경희나 다 이상해.’ 

반지하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서성거리자 경희의 차가 나타났다. 경희는 여전히 고급스럽게 아름다웠다. 


“언니는 늙지도 않아? 하긴 노화도 돈으로 막는 세상이니까.”

봉선화의 비아냥대는 인사에 경희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반지하로 들어섰다.

 

“왜 안 들어와?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

경희의 말을 따라 안으로 들어온 봉선화는 생각보다 정결한 실내에 다소 안심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문도 안 잠가 놨대?”

두리번거리는 봉선화에게 경희는 입을 막으려는 듯 들고 온 커피를 건넸다. 봉선화의 것은 찬 것이고 자신의 것은 뜨거웠다. 


“언니도 늙었구나. 뜨거운 아메리카라니. 난 겨울에도 아안데.”

봉선화의 말에 대해서는 아무 대꾸도 없이 경희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3일째야. 잠자기 시작한 게. 죽을까 봐 병원에 옮겨놓긴 했는데 바이탈은 아무 이상이 없다더라. 어쨌든 일어날 거 아냐? 봉숙이 일어나기 전까지 네가 여기 좀 있어 줬으면 해서 연락했어. 문을 닫는다고 해도 봉숙이 본인 생각도 들어봐야 하고 2명인지 3명인지 교인도 있으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말하는 경희를 탐색하듯 훑던 봉선화는 마시던 커피를 밀어놓고 코웃음을 쳤다. 


“알아, 나도 네가 여기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그래도 신학교 다닌다며? 어쨌든 네 언니니까 당분간만 여기 있어 줘. 봉숙이처럼 아침부터 밤중까지 있으란 얘긴 아냐. 그래도 아침 아홉 시에서 여섯 시까지는 있어줘야지. 내부도 살펴보고 청소도 좀 하고 또 드나드는 사람들 커피 대접도 하고. 나도 믿어지진 않지만 여기 반지하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위인들이 있더라. 그러니까 너라도 있으라고 봉선화, 아니 봉은서.”

봉선화는 자신의 개명한 이름까지 기억하는 이 친밀한 여자를 다시 뜯어봤다. 어느 한 구석 뒤틀리거나 구부러진 데가 없이 고운 사람이 왜 거친 봉숙의 삶으로 들어온 것일까. 그냥 가만히 있지. 하긴 봉숙의 친구라는 것에서부터 이미 꼬였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니? 나도 갑갑해서 그래. 오죽하면 널 불렀을까?”

경희가 반짝이는 반지를 서너 개 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마의 창백하고 얇은 피부를 통해 푸르스름한 정맥이 살짝 드러났다. 


“근무하란 얘기지? 나인 투 식스. 좋아. 딱히 할 일도 없고, 잘됐네. 사실 중이 될까 하고 야심 차게 머리부터 깎았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았어. 정작 결정을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친구가 있는 암자에 눈치껏 눌러 있는데 언니 전화가 온 거지. 신학교? 그건 바로 집어치웠어. 돈도 없고 신앙도 없고.”

경희는 딱하다는 눈으로 봉선화의 두건형 모자를 쳐다봤다. 


‘그래서 그 헝겊대기를 쓰고 온 거였구나. 너도 봉숙에게 대드느라 애쓴다. 아예 반지하 옆에다 절집 간판을 걸지 그래.’

눈으로만 줄줄이 말하는 경희의 이야기를 봉선화는 모른 체 삼켰다. 침묵하다가 한숨을 한바탕 쉰 경희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알았어. 출가를 하든 가출을 하든 봉숙이 퇴원하고 몸 추스를 때까지만 이곳에 출근해. 네 말을 들으니 명색이 교회인 이곳을 맡길 일은 아니지만 뭐. 그럼 정확히 말하자. 근로 계약서를 쓰자면 쓸게. 너를 내가 이곳 카페로 일시 고용하는 거야. 일당은 우리 카페 직원 시급으로 내가 계산할 거고.”

경희는 화가 나면 차분해지는 그 목소리로 봉선화에게 느릿하게 설명했다. 그런 경희를 보는 봉선화의 눈이 착잡함과 울분으로 복잡했다. 


“언니 말이 곧 계약서지 뭐. 그런데 내가 뭘 하면 되지?”


“아까 얘기한 거. 청소, 그리고 차나 커피.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마.”

경희는 퇴근하면서도 반지하는 잠그지 말 것만 당부하곤 가버렸다.  

    

혼자 남은 봉선화는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아이스아메리카를 단숨에 마시고 실내를 돌아보았다. 덮개가 씌워진 신디와 드럼 위로 먼지 콜로이드가 핀 조명을 타고 아롱거렸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일렉 기타는 한쪽에 뽐내듯 서 있었다. 봉선화가 신디의 덮개를 걷어내고 전원을 연결하자 붉고 파란 작은 불빛들이 반짝였다. 고르고 하얀 건반에 손을 얹다가 봉선화는 놀라듯 손을 뗐다. 


“아무것도 하지 마.”

경희가 서슬 퍼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봉선화는 신디의 자리를 떠나 산책로가 보이는 창으로 갔다. 익숙하고도 친근한 흔들의자가 햇살을 받고 조용히 놓여 있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낮이 되자 산책로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 쪼이고 얼룩무늬 고양이가 창문을 노려보며 지나갔다.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기 싫었던 봉선화는 고개를 돌려 중얼거렸다. 기상청 예보가 맞기도 하는구나.   

   

“목사님.”

가느다란 목소리에 봉선화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검정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아니구나. 아직 아니구나.”

봉선화를 본 여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나가려고 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저 여기 일하러 왔어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봉선화의 말에 여자는 멈칫거리더니 다시 돌아섰다. 목이 늘어진 회색 터들 니트와 도수 높아 보이는 그녀의 안경이 봉선화가 살았던 고시원의 장기투숙객을 생각나게 했다.


“목사님 동생이신가요? 똑같아요. 목소리까지.”

여자는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나는 김밥 냄새가 봉선화의 시장기를 돌게 했다. 


“제가요?”

봉선화는 자신이 언니와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잠깐 기분이 상했다. 내가 훨씬 낫지. 언니야 인물이며 몸매며 볼 게 뭐 있어. 


“네, 목사님인 줄 알았어요. 너무 똑같아서.”

여자는 자신이 2층에서 일하는 이 과장이라고 소개하곤 김밥을 전했다. 며칠 목사님을 못 만나서 걱정이 되었는데 동생이 오셔서 다행이라고 살짝 웃었다. 그 모습이 봉선화가 보기엔 기이했다. 


“아니요. 저는 잠깐 알바로 온 거예요. 동생인 건 맞아요.”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봉선화가 재밌다는 듯 여자는 도수 높은 안경 속에서 눈알을 굴리며 봉선화를 관찰했다. 


“실크로 된 스카프를 쓰면 더 예쁠 것 같아요. 목사님보다 머리는 좀 작으시네요.”

봉선화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 쓴 두건에 손을 댔다. 저 여자가 두건이라도 벗겨내면 큰일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봉숙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여자가 아리송했다. 

결국 여자는 봉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채 김밥 봉지만 남겨 놓고 총총 위로 올라갔다. 공중 제비하는 사람처럼 여자의 몸이 어찌나 가벼워 보이던지 봉선화는 자신이 환영을 보았나 하는 생각에 눈을 있는 대로 벌려 떴다. 자기도 모르게 여자를 따라 나가던 봉선화는 나동그라져 있는 칠판을 발견하고 미안한 마음에 들고 들어왔다. 버리려고 하다가 그래도 봉숙이 매일 썼던 칠판이라는 생각에 스프레이 모기약을 찾아 서너 번 뿌리고 닦아냈다. 제법 깨끗해진 칠판에 뭐라고 써야 하나 하다가 김밥 냄새를 못 이기고 일단 밥을 먹기로 했다. 

식사 후 환기를 위해 모든 창과 문을 열고 한바탕 청소를 하고 나니 온몸이 후끈거렸다. 아침의 냉기는 사라지고 실내는 온기로 차올라서 봉선화는 겉옷을 벗어 놓은 채 이끌리듯 키보드로 향했다. 

건반에 손가락을 올리자 자동적으로 멜로디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도 없이 눌렀지만 그 곡은 엄마가 평소에 즐겨 부르던 노래 ‘봄날은 간다’였다. 엄마는 찬송가보다 그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 사춘기에 접어든 어느 날 왜 그렇게 청승맞은 노래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청승맞은 게 아니라 진심이라 좋다고 했다. 

선화야, 조금 더 크면 알아. 그게 인생 아니니? 

엄마의 노랫소리는 탁성이었으며 박자감도 없어서 늘 가족들의 타박을 받았다. 그래도 엄마는 혼자서 끊임없이 그 곡조를 흥얼거렸다. 

봉선화가 곡을 두 번 계속해서 치고 다른 곡으로 넘어가려는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까 김밥을 들고 왔던 2층 여자였다. 이 과장이라고 했던.


“들어오세요.”

일어서서 그녀를 불렀지만 이 과장은 문 뒤에서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처음 들어요. 그렇게 아름답고 슬픈 연주는.”

여전히 몸은 보이지 않았고 메아리처럼 봉선화에게 소리만 던져졌다. 그제야 봉선화는 자기가 창문과 현관문과 산책로의 모든 문을 열고 연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키보드 소리가 온 건물에 울렸겠구나. 아이고, 이게 무슨 민폐인가.

봉선화는 서둘러서 창문과 문을 닫고 이 과장 쪽으로 다가갔다. 


“다음에 내려와서 들으세요. 다른 노래 쳐 드릴게요.” 

사과 겸 초청의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 과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키보드의 덮개를 씌우며 일과 중에는 문을 꼭꼭 닫고 연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경희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흔들의자로 돌아와 창밖을 보고 있자니 봉숙이 생각났다. 


‘언니는 여기서 매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묻고 싶었겠지. 계속 묻고 있었는지도 몰라. 대답을 들었을까? 그래서 편안히 잠에 빠져 들었나? 불면증이라더니 그럼 그게 고쳐진 거야? 오 마이 갓. 봉선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정신 차리시오.’

봉선화는 두건을 벗고 파르스름하게 깎인 머리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누구라도 볼세라 얼른 두건을 덮어쓰고 실내를 어슬렁거렸다. 


‘알바치곤 편하고 재밌네. 그런데 경희 언니가 중식은 제공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사실 봉숙의 아파트로 가야 하는데 비번을 몰라 경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6시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봉선화는 다시 키보드로 가서 앉아 건반을 꾹꾹 눌렀다. 그녀의 언니 봉숙과 형부인 강목사가 듀엣으로 즐겨 부르던 곡이었다.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어느 사이에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감은 눈에서도 눈물은 계속 넘쳐나고 흘러 그녀의 목을 타고 가슴을 적셨다. 


‘뭐야 이게?’

갑자기 화가 나서 키보드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침묵이 반지하에 가득 고여 왔다. 

흔들의자에 팽개쳐 둔 그녀의 핸드폰으로 4자리의 숫자와 *표시가 잠깐 떴다가 사라졌다.      

    



봉선화가 출근한 지 나흘째 되던 날 경희가 나타났다. 청소를 마치고 커피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경희는 짙은 갈색 니트 차림이었고 파르스름한 윤기가 도는 자그마한 클러치를 들었다.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봉선화에게 경희는 포장된 브런치를 내밀었다. 


“봉은서, 왜 칠판은 안 내놓지?”


“칠판? 아, 그거? 왜? 내놔야 되는 거야? 그리고 언니, 은서 아니고 그냥 선화라고 불러 줘.”


“거래는 서류로 하는 거지. 내가 입금해야 할 이름은 봉은서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언니는 일어났어?”

봉선화의 질문이 마치 벌써 일어났느냐는 투로 들려서 경희는 착잡한 눈길로 바라봤다. 


“아니, 궁금해서. 벌써 엿새째잖아.”

봉선화는 경희가 가져온 브런치를 먹고 경희는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아직이야. 별 일은 없었어?”


“별 일까진 아니고 여기 2층 여자가 김밥을 가져와서 한 번 먹었어. 또 한 번은 치킨을 가져다주고. 오늘은 출근 안 하나 봐. 토요일이라 그런가? 여기 희한한 데야. 무슨 세든 사람 밥을 건물주 직원이 준대요?”

경희는 열심히 먹는 봉선화를 곱게 흘겨봤다. 철이 없는 데에다가 푼수까지 겸했구나. 그런데 그런 봉선화가 그다지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네 밉상이었던 애가 달리 보이는 이유가 뭘까? 


“네 언니가 밥을 안 먹는 것 같으니까 굶어 죽을까 봐 먹이나 보네. 죽으면 월세 못 낼 거 아냐.”


“그럼 다른 세입자 구하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경희는 잠깐 생각했다. 얘랑 무슨 얘길 해. 


“너도 참 속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여기 건물주가 반지하는 꼭 교회여야 한다고 했대. 누가? 점쟁이가.”


“진짜 재밌네. 그 건물주 궁금하다. 만나고 싶게 하네.”

경희는 어이가 없어 일그러진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언니는 어때? 혹시 혼수상태 아닌가 해서.”

경희가 의미 있는 눈길로 물었다. 혼수상태? 


“전에도 그런 적 있었거든. 먹지도 않고 잠만 사흘인가 자더라고. 우린 단순히 잠만 잔 줄 알았는데 아마 혼수에 빠졌었던 것 같아. 그땐 병원 갈 생각도, 돈도 없었으니까.”

봉선화는 어떻게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싶게 샐러드와 빵을 완전히 먹어 치웠다. 봉선화의 손에 잡힌 아이스커피가 차게 느껴질 정도로 반지하에는 온기가 없었다. 차에서 숄이라도 가지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봉선화의 얘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깨어난 거야?”


“아무렇지 않긴. 깨어나긴 했는데 못 먹어서 그런지 비몽사몽으로 며칠 지냈지 아마. 엄마는 영적인 여행을 다녀오는 모양이라고 했는데 내가 볼 땐 완전 기절이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좀 긴 것 같네, 문제 생기는 거 아니겠지, 언니?”

봉선화는 드디어 모든 식사를 끝내고 반쯤 남은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작 경희 도 아침을 먹진 않았지만 한 입도 권하지 않는 봉선화가 괘씸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아는 병원에 입원시켰어. 풀타임 간병인 붙였고. 링거는 계속 들어가고 있어. 의사 말로는 아무렇지 않대. 그냥 잠자는 거라고 하는데. 호흡도 자가로 하고 뇌파도 정상이고. 지금은 달리 손 쓸 일이 없는 것 같더라.”


“아니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봉선화는 이제야 제대로 된 질문을 했다.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경희는 오히려 물었다. 


“내가 묻고 싶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 네가 기절했다고 한 그때 말야.”

봉선화는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천정으로 향하고 깜빡였으나 생각나는 게 없다고 했다. 봉숙과 봉선화 사이에 있던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봉길이 대마초로 잡혀간 사건이 있긴 했지만 집행유예로 끝났고 봉숙이 특별히 그 일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했다. 


“언니, 혹시 사람도 겨울잠을 자는 경우가 있을까? 곰이나 개구리처럼 말야.” 

경희는 어이가 없어서 봉선화의 볼따구니를 쥐어흔들고 싶었다. 


“넌 말도 참 이쁘게 골라서 한다. 한 대 때리고 싶게.”

그러나 봉선화는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진실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으나 경희는 무시했다. 


“아냐, 언니. 엄마가 언니 보고 예쁘고 귀여운 판다 같다고 한 적이 있어. 아마 회색 양털 외투를 사주셨을 때였을 거야. 그런데 엄마 말은 뭐라고 할까 영적 파워가 있거든.”

봉선화는 신나는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야, 그건 봉숙이 통통하고 보얗고 복스러워서 그러신 거지. 그리고 판다가 무슨 겨울잠을 자니? 얘기가 웃기잖아. 너는 네 언니가 겨울잠 자는 곰 같이 보여?”

봉선화에게 퍼부으면서도 경희는 머릿속으로 봉숙의 행적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곳에 문을 열고 지금까지 10개월 남짓의 세월 동안 봉숙이 어떻게 지냈던가.


‘곰이 맞네. 이 지하에서 살아낸 걸 보면. 더 견딜 수 없어서 잠에 들어가 버렸나.’

실없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봉선화와의 대화가 아무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김현준이 들어섰다. 양손에 샛노란 국화와 붉은 보랏빛 국화가 들려 있었는데 꽤 무거운 듯 힘을 쓰며 화분을 내려놓았다. 국화향이 순식간에 실내에 가득 찼다. 김현준은 경희에게 목례를 하고 화분을 하나씩 강단 쪽으로 옮겼다. 그러다 봉선화를 보곤 놀라는 눈치였다. 


“가을인데 교회가 썰렁해서 국화를 가져왔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안에 계신가요? 전 이 분이 목사님인 줄 알았네요. 너무 닮으셔서.”

봉선화의 입이 벌어지려는 순간 경희가 막아섰다. 


“글쎄 봉목사가 좀 아프네요. 그래서 동생이 잠깐 도우러 온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전 찬양을 좀 하려구요. 집사님은 가실 거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김현준은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낸 것은 usb였고 컴퓨터에 연결을 했다. 경희가 뜨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봉선화의 옆구리를 건드려 김현준을 소개했다. 노래를 하러 교회에 오신 분이라고. 그리고 김현준에게도 봉선화를 소개했다. 


“말씀드렸듯 봉목사 막내 동생이구요, 두 분 다 성인이니까 말거리를 만들 일은 없겠죠? 저는 가 보려구요. 그리고 내일 예배는 다른 교회로 가시던가 해야 할 것 같네요. 목사가 없으니.”

김현준은 경희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로 듣다가 갑자기 정신이 난 듯 나가는 경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요. 내일 제가 영상으로 예배할 수 있게 세팅해 놓을게요. 그러니까 내일 집사님도 오세요.”

나가다 말고 경희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목이 결릴 지경이었다. 뭐래?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봬요.”

김현준의 명랑한 소리가 더욱 화를 돋우었다.

 

‘저 남자는 언제 화가 날까? 아니, 화를 낼 줄은 아나? 좀 부족해 보이는 건 알았는데 좀이 아니라 많이 부족하구나. 봉숙아, 네가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가 좀 납득이 된다. 곰 같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든 곳이야. 그런데 문제는 네가 예민한 거지.’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며 경희는 떠났고 반지하에선 잠시 후에 기타와 키보드 소리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서너 개의 곡이 서로 조율하는 과정 없이도 연주가 되었다.

      

“모든 곡을 다 아시나 봐요? 놀랍네요. 동생님.”

김현준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땀을 닦으며 봉선화에게 물었다.

 

“제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거든요. 교회에서 부르는 곡은 거의 안다고 보면 되죠. 그런데 집사님은 노래보단 기타가 좋은데요. 하긴 같이 잘하기가 쉽진 않지만요.”


“아, 저는 집사는 아니고 김현준입니다.”


“그 나이까지 집사가 못 된 건 저랑 같네요.”

봉선화는 여러 면에서 훤칠한 이 남자가 왜 이 반지하에서 소리를 높여 노래하는지 궁금했다. 저 정도의 기타 실력에다 그만한 열정이면 웬만한 사이즈의 교회에서 두 손 들어 환영할 텐데. 어디서 문제를 일으키고 나왔나. 그렇다고 초면에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동생님의 최애곡은 뭔가요? 들어볼 수 있을까요?”


“공짜는 안 되죠. 커피라도 내오시던가.”

봉선화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키보드에 다시 손을 올리자 김현준은 화들짝 놀라며 카페 테이블로 갔다. 커피를 내리려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그라인더에 커피를 갈았다. 

봉선화는 요란한 꾸밈음을 넣어가며 ‘봄날은 간다’를 연주했다. 두 번째는 멜로디만 건드리며 작은 소리로 노래를 하다가 허밍을 하다가 했다. 김현준은 키보드 쪽의 봉선화를 멍하니 보다가 들킨 듯 한 표정으로 얼른 커피를 담아 내왔다. 봉선화 것 한 잔이었다. 봉선화는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듣고 커피를 내려온 성의가 고마웠지만 굳이 표현하진 않았다. 

김현준은 커피를 마시는 봉선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목사님은 많이 안 좋으신가요? 아까 경희집사님한테는 무서워서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봉선화는 그 말이 우스워서 하마터면 진짜 웃을 뻔했다. 


“아뇨. 겨울잠 자고 있어요. 지금.”

김현준은 길쭉하면서도 제법 큰 눈을 껌뻑였다. 봉선화는 그가 소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농담하지 마시구요. 목사님이 여기 계셔야 하는데.”


“농담 아니에요. 언니는 가끔 겨울잠을 자요. 이 교회에서 누가 속을 썩였나 봐요? 혹시 그쪽?”

봉선화가 빙글거리며 하는 얘기를 김현준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기면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늘 잠이 부족해 보이긴 했어요.”

김현준의 표정을 보니 그는 진정 봉숙을 걱정하고 있었다.

 

“기면증 아니고 겨울잠이라니까요.”

봉선화는 한 톤 높은 소리로 사실임을 확인시켰다. 


“겨울잠이든 기면증이든 상관없어요. 일어나실 거예요. 어쩌면 내일 오실 지도 모르죠. 여기엔 목사님이 필요해요.” 

봉선화는 들고 있던 컵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 봐요. 현준 씨라고 했나? 현준 씨는 왜 여기 오는 거예요? 크고 좋은 교회가 주변에 널렸는데요. 굳이 이 반지하를 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요?”

그러나 김현준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시 기타를 잡고 노래를 시작했다. 아마도 내일 함께 할 찬양곡 같았다. 나름 예배 준비를 하러 온 게 분명했다. 

봉선화도 슬금슬금 키보드로 다가가서 앉았다. 김현준의 곡은 봉선화가 다 커버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준비된 세션 같았다. 거의 두 시간을 노래하던 김현준은 기타를 정리하고 한쪽에 치워진 칠판 앞으로 갔다. 봉선화가 열심히 지워놓았지만 칠판은 별로 깨끗하지 않았다.   

   

<이곳 반지하에서 예배가 있습니다.>  

   

검정 보드 마카를 들어 글씨를 쓴 김현준은 칠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앉은 채로 그 모습을 보던 봉선화는 그냥 가버리려나 생각하곤 자신도 키보드를 정리했다. 전원을 빼고 덮개를 씌우는데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김현준이 현관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동생님은 왜 여기 오시는데요?”

생각지 않은 질문에 봉선화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경희가 아르바이트라고 얘길 했건만 왜 또 묻는 걸까 하다가 어정쩡하게 미적거렸다.


“아니. 저는 그냥”

봉선화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김현준은 바로 자기 얘기만 하고 가버렸다. 


“우리 목사님, 많이 외롭고 힘겨우셨나 봐요. 겨울잠 깨우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기가 막혀 자기도 모르게 김현준을 따라 나가 보니 칠판이 출입문 한쪽에 얌전히 세워져 있었다. 봉선화는 칠판을 다시 들여놔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내려왔다. 


‘모르겠다.’ 

지난 나흘 동안의 일들이 뒤죽박죽으로 봉선화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중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김현준의 질문이 봉선화의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동생님은 왜 여기 오시는데요?’    

 

  



“사모님, 계세요?”

문을 다 열어놓고 청소에 열중하고 있는 봉선화를 부르는 소리였다. 봉선화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대걸레질을 마치고 돌아섰다.


“사모님.”

다시 한번 들리는 굵은 저음에 뒤돌아보니 얼굴이 시커먼 덩치의 백 부장이 서 있었다. 역광이어서 봉선화가 다가가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 백 부장은 뒤로 물러섰다.


“누구세요?”

백 부장은 봉선화를 살피며 경계하듯 물었다.


“아니, 그런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리고 여기 사모님이란 사람은 없어요.”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봉선화가 툭툭거리자 백 부장의 말투는 바로 고분고분해졌다. 


“아, 목사님을 제가 사모님이라고 불러서 그러죠? 다른 뜻은 없어요. 여자분에게 목사님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요.”

백 부장은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봉숙을 찾는 게 분명했다. 

봉선화는 그런 백 부장을 무시한 채 청소용구를 정리하고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일요일이었고 예정대로라면 김현준이 와서 영상예배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마침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김현준이 박 집사와 함께 들어섰다. 김현준과 박 집사는 백 부장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서로 알아보며 인사하는 그들 사이에서 봉선화는 이방인이었다. 

그 느낌을 알아챈 김현준이 봉선화를 소개했다. 


“목사님 동생이고 신디를 무지하게 잘 치십니다. 모든 노래를 다 아세요. 아, 이분은 이 건물 백 부장님이세요.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그러자 바로 이들의 관계가 파악된 봉선화는 소리 없이 퍼즐을 맞췄다.


‘아, 교인들인데 거대한 남자는 이 건물과 관계가 있고 교회는 거의 나오질 않았던 거지. 저 새초롬하고 고상한 여자도 교인인 모양이네. 경희언니까지 하면 그래도 다섯은 되는군.’

봉선화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 김현준이 교회의 예배 채널을 찾아 틀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넘치는 채널은 광고 방송 중이었다. 그런 김현준을 보는 봉선화의 눈에 한심함이 넘쳤다. 


“현준 씨. 뮤트 시켜 주세요. 아직 시작 전이니까요”

박 집사의 말에 김현준이 바로 소리를 죽이니 다시 정적이 흘렀다. 봉선화는 뭘 해야 하나 하다가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곤 사무실 쪽으로 가려는데 백 부장이 불러 세웠다. 


“저기요. 동생 분, 제가 알코올 병원에 입원했다가 어제 퇴원했어요. 칠판에 사모님 글씨가 아니라 이상해서 들어와 봤는데, 사모님은요?”

봉선화는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봤다는 얼굴로 백 부장을 바라봤다. 알코올 중독인지 도박중독인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데 저 남자는 자랑도 아닌 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떠들고 있을까. 그리고 사모님은 뭐야, 물어보려면 제대로 호칭을 써서 묻던가. 


“겨울잠 주무신대요. 어제 동생님이 그러셨어요.”

김현준이 무심하게 답변을 하자 주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만 공중에서 부딪치는데 수진이 들어섰다. 


“대박,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무슨 사람이 겨울잠을 자요?”

놀란 듯 질문을 하는 수진과 사람들은 잠깐 멈추다 와르르 웃었다. 뜬금없는 겨울잠보다는 수진이 들고 온 커다란 쇼핑백에서 나는 구수한 빵 냄새가 훨씬 현실적이었다. 


“수진 씨 또 빵 만들어 왔네. 늘 신세만 져요.”

박 집사가 쇼핑백을 받아 들고 미안해하며 말하는 사이에 백 부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누구도 잡지 않았고 봉선화도 가만있었다. 


‘백 부장이란 남자는 김현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봉숙이 겨울잠을 잔다는 그 황당한 얘기에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나가버렸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지? 참 신기하고 놀랍다.’

백 부장도 그냥 보낸 그들에게 봉선화는 더욱 관계자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결국 봉선화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모습을 본 김현준은 모종의 동작을 취하려다 그만두었다. 

사무실문을 닫아버리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들리지만 정확한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TV 볼륨이 커지고 찬양 소리와 설교소리가 순서에 의해서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TV 앞에 앉아 예배 중일 터였다. 사무실 벽을 통해 들리는 소리는 마치 물속인 듯 뭉툭해서 봉선화의 소외감을 증폭시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에 봉선화는 화를 내는 게 차라리 낫다 싶어 욕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군. 

그렇게 한 시간 여가 지난 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김현준이 봉선화를 불러냈고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은 봉선화가 중앙에 앉기를 권했다.

 

“수진 씨가 빵을 구워오면 빵을 먹고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는 뼈다귀해장국이나 치킨집엘 가요. 오늘은 동생님이 함께 계셔서 좋은데요.”

김현준의 상기된 목소리는 봉선화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봉선화는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사실 저는 경희 언니, 아니, 서경희 집사님에게 고용된 알바예요. 목사님 나오실 때까지 여기 관리를 하기로 했어요.”

봉선화는 자기 이름을 밝힐까 하다가 며칠이나 더 있겠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어떤 상태이신가요?”

박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봉선화라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히.


“저는 겨울잠을 당연히 농담으로 들었지만 하여튼 계속 주무신다는 얘긴가요?” 

이번엔 대박 겨울잠이라던 수진이 풀어서 물었다. 김현준만 어제 봉선화가 터뜨려버린 겨울잠을 믿고 있는 듯 별 말이 없었다. 대신 그는 열심히 먹는데 집중했다. 


“저도 사실 아는 바는 없어요. 그런데 듣기로는 큰 이상은 없어 보인대요. 저러다 죽어버릴 수도 있긴 하지만요.”

죽어버릴 수도 있단 얘기가 봉선화의 의도는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움찔거렸고 순간 자책했다. 

 

“죽어요? 누가요?”

큰소리로 되물은 것은 김현준이었다. 


“아니 뭘 그렇게 놀라요? 사람이 죽지 안 죽어요? 언제냐가 문제지.”

봉선화는 아차 싶어 그럴듯하게 넘어가고자 되물었지만 은근히 화가 났다.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들이 봉숙을 염려하는 그 분위기가 못마땅했다.


“동생님은 목사님을 싫어하나 봐요?”

김현준이 봉선화를 보지도 않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순간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봉선화는 바로 대꾸하지 않고 입을 일그러뜨려 웃었다. 그러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궁금하네요. 풀잎교회인가 풀밭교회인가 하여간 이런 곳에 왜 오는지.”

봉선화의 질문은 진심이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작정하고 무시하는 질문을 던졌으므로 더 이상의 이야기가 진행되진 않을 거란 봉선화의 생각을 뒤집고 박 집사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이 늘 계시거든요. 오늘 같은 날은 없었어요. 그런데 안 계시니까 정말 이상하네요.”

박 집사는 조용한 소리로 말했고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봉선화는 뭔가 얘기를 잘 못 들은 듯 머리를 흔들었다. 사이비 사교집단도 아니고 목사 때문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봉선화는 지지 않고 바로 박 집사를 공격했다. 

 

“만일 목사님이 여길 떠난다면요? 다른 분이 오신다거나.”

그러나 봉선화의 질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둘러앉은 몇몇은 웃었다. 생각도 안 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잖아요? 오늘처럼.”

봉선화는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로 물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봉선화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도대체 언니의 어떤 카리스마가 작동된 거야? 이건 무슨 집단 최면도 아니고.’

혼란스러워진 것은 봉선화였다. 봉숙에 관한 더 이상의 어떤 이야기도 위험해 보였다. 

잠시의 침묵을 깬 것은 역시 김현준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목사님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비슷한 분이라도 찾으려고 헤매겠죠.”

사람들은 김현준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돼요? 어떻게 사람을 따라가요?”

봉선화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빵은 정말 맛있었지만 김현준의 기이한 답변이 그녀의 입맛을 놓아버리게 했다.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저는 정말 교회를 찾은 것 같아요.”

박 집사가 예의 조용한 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 집사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21살에 군대에서 사고로 죽었다. 어떤 위로도 그녀를 슬픔 밖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끝없는 질문만 그녀를 괴롭혔다. 도대체 아들이 사고를 당할 그 시각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나의 어떤 죄악이 아들을 희생시켰을까? 왜 하필 내 아들인가? 도저히 삶을 견딜 수 없었던 박 집사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편마비가 온 남편을 놔두고 그럴 수도 없었다. 


“죽을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게 너무 가혹했어요. 그렇게 여러 해를 쉬었지만 살기 위해 다시 교회를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올봄에 풀잎교회를 만났습니다. 처음부터 알았어요. 목사님이 가진 따스하고 신비한 힘이요. 사랑하는 사람이 안아주는 느낌과 비슷했어요. 물론 실제로 악수 한 번도 없었지만요. 그날 사실 엄청 울었습니다. 여전히 아들의 죽음은 변하지 않는 고통이었지만 제가 달라지더라구요. 안절부절못하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적으로까지 변하던 제게 편안함이 왔어요. 그건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었어요. 제가 말씀드리지만 저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에요. 그래서 일도 다시 시작을 했구요. 그러니 어떻게 여길 떠나겠어요?”

박 집사의 느리고도 긴 이야기를 들으며 김현준과 수진이는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봉선화만 황당함의 꼭짓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도 그랬어요.”

박 집사의 말이 그치자 수진이가 뒤를 이었다. 봉선화는 저렇게 청량하고 젊디 젊은 사람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까 싶어 귀를 쫑긋했다. 


“저는 목사님이 제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너무 놀랐어요. 그냥 부르시는 게 아니라 저보다 저를 잘 알고 계신 분이란 생각에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났어요. 설명하진 않겠지만 그럴 일이 있었거든요. 직장 때문에 자주 못 왔는데 이젠 데이 근무로 바뀌어서 매주 올 수 있어요.”

수진의 이야기까지 듣자 봉선화는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다. 자신들이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우연히 만난 봉숙에게 그들은 신적인 능력을 부여한 것 같았다. 자신들이 만든 우상이지 싶은 생각에 웃음도 나고 한숨도 나왔다. 그렇다면 저 김현준은 무슨 이야기를 해서 이 우상화를 완성할 것인가.


“저는 아시다시피 맘대로 찬양하러 왔어요. 물론 목사님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굉장히 허용적이라고 느꼈어요. 어떤 형식이나 관습을 묻지도 강요하지도 않으셨고 그냥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대단했어요. 제 인생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거든요? 제 와이프나 딸도 받아주지 않는 저를 말이죠.”

과연 김현준이었다. 그는 웃어가며 일사천리로 자신을 설명했다. 그쯤에서 봉선화도 뭔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왔다. 적어도 이 사람들의 허상은 깨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봉선화는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민머리에 모발이 조금씩 자라나 있었지만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한 삭발이었다. 사람들의 동공이 잠시 확대됐다.


“예, 저는 출가를 결심했었는데 지금은 여기 있네요. 묘하게 언니가 입원하는 시점과 겹쳐서요. 사람에게 겨울잠이란 말은 그렇고, 긴 잠이라고 할까요? 언니에게는 그런 때가 아주 가끔 있어요. 지금이 그런 때고 아마 곧 깨어나긴 할 겁니다. 그 후에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제가 왜 출가를 결심했을까요? 이곳에서 답을 못 찾았단 얘기죠.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려요. 마치 망상 속에 있는 분들이라는 느낌? 저는 언니를 40년이 넘게 봐왔지만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신비한 평안, 위로? 그런 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오히려 헤어지는 게 낫다 싶어 선교지에서 수년간 떠돌며 살았어요.”


“와, 선교지요?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선교지엘 가죠?”

김현준이 눈에 불을 켠 듯 훤한 눈길로 물었다. 


“아, 아. 너무 그렇게 심각하지 마세요. 일하러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믿음이 아니라 그냥 일이요. 먹고살아야 하는 일.”

봉선화는 다시 두건을 머리에 덮어쓰며 김현준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수진이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같은 소리를 내자 봉선화는 무슨 뜻이냐는 듯 물끄러미 수진을 바라보았다.


“목사님 동생이시지만 저와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하신 게 안타깝기도 하고 이상해서요.”

수진의 답에 사람들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봉선화는 발끈했다. 


“이상한 건 당신들이에요. 루저라는 얘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하고 말았네요.”

봉선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김현준과 박 집사는 당황해하는 수진을 토닥이며 자리를 정리했다. 곧이어 수진과 박 집사가 나가는 기척이 나고 기타 소리가 반지하를 채웠다. 잠시 후 목청껏 지르는 김현준의 소리가 봉선화의 귓가에 와닿았다. 


‘아, 쟤는 뭐야? 왜 가지도 않고 시끄럽게 소리를 벅벅 질러대.’

봉선화는 귀를 양손으로 막았지만 김현준을 몰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님, 같이 연주해 주세요. 신디 반주가 필요해요.”

봉선화가 앉은 흔들의자는 삐걱이는 소리를 내고 김현준의 기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창밖으로 얼룩무늬 고양이가 황금색의 아기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지나갔다.  

   

    



<병원으로 와. 깨어났대.>


늦잠 중에 있는 봉선화에게 경희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도 2번 왔는데 오전 10시쯤이었으니 1시간도 전이었다. 봉선화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굳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챙겨 나섰다. 

병원은 봉숙의 아파트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1시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가는 시간 내내 봉선화는 봉숙과 교인들의 생각으로 복잡했다. 일요일의 석연찮은 만남 이후에 그들을 또 볼일은 없겠지만 만일 만나게 된다면 아주 껄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왜 그렇게까지 봉숙에 대해서 혹은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떠들어댔던 것일까 하는 생각에 지난밤 잠을 설친 기억이 났다. 봉선화는 두건 대신 벙거지 모자를 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병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건물이었고 조경도 완전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심긴 나무들은 링거를 매달고 지지대에 묶여 힘겹게 서 있었다. 나무들을 보니 한숨이 푹 나왔다. 어디서 살다가 뿌리 뽑혀 이곳에 왔니. 너도 참 신세가 나 못지않구나.

그러면서도 이런 알짜배기 땅에다 병원을 지은 사람은 얼마나 부자일까 하는 생각에 잠시 경희의 인맥이 부러웠다. 

병실에는 벌써 경희가 와 있었고 간병인으로 보이는 여인은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직 말을 하진 않네. 그래도 집이 낫겠지. 수척한 것 외엔 이상은 없다니까.”

경희의 말을 그저 흘려들으며 봉숙을 살펴보던 봉선화는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봉숙의 몸은 많이 말라 있었고 머리카락은 다 피어버린 갈대꽃처럼 희부연했다. 본래 암갈색의 풍성한 곱슬머리에다 기본적으로 오동통했던 봉숙의 모습은 간데없고 마치 겨울논의 허수아비 같았다. 

봉선화가 정신을 가다듬고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죽기 직전의 엄마 모습이어서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나 눈의 흰자위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푸른 기운이 돌아 맑다 못해 서늘해 보였다. 


“경희 언니, 왜 이렇게 됐대? 너무 말랐잖아. 수액을 계속 맞았다며?”

그러나 경희는 아무 대답 없이 간병인과 비용 계산을 하고 있었다. 봉선화는 조심스럽게 봉숙의 앙상한 손을 잡았다. 손과 손을 잡아 본 것이 언제였던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야윈 손은 아니었다. 그나마 봉숙의 손은 온기와 보드라움을 함께 갖고 있었다. 봉숙은 가만히 손을 빼더니 봉선화의 손바닥에 그림 그리듯 뭔가를 썼다.  

   

“뭐라는 거야? 하여간 교회는 내가 잘 챙기고 있어. 왜 말을 못 하는데?”

봉선화가 화난 소리로 떠들자 경희가 돌아보았다. 그게 화낼 일이니. 

봉숙의 움직임은 느리고 불안정했지만 그나마 제힘으로 걷는 게 신기해 두 사람은 찬찬히 살폈다. 

  

'신기하다. 어디다 목숨을 팔아먹기라도 한 거야. 한 20년어치는 팔았겠네.'

봉선화가 계속 의혹 속에서 허둥거리자 경희가 허리를 툭 쳤다.


"정신 차려. 봉숙이 밥은 일주일 후에나 가능할 거니까 너 먹자고 함부로 치킨이나 피자를 시키지 말아."     

모종의 협박처럼 들린 그 말이 무색하게 봉선화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언니, 나 무서워.”

봉선화의 표정에 정말 두려움이 묻어났다. 경희는 어이가 없어서 빈 자루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는 봉숙을 바라보고 그냥 웃었다. 


“봉숙이 죽기라도 할까 봐? 걱정 마. 몸은 멀쩡하다니까. 말은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나도 몰라. 겨울잠을 잔 게 아니라 너나 나는 알지 못할 어떤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저렇게 깡말라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기본적인 영양공급은 했는데 제 몸이 스스로 지방을 불태웠나? 자연 다이어트. 쟤가 좀 부어있긴 했지. ”

농담까지 섞어가며 하는 경희의 말이 봉선화는 별로 재밌지 않았다. 아직까지 자신이 알아왔던 봉숙과는 전혀 다른 인격이 앞에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봉숙은 둘의 대화를 듣는 듯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잔뜩 여윈 몸과 연해진 이목구비로 마치 벗어놓은 빨래 같았다. 잠든 봉숙의 얼굴로 햇살이 스며들었고 그 사이를 먼지 콜로이드가 연기처럼 일렁였다.  

      


“당신이 계속해 주면 좋겠어.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말야.”

봉숙의 남편은 죽을 때까지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강력한 진통제를 쓰고는 있었지만 기억도 흐리지 않았고 잠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상태가 어쩌다 좋아지면 농담을 하고 교인 하나하나의 형편을 걱정했다. 그러나 정작 봉숙이나 아이들의 일에 대해서는 믿는다는 말만 할 뿐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봉숙은 남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특히 그 무렵은 더 그랬다. 


“난 당신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그리고 혹시 이호가 오게 되면 따뜻하게 받아 줘.”

남편은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가버렸다. 남편의 죽음 곁에서 봉숙에게는 슬픔이나 회한이 아닌 화가 일었다. 이기적인 사람.


‘이호가 샛문으로 몰래 들여온 자식이라도 되는가. 마지막 부탁이란 게 이호였어. 걔 싫어서라도 내가 여길 떠나고 말리라. 날더러 뭘 이어서 하라는 거야? 어림없는 소리. 내가 왜?’     

남편의 장례에서 거의 눈물을 보이지 않은 봉숙이었지만 이따금 눈물을 훔쳤던 것은 홧김에 흘리는 분노의 눈물이었다. 당연히 그녀만 알고 누구도 모르는.

남편은 꽤 많은 돈을 남겼다. 보험을 팔던 교인들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더니 암보험금부터 사망 보험금까지 상당한 금액이 봉숙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교인들은 조용히 떠들었다. 산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나님이 보험설계사를 통해서 강목사 식구들을 살리셨어. 교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업적인 양 보험금으로 목사의 죽음에 대한 위로를 하고 받았다. 남겨진 목사의 식구를 책임질 누구도 없지만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장례 이후에도 교인들은 꾸준히 봉숙에게 왔고 말없는 봉숙을 빼곤 그들끼리 수군거렸다. 삼우제를 지내야지. 

아무도 큰 소리로 말한 적이 없는데도 봉숙은 교인들을 향해 싸우듯 소리 질렀다.


“무슨 삼우제?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제발 나가 주세요. 저 혼자 있게요. 생각할 일이 있다구요!”

봉숙의 괴성에 교인들은 흠칫 놀라 하나씩 밖으로 나가 창으로 봉숙을 살폈다. 미쳤는지도 몰라. 요즘 이상했어.

혼자 남은 봉숙은 마룻바닥에 대자로 엎드렸다. 천주교 사제가 서품을 받는 그 자세였다. 

창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봉선화가 그들을 막았다.

 

“그냥 두세요. 언니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 아녜요? 집사님들은 이 상황이 다 납득이 되시나요? 엄마 죽고 두 달 만에 남편이 죽었어요. 아무렇지도 않던 생때같은 강목사님이요.” 

봉선화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그러자 교인들은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봉선화를 부여잡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엎드려 꼼짝 않던 봉숙은 저녁 무렵 일어나려고 했다. 팔이 저려오고 한기가 들어 근육이 굳은 느낌이었다. 밖에는 녹음이 창창한데 이건 무슨 일이지? 그러나 맘대로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고 한쪽 얼굴은 일그러진 듯 몹시 불편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희가 봉숙을 붙잡아 병원으로 내달았다.   

  

‘그때 선화와 경희가 있었네.’   

봉숙이 잠에서 깨어나 웅얼거리는 소리가 봉선화의 귀에 들어왔다. 


“언니, 뭐라고 했어. 말한 거야?”

봉선화는 모자를 벗어버린 밤송이머리를 봉숙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봉숙은 아무 말 없이 봉선화의 따끔거리는 머리를 밀어냈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이 정신 나간 할머니 같았다. 


“뭐라고 말은 한 것 같지 않아?”

경희도 들은 것이 분명했다. 보온병에서 미음을 따르던 경희가 봉선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봉숙이 잠을 깬 것은 분명했으나 웃음 뒤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눈빛만 푸르스름하여 찬기운이 돌았다. 경희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봉숙에게 들이밀었다. 글씨를 써 봐.

봉숙은 아무렇지 않게 미끈거리는 화면에 미끄러지는 글씨로 썼다.


<X>


“뭐야. 이건 욕 같잖아. 참 별일이다.”

봉선화가 알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미음을 마시고 있는 봉숙을 바라봤다. 


“하여튼 우리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들으니까 상관없어. 우리도 차나 한 잔 마시자.”

경희가 봉숙 옆에 앉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봉숙은 아기처럼 경희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편안한 자세로 있었다. 


“그래. 좀 릴랙스 하고 살아. 친구야. 맨날 날을 세우고 있으니 너나 네 하나님이나 피차 피곤한 일 아니니?”  

경희가 나지막하게 봉숙의 귀에 대고 말하자 봉선화가 픽 웃었다.

봉선화가 가져온 국화차의 향기가 경희와 봉숙을 감쌌다. 봉선화는 목이 탄다고 얼음물을 벌컥대고 마셨다. 


“언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 내일도 알바 나가야 하는 거 맞지?”   

경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내일 교회에 데리고 가보자고 했다.


“아까 네 손에 뭐라고 썼다며. 걔가 무슨 글을 썼겠니. 교회 아니면.”

봉선화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손사래를 쳤다. 


“뭔지 모른다니까. 글씨도 아냐. 그냥 꾸불거렸어. 환자잖아. 순교시킬 일 있어?”

봉선화의 대꾸에 경희는 잠깐 생각하더니 알았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묽은 죽이 올 거야. 말 시키려고 애쓰지 말고 너만 조용히 있으면 되겠네.”

경희는 별다른 걱정하지 말라며 둘을 놔두고 봉숙의 집을 나섰다. 봉선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경희를 배웅했고 봉숙은 양치를 하러 화장실엘 들어갔다. 


“언니, 화장실 혼자 가다 넘어지면 큰일 나. 내가 잡아줄게.”

봉선화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지만 화장실 문이 달칵 잠기고 물소리가 났다. 


‘정말 괜찮은 건가? 그런데 완전 다른 사람이야. 소름 돋아.’

봉숙이 나오길 기다리며 서성대는데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진을 왜 계속 걸어 놓았을까? 그렇게 싫어라 하던 사람이.’

봉선화가 사진에 앉은 먼지를 닦으려고 손을 대자 사진 액자가 툭 떨어졌다. 다행히 부서지진 않았지만 벽에 붙여 놓은 플라스틱 고리가 떨어져서 덜렁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봉숙은 사진 액자가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걸려 있지 않았던 듯 무심한 표정으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언니, 이거 걸어? 말아?”

봉선화가 액자를 들고 큰소리로 물었으나 봉숙은 눈을 감아 버렸다. 

봉숙에게서 들릴 듯 말 듯 허밍이 흘러나왔다. 


“언니, 노래 부르고 싶어? 피아노로 쳐 줄까?”

갑자기 흥분한 봉선화가 거실 귀퉁이의 피아노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허밍이 멈추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잠든 편안한 모습으로 봉숙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봉숙이 잠든 거실 창문으로 불그레한 석양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손님 같은 어둠이 조심스럽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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