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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12. 제자리에

겨울의 여운은 길었다. 조금 기온이 오르는가 싶으면 바로 강추위가 몰려와서 사람들은 패딩을 벗어나질 못했다. 그래도 봄을 기다리는 이들은 추위를 무시하고 얇은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봉숙은 기분이 좋았다. 추위를 무릅쓰고 봄을 끌어다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봉숙도 얼마 전에 경희가 사다 준 베이비핑크 스웨터를 턱까지 끌어올려 입고 아이보리색 패딩을 걸치니 나름 봄 같았다.  

    

<먼 산 어딘가에 봄이 숨어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봄차를 준비했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칠판에 글씨를 써 내놓고 오늘은 김현준이 올까를 생각했다. 김현준은 열흘 전에 호주엘 다녀온다고 했다.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무슨 정리인지 묻지는 않았으나 알 것 같았다. 엊그제 메신저로 이번 주 중에 귀국한다고 했으니 아마 왔을 것이다.  

   

“봉목사, 네가 봄 같다. 봄차가 뭐야?”

반지하로 들어선 사람은 경희였다. 그녀도 오랜만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러 시골엘 다녀온다더니 거의 보름은 머물다 온 것 같았다. 과연 시골의 옛집에서 경희가 무슨 마음을 추슬렀는지는 모르지만 보기에는 좋아 보였다. 


“봉목사,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배웠는데 난 대륙성 기후 너무 싫어.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은 너무 덥고 습해. 이게 뭐니? 이쁜 옷 좀 입으려고 하면 대설주의보, 한파주의보. 아으! 싫어.”

그러나 경희는 겨자색의 실크 원피스에 은회색의 밍크를 두르고 있어 마치 눈밭의 고운 복수초 같았다. 


“너, 참 예쁘다 경희야.”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다는 말이 예상 밖이어서 경희는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봉숙은 조금 더 말라 있었다. 그 몸에서 더 마를 살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봄차는 이 과장이 붙인 이름이야. 말차에. 꽃차도 있어.”

봉숙의 목소리는 힘이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쳐서 늘어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경희는 봄차고 꽃차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곤 자신이 커피를 내렸다. 반지하에 퍼지는 향긋한 커피 향을 음미하듯 봉숙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일요일에 사람들은 오는 거야? 너 설교할 기운이나 있니? 김현준이라는 사람은 호주에 갔다며?”

연달아 질문을 하긴 했으나 어느 하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다 오고 있어. 엇박자로 오긴 하지만. 백 부장도 이 과장이랑 왔었고. 내가 무슨 설교를 해. 그저 말씀을 읽고 서로 나누는 거지. 김현준 씨는 아마 오늘 여기 오지 않을까?”

경희는 내린 커피를 손에 든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봉숙을 바라봤다. 


“내가 정상이란 걸 얘기하는 거야. 경희야. 걱정하지 마. 기운은 좀 달리지만 죽을 정도는 아냐.”


“봉목사, 사람들 반응이란 게 있잖아, 아무렇지 않아? 모두들.”

봉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경희를 보다가 살짝 웃었다. 볼주름이 깊게 파여서 누가 봐도 봉숙이 10년, 혹은 그 이상의 연상이었다. 


“너는 고향을 찾았니?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의 속도도 느리고 기운도 없어 보이는 봉숙은 그러나 아주 편안했다. 경희를 바라보는 눈빛만 맑고 고요했다. 경희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 자신을 향해 머리를 흔들었다. 


“네 말이 맞더라. 내가 형편없다는 것을 찾아가지고 왔어.”

풀 죽은 경희의 대답에 봉숙은 또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묻지도 않고 마주 보고 있던 둘은 또 웃었다.  

    

“집사님도 계셨네요.”

김현준이었다. 여행용 가방을 끌고 배낭을 진 그는 전에 없이 초췌했다. 김현준을 보자 봉숙은 천천히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는가 싶더니 현준을 가볍게 끌어안는 것을 보고 경희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경희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봉숙의 허그는 낯설었지만 포근했다. 둘은 마치 엄마와 아들이 만나는 장면 같았다. 언제부터 변한 것일까. 사람들과의 신체적인 접촉은 물론 마음의 연결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봉숙의 성향은 어디로 간 것일까. 봉숙의 남편이 생전에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따스한데 멀어요. 멀어서 따스함을 느끼기 어렵죠. 그래서 제가 좀 춥답니다.’


봉숙과 김현준은 선 채로 뭔가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았다. 귀 기울이면 들리련만 왠지 귀에 물이 찬 듯 멍멍했다 

한참을 떠들던 김현준은 기타를 찾아들고 노래할 준비를 했다. 


“집사님도 같이 하면 훨씬 좋을 것 같아요.”

경희는 봉숙을 바라봤지만 봉숙은 자리에 앉은 채 김현준을 보고 있었다. 


“지금 바로 귀국한 거 맞지? 완전히 뭐에 씌었구나. 제정신 같진 않아 보인다. 쟤 집에 보내야 하는 거 아냐?”

경희의 쏟아지는 말을 봉숙은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곧 기타 소리가 반지하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김현준은 노래를 하진 않았다. 


“난 일렉 기타는 정말 전기가 오는 것 같아. 찌릿찌릿.”

경희가 싫은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봉숙이 경희에게 뭐라고 했지만 기타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둘은 커피를 챙겨 흔들의자 쪽으로 옮겼다. 산책로는 때 아닌 자잘한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박은 땅에 닿기 전에 녹아 빗물처럼 되었지만 미처 녹지 못한 것은 희부연 얼음알갱이로 바닥에 모여 있었다. 


“녹을 때 같이 녹는 게 좋지. 저렇게 땅바닥에 모여 있다가 녹으면 나을까? 결국 녹는 건데.”

경희가 창밖을 내다보며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그 말소리가 희미해서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이혼하기로 했대. 아내는 이미 남친이 있고.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딸도 새아빠자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정리했대. 자기 불찰이라고 자책하고 있더라.”

봉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경희는 김현준과 박 집사를 스캔들로 오해했었던 일이 생각나 공연히 미안했다. 겉만 봐선 그런 어려움이 있는지 전혀 모르겠던데 사람의 일이란 게 참.

김현준의 기타 소리는 점점 커지고 거칠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잦아들었다. 


“이혼이란 게 얼마나 처절한 일인지 선화 보고 알았어. 아마 많이 힘들 거야. 우리가 위로가 되면 좋겠는데.”

조용해진 반지하를 향해 시선을 보내던 봉숙은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 봐야 하지 않을까?”

경희가 눈치를 보며 물었으나 봉숙은 고개를 저었다. 


“경희야, 기억나니? 떼제에 있던 어느 날 네가 느닷없이 찾아왔지. 나를 보고 한참을 울더니 가만히 안아줬어. 그 일이 질풍노도 속에서 방향 없던 나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평안이었어.”

경희는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떼제를 방문한 때라고는 봉숙을 처음 데리고 갔을 때뿐이었다. 물론 울며 헤어졌지만 다시 찾아간 일은 없었다. 봉숙의 기억이 오류를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포옹과 위로를 받았겠지. 그러나 중요하지 않았다. 봉숙이 경험한 것은 평안이었고 그것을 아마도 김현준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냥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김현준 씨는 괜찮을 거야. 오죽하면 공항에서 바로 왔겠니? 갈 데도,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거지. 마음이 갈 곳을 잃어버린 거야.” 

봉숙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아 경희는 말없이 식은 커피를 마셨다. 갈 데가 없다는 말에 문득 봉선화가 궁금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봉선화는 떠나기 며칠 전 경희를 만났고 방글라데시 의료 선교팀을 따라간다는 얘길 했다. 의사나 간호사도 아니었지만 사람들 줄 세워주고 의료진들 밥과 설거지를 해 주는 일도 필요하다고 하며 봉선화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가는 거야. 갈 데도 없고. 

분명 봉숙에게는 말도 없이 떠나는 것 같아 얘길 할까 했지만 봉선화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경희는 봉선화가 받을 급료 외에 항공료를 더해 건네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고 돌아오면 연락해라. 선교팀의 일정으로 보면 벌써 돌아왔을 텐데 아무 연락이 없는 봉선화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떠나기 전 봉선화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언니를 더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방글라에 혼자 남을 수도 있고.’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미국이나 유럽, 아니 베트남이나 필리핀도 아닌 방글라데시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봉선화 혼자 남는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소가 웃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은 정말 혼자 남아 있는 것일까? 봉선화의 성향 상 불편함과 지저분함을 못 참는 아이가 어떻게 견딘다는 걸까. 봉숙에게 지금이라도 얘길 해야 하나?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여튼 봉선화에 대한 아무 정보도 현재는 없었다. 

경희는 생각을 털어내고 봉숙을 보니 김현준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봉숙이 측은하기도 했고 마음 한편이 시리기도 했다. 너희 자매는 언제부터 엇나갔을까.  

   

“목사님, 우리 피자 먹을까요? 순댓국집이 프랜차이즈 피자집으로 바뀌었네요.”

한참 후에 김현준이 예의 밝고 철없는 목소리로 봉숙을 불렀다. 경희는 혀를 쯧쯧 찼다. 아니 오랜만에 왔으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먹고 싶지 않을까? 정말 특이하다.

그러나 봉숙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김현준에게로 갔다. 경희도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는데 김현준의 눈가가 붉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짠한 마음이 들어 거절하기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피자 조각을 들고 칙칙 늘어지는 치즈를 입 벌려 먹고 싶진 않았다. 


“그러지 말고 차로 조금 가면 잘하는 한정식 집이 있어요. 그리 갑시다. 내가 살 테니.”

갑자기 경희가 나서는 바람에 봉숙은 다소 놀라는 눈빛이었고 김현준은 거의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을 언제나 싫어하는 경희가 밥을 산다는 것이 너무나 의외였다.     

기와로 단장한 음식점은 예약이 필수라고 적혀 있었으나 경희는 눈짓으로 깊숙한 안채의 방 한 칸을 차지했다. 김현준이나 봉숙이나 별로 올 일이 없는 이 고급 음식점의 음식은 먹기도 전에 눈을 호강시켰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세 사람 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두 여자는 차치하고 먹성 좋은 김현준도 젓가락질이 시원치 않았다.

 

“동생님 생각이 나네요.”

갑자기 튀어나온 김현준의 말에 봉숙과 경희는 어이없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목사님 동생님 계실 때 위층에서 햄버거를 가져온 일이 있었어요. 그때 동생님이 그랬거든요. 이런 정크 말고 거한 한식으로 한 상 받아보면 좋겠다고. 엄마 돌아가시고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본 일이 없다고요.”

김현준이 맥없이 젓가락을 놓았다. 


“그게 언제 얘기예요?”

경희가 호기심 잔뜩 어린 눈으로 김현준을 응시하며 물었다.


“목사님 입원하시고 얼마 안 되어서죠. 그런데 이젠 안 오시나 봐요.”

김현준은 뭔가 잘못한 아이처럼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경희를 바라봤다. 그러나 경희는 동시에 봉숙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짝 감은 봉숙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김현준 씨 때문에라도 다시 올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지난 한참 후 독백하듯 나온 봉숙의 말에 경희와 김현준은 놀랐다. 


“동생이 김현준 씨 얘길 많이 했어요. 주로 기타나 찬양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 애가 타인에 대해 관심 갖고 얘기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아마도 그 관심이 동생을 다시 이곳으로 이끌 겁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의 김현준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 경희는 두 사람을 이끌고 찻집으로 향했다. 식사의 마지막은 그래도 커피지. 경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 세 사람은 비교적 유쾌한 상태에서 차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달빛이 어두운 그믐밤이었다.       

  

   



봄은 여전히 멀었다. 심상치 않은 꽃샘추위로 봉오리 진 꽃들은 그대로 얼어버릴 지경이었다. 봉숙은 패딩으로 몸을 감싼 채 반지하 입구에 앉아 있었다. 아직 햇살이 완전히 퍼지지 않아 공기는 스산했다. 그래도 바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칠판의 글씨를 적어 나갔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 속, 그래도 바람이 없어 다행인 오늘, 

따스한 차 한 잔으로 오늘을 누리십시오.>     


봉숙의 글씨 쓰기가 끝나자 바로 백 부장과 이 과장이 출근했다. 다른 때보다 좀 이른 시각임에도 백 부장이 나온 것을 보고 봉숙은 환히 웃었다. 늦지 않으셨군요. 

봉숙을 보자마자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가는 이 과장을 눈으로 좇으며 봉숙은 또 한 번 빙그레 웃었다. 처음으로 본 이 과장의 초록빛 치마가 검정 코트 밑으로 살짝 드러났다. 


“과장님, 예뻐요!”

이 과장에게 들리라고 크게 소리쳤지만 봉숙의 소리는 1층에도 닿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초록색 치마가 봉숙을 설레게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봉숙의 마음은 첫사랑의 소녀처럼 포근하고 달콤했다. 


“사모님,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정말인 줄 알아요.”

머뭇거리며 칠판의 글씨를 읽던 백 부장이 봉숙을 돌아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나 백 부장의 말투에 농담이 서려있어 같은 마음임을 알아차렸다.

 

“제가 말한 건 사실이구요. 부장님, 옆의 순댓국집 언제부터 피자집으로 바뀌었나요?”

봉숙이 다시 출근할 때부터 궁금했지만 딱히 물을 데가 없었다. 출근할 때는 문을 열기 전이었고 퇴근할 때도 별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집이었다. 장사를 하긴 하는 모양인데 저렇게 사람이 없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 저도 없는 때 개업했더라구요. 커피숍이 들어오네 샌드위치 가게가 들어오네 하더니 결국은 피자집으로 낙찰이 된 모양이에요. 거의 테이크아웃이던데요? 알바 애들만 둘이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해서 누가 주인인지도 몰라요.”

봉숙이 오늘 아침에도 피자집 앞을 어슬렁거리며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문은 꽁꽁 닫혀 있었다. 내부가 좁아서 테이블은 두 개뿐이었는데 그나마 구색 갖추느라 해놓은 게 분명했다. 가슴까지 오는 높이의 긴 테이블로 가게는 나뉘어 있었고 그곳에서 주문이 이루어지는지 키오스크가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순댓국집을 할 때는 꽤 규모가 있었기 때문에 긴 테이블 저편이 훨씬 넓을 터였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통통하던 순댓국집 사장과 어리고 작은 그의 아내가 생각났다. 


“궁금하세요? 제가 부동산에 듣기로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래요. 하여간 여자를 잘 만나야 되는데 그 사장이 욕심이 과했어요. 지 나이를 생각해서 늙수그레한 여자 만나 살았으면 또 알아요? 그런 변을 안 당했을는지. 같이 인도네시아로 출국했네. 요양원에 버려졌네 말도 많은데 알 수는 없죠. 참 인생이 별 거 아녜요.”

백 부장의 말을 듣다가 봉숙은 순댓국집이 폭력가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은 걸 얼른 참았다. 지금이야 없는 사람들이지만 백 부장에게까지 그들의 가정사를 물어 나를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사모님이 반지하에 오신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말씀은 안 드렸는데 순댓국집 부인이 좀 이상했어요. 한 번은 반지하 뒤편 산책로 쪽 입구에 어떤 젊은 남자와 있더라구요. 제가 보기에 같은 나라 사람 같았어요. 날이 추웠는데 여자는 일하다 나왔는지 앞치마 바람이었고 남자도 제대로 입은 건 아니었어요. 밤중이었고 제가 술에 취해서 그냥 지나쳤는데 봄에 그 남자를 한 번 더 봤거든요. 잠깐 만나고 서둘러 가는 모양새였어요.”

백 부장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오빠일 수도 있어요.”

봉숙의 말에 백 부장은 멈춰서 멀뚱하니 바라보다가 아,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라며 부지런히 올라갔다.

 


흔들의자로 돌아온 봉숙은 해바라기를 하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도 환한 빛은 쏟아져 들어와 마치 하얀 사막을 걷는 것 같았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순댓국집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확대되어서 멍든 얼굴과 팔이 드러났고, 곧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 인도네시아 남자가 여자를 감싸 안았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뚱뚱해서 달리는지 구르는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순댓국집 사장이었다. 사장은 젊은 남녀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지 그냥 지나쳤다. 흰모래바람이 사장을 덮었고 두 남녀도 덮었다. 흰 사막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고요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영상이 눈부셔 봉숙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지하 가운데에 선 남녀가 보였다. 누군가 확인하려 일어서는데 현기증이 났다. 순간 여자가 달려와 봉숙을 부축했다. 수진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수진에게 의지하여 걸음을 옮겨 보니 앳된 청년이었다. 봉숙을 부축하고 있는 수진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봉숙은 수진과 청년을 번갈아 보다가 입 속으로 작게 소리쳤다. 세상에. 둘은 누가 봐도 오누이였다. 수진의 약간 돌출된 큰 눈과 그 눈을 덮고 있는 긴 눈썹, 그리고 앙다문 듯한 얇은 입술까지 복사한 듯 똑같았다. 다만 청년의 각진 턱을 따라 구레나룻의 거뭇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키마저도 수진의 키를 겨우 넘을 것 같은 자그마한 청년이었다. 봉숙은 기억을 뒤적여 수진이 했던 말을 찾아냈다. 동생 이름이 영진이었고 군대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녀의 엄마가 수진을 영진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내심 화를 냈던 기억도 났다. 그렇다며 이 청년은 누구인가? 또 다른 형제가 있단 얘긴가.

봉숙은 수진의 부축을 벗어나 청년에게 손을 내밀어 앉으라고 했다. 


”목사님, 제 동생 영진이에요.”

비로소 봉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그렇다고 이전에 수진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꺼내 따지고 싶진 않았다. 더욱이 동생을 소개하는 수진의 표정은 밝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럴 때 표정을 숨기기가 얼마나 힘든지 봉숙은 어딘가로 숨어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수진이 네가 아픈 모양이구나. 아니면 과거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지. 그래도 그렇지 불과 1년 전의 일을 잊었다니..... 그 또한 아픈 증상이긴 하다만.’

봉숙의 시끄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생이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서 오래 병원에 있었대요. 그런데 저와 엄마는 몰랐고 할머니만 알고 계셨던 거죠.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 아마 알리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살지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1년을 있었다니까요. 그 후로도 거의 2년을 병원에서 지냈대요. 할머니 말씀이. 지금도 말하는 거나 행동에 좀 문제가 있긴 해요. 머리를 심하게 다쳤거든요.” 

그때야 봉숙은 숨을 편하게 내쉬었다. 그랬군. 다행이다. 

수진의 동생은 머리뿐만 아니라 팔도 다쳐서 지금 의수를 착용하고 있다고 했다. 지능이 많이 떨어져서 초등학생 정도의 이해도를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런데 목사님, 동생이 오니까 제가 너무 좋은 거예요.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러지 않으려구요. 제가 돌볼 수 있어요.”

수진이 눈을 반짝하며 하는 얘기를 들으며 봉숙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동생 봉선화가 왜 생각나는 것일까.


“누나, 배고파.”

갑자기 영진의 소리가 수진의 이야기를 끊었다. 영진의 목소리는 탁한 저음이어서 생김새와 너무 달랐다. 마치 그 안의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처럼 들렸다. 


“아, 그래. 영진아 조금만 기다려. 우리 가다가 맛있는 거 먹자.”

수진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영진은 출입문 쪽으로 가서 기다리고 앉았다. 마치 엄마를 조르는 어린 아들 같았다. 


“목사님께 제일 먼저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영진이. 결국 할머니도 제 의견을 따라 주셔서 함께 살게 되었어요. 주일날 영진이 데리고 와도 되죠?”

수진이 하는 말에서 떠나 공중에 넋을 놓고 있던 봉숙은 수진의 질문을 미처 듣지 못하고 물었다. 


“네?”

순간 수진의 당황한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렸다. 역시 이 목사님도 장애인을 피하는가 싶은 의구심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 미안 미안, 미안해요, 수진 씨. 내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나 봐요. 영진 씨가 같이 온다는 거죠? 잘 한 결정이에요. 저는 물론이고 모두들 환영할 거예요.”

그때서야 수진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영진은 출입문을 한 손으로 붙들고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수진은 일어서더니 흐트러진 영진의 머리를 가지런히 모아주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봉숙은 처음 수진을 만났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왔던 빵과 아무 말 없이 적어두고 간 메모와 그녀의 어머니 허 숙의 이야기들. 

당시의 수진이 회색빛이었다면 지금은 밝은 핑크빛이었다. 핏기 없이 창백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머릿속에만 머물렀던 생각들이 말의 모습을 갖춰 입술을 통해 발음되고 있었다. 수진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움은 생동감이었다. 


‘영진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엄마가 평생 편애했다는 동생 때문에? 그런데 그 동생이 회복할 수 없이 다쳐서?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일까?

봉숙이 머리를 갸웃한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수진이 다가왔다. 


“다 큰 영진이를 처음 보는데 불쌍한 생각만 들었어요. 다른 생각 하나도 안 들고 너무 불쌍해서 걔를 꼭 안아줬어요. 제가 불쌍한 처지였을 때 목사님이 저를 안아주신 것처럼요.”

봉숙은 불이 붙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웠다. 그때 수진은 너무 불쌍했기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안아주었었다. 그럼에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을 느꼈다니 포옹이란 얼마나 강렬한 몸의 언어인가.

잠시 후 수진은 영진을 챙겨 나가면서 봉숙을 향해 가볍게 외쳤다. 


“목사님, 이번 주일엔 케이크를 만들어오고 싶어요. 괜찮겠죠?”


“당연하죠. 그런데 무리하지 말아요.”

수진을 보내고 다시 흔들의자로 온 봉숙은 산책로를 향해 앉았다. 


‘불쌍하다...... 불쌍히 여기다......불쌍하게 보이다.’

수진이 한 말이 계속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나는 누구를 불쌍하게 여겼던가? 누가 나를 불쌍하게 보았던가?’

햇살이 따스하게 퍼지기 시작한 산책로 하늘가에 아직 피지 않은 산수유의 창백한 노란빛이 아련했다.      


     



그렇게도 망설이던 봄이 오고 산책로엔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물론 아직 날씨는 싸늘한 날이 많았고 사람들도 쉬이 겨울옷을 벗지 못했다. 봉숙도 마음과는 달리 추위를 견디지 못해 패딩을 걸친 채였다. 건물주는 두 번쯤 봉숙과 마주쳤는데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하영으로 이어진 바이어가 중동 사업을 더욱 확장시킨 것 같다는 백 부장의 전언이 그 웃음을 설명했다. 이하영은 한 번 들러서 큼직한 헌금을 했다. 달러도 아니었고 굳이 돌려주어야 할 이유도 없어서 봉숙은 김현준에게 넘겼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김현준이 재정을 맡고 있었다.  

    

  <산수유 꽃이 피니 누군가가 생각납니다.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온 예가체프 G1이 있습니다. 

   귀한 커피니 더욱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칠판을 내놓고 들어서려는데 백 부장이 불렀다.


“사모님, 누가 생각나세요? 목사님이요?”

봉숙은 여전히 시커먼 얼굴의 백 부장을 보고 웃었다. 알코올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그 또한 불쌍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이어가는 백 부장의 선택에 대해 굳이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도 일요일엔 자리를 제법 지켰고 이 과장이 안 올 때도 그는 왔다. 봉숙은 가끔 생각했다. 백 부장은 왜 오는 것일까? 


“아니요. 한재상 어르신이 생각나네요. 작년 산수유 필 무렵 처음 뵀거든요.”

백 부장은 뜻밖의 대답이라는 듯한 표정을 하곤 회사로 올라갔다. 백 부장이 늦은 걸 보니 이 과장은 진즉 출근했을 터였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왔으려나 갑자기 궁금해지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서 이 과장을 보고 올까 하다가 포기하고 봉숙은 혼자 웃었다. 


‘늙나 봐, 사람이 보고 싶으니.’ 

봉숙은 천천히 청소를 하고는 흔들의자로 갔다. 얼마 전부터는 걸레질은커녕 청소기로만 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나마 토요일엔 김현준과 박 집사가 와서 도와주어 다행이었다. 


“실례합니다.”

반지하에서 보통은 듣기 어려운 단어가 공간을 가로질러 봉숙에게 닿았다. 흔들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선 봉숙은 출입문 쪽에 서 있는 검은 실루엣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키가 껑충한 마른 남자인 것 같은데 초면인 게 분명했다. 봉숙이 머뭇거리며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자 실루엣이 한 발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30대 중반의 남자를 보면서 봉숙은 어디서 보았을까를 생각했다. 그만큼 낯익었으나 기억엔 없었다. 남자는 넥타이까지 검은색으로 하고 있어서 그 나이대의 패션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었다. 상복이라면 모를까.


“처음 오셨나요? 커피 한 잔 드리겠습니다. 앉으시죠.”

봉숙이 커피테이블로 걸어가서 커피를 갈아 내리는 동안 남자는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두 손마저 무릎에 모은 채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이 막 전학 온 초등학생 같았다. 

두 잔의 커피를 들고 남자 앞에 앉은 봉숙은 웃음으로 그의 경직을 풀어내려고 했다. 


“편안하게 드시고 가세요. 오래 계셔도 되구요.”

봉숙이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일어서서 흔들의자로 향하는데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들리는 저 소리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봉숙은 그대로 자신의 흔들의자로 갔다. ‘각각의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울고 싶으면 울다 가세요. 당신이 울 수 있는 장소가 이 반지하인 것이 나는 고맙습니다.’

흔들의자에서 커피를 마시며 첼로 곡을 손에 닿는 대로 틀었다. 제목을 보니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이었다. 봉숙도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첼로 연주면 다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곡이 끝나면 무슨 음악을 틀까 생각하며 다음 곡을 찾는데 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사모님은 여전하시네요.”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봉숙은 번개를 맞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어딜 나갔다가 혼비백산하며 다시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호?’

봉숙은 차마 일어서질 못하고 정신을 수습하느라 의자를 가볍게 흔들며 앉아 있었다. 작고 여린 삐걱거림이 규칙적으로 일었다. 10년 전에 헤어진 이호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설혹 이호를 만나면 못 알아보리라고는 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10년의 세월은 과거 이호의 모습을 말끔하게 지워낸 것 같았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호는 변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호가 아닐지도 몰라. 내 생각이 이상한 데로 흐른 거야.’

봉숙은 숨을 한바탕 몰아쉬고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가 조금씩 공간을 열어 숨을 트이게 했다.


‘이호라고 해도 그렇지. 내가 왜 그 애 때문에 숨이 막혀야 하지? 그럴 이유는 없는데.’

알 수 없는 질문을 해가며 남자에게 다가갔을 때 남자는 일어서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몸에 잘 맞지 않는 양복에 손때가 탄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봉숙은 남자 앞에 서서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봉숙이 기억하는 이호의 키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어요?”

봉숙은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목소리마저 허스키해져서 누가 보기에도 봉숙은 80대 같았다.

 

“사모님. 저는 금방 알아 뵀는데...... 제가 많이 변하긴 했네요.”

남자는 봉숙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리듯 말했다. 이런 말투도 이호의 것은 아니었다. 


“혹시 이호 아닌가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봉숙은 커다란 실례를 한 것 같았으나 말을 다시 담아 넣을 수도 없었다. 남자의 눈이 좀 더 크게 벌어지며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정말인가요?”

봉숙은 아직도 너무 이호스럽지 않은 남자에게 이호라고 부른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서 그러나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네가 이호란 말이지.


“이호 맞습니다. 사모님.”

봉숙의 머릿속으로 남편의 말이 지나갔다. 혹시 이호가 오게 되면 잘 맞아 줘.


“목사님이 오래전에 소천하셨단 소식도 들었고 사모님이 이곳에 개척하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주제가 이래서 차마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여전히 맞잡아 쥔 손은 거칠었고 선이 곱던 얼굴은 야윈 탓인지 나이 탓인지 굴곡이 심했다. 그런데 봉숙이 이호를 못 알아본 것과 마찬가지로 이호도 봉숙을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해야 했다. 봉숙도 얼마나 야위고 늙어버렸는가. 그런데 이호는 봉숙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산책로 건너편 비닐하우스 집단촌에 살아요. 매일 새벽 인력시장에서 팔려가길 기다리죠. 지방으로 갈 때는 며칠씩 못 오기도 하고, 와도 잠만 자고 또 일터에 가고 하면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늦었습니다. 그래도 강목사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는 쓰고 있어요. 그런데 전과자를 받아주는 데가 이런 일용직밖엔 없네요. 제 탓이죠. 강목사님이 많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을 만나니 제 설움이 북받치네요. 죄송합니다.”

이호는 한참을 울었다. 봉숙은 망연히 앉아 듣다가 티슈라도 가져다주어야겠다고 일어섰다.

아직 젊은 나이일 텐데 무슨 일을 겪어서 그리도 서러울까. 너 또한 불쌍한 인생을 살고 있구나 이호야. 그런 마음이 드니 가슴이 타는 듯했다. 과거에 이호에 대해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마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든 인생을 살고 있는 이 젊은이를 그때는 왜 이해하지 못했을까? 남편이 싸고돌아서 그랬을까? 남편의 성향은 본디 그랬는데 왜 그랬을까? 봉숙은 갑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제대로 사람 되려면 멀었구나 싶은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하필 왜 이 시점에 그것도 이호를 통해서 이런 자각이 드는 것일까? 그 또한 화나는 일이었으나 화를 내기에는 너무 열없었다. 

봉숙이 정신을 차리고 본 이호의 손가락은 왼손 검지가 없었다. 본래 그랬었나 기억을 더듬었으나 알 길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없다고 해도 드럼을 치는 데 어려움은 크지 않았을 테니 그때도 없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비어있는 왼손의 손가락 자리가 얼마나 허전하고 슬프던지 봉숙은 애써 외면했다. 치아를 하나 잃어도 상실감이 큰데 저 손가락은 얼마나 커다란 아픔으로 그 자리를 비워냈을까.      

봉숙이 티슈를 가지고 이호에게 갔을 때 이호는 일어서서 깍듯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제 아버지를 만나 주셔서요. 아주 가끔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사모님 얘길 하셨어요. 지금 장례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느닷없는 인사에 봉숙은 얼떨떨했지만 콱 짚이는 데가 있었다. 


“이호, 혹시 성이?”

그저 이호로만 알고 있었다. 성이 이 씨인지 아닌지 생각하거나 따져보지 않았다. 


“한재상 씨의 아들 한이호입니다. 사모님.”

이호는 다시 한번 깊숙이 숙인 인사를 하곤 떠나갔다. 봉숙이 허락하면 쉬는 일요일엔 교회에 오겠다는 얘길 했지만 꿈인 듯 아득했다. 


봉숙은 흔들의자로 와 창턱에 기댄 채 밖을 바라봤다. 창백한 노란 꽃 산수유가 바람에 한 번씩 휘날렸다. 저 깊은 곳에서 용트림하듯 슬픔이 올라왔다. 아이 씨, 슬픈 것이 화가 나 입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눈물이 계속해서 뺨으로 흘렀다. 

     

훌쩍 커버린 황금 고양이가 창문 앞을 지나다가 돌이켜 봉숙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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