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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13. 연기 속의 가죽부대

이호가 다녀간 후 봉숙은 꿈을 자주 꾸었다. 대개는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고 꿈을 꾸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런데 잠을 자고나도 개운하지 않은 것은 꿈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안개 낀 듯 흐릿한데 잠을 망치고 나면 하루 종일 머리가 무거웠다. 그러니 반지하에서 조는 일이 다반사였다. 책을 좀 보려고 하면 눈꺼풀이 내려오고 어느새 팔에 묻혀서 10분, 20분을 자고 나면 그렇잖아도 주름진 얼굴에 새로운 주름이 하나씩 더 늘어 있곤 했다. 그러면 봉숙은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고 한 번씩 웃었다. 며칠 전에는 화장실에서 우연히 이 과장을 만나서 민망한 얼굴을 들켜버렸다.  

    

“주름이 더 생기면 어떤가 궁금해서요.”

봉숙의 말에 이 과장은 웃지도 않고 걱정을 했다. 목사님, 여전히 못 주무시나 봐요?


지난주 반지하 모임에서 꿈을 많이 꾸는 까닭에 잠이 다양해졌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사람들도 봉숙만큼 꿈을 많이 꾸고 있었다. 아니, 꿈에 시달린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김현준 같은 경우는 이혼 후 꿈이 많아졌다고 해서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꿈을 많이 꾼다는 것과 꿈이 많아졌다고 하는 말의 뉘앙스는 이다지도 다른가. 

봉숙은 청소를 마치고 칠판을 밖에 내놓았다.   

   

< 오늘은 두 나라 커피콩을 사이좋게 볶은 것이랍니다. 

특별한 로스터가 만들어 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얼마 전에 이하영이 가져다준 블렌딩 커피였다. 분명히 맛있는 거니까 목사님 혼자 드시라고 부탁했었다. 이하영의 얼굴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귀여운 여자야.      

몇 개 안 되는 반지하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봉숙은 힘에 부치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빠졌는지 알 수 없었다. 살이 빠진 것과 힘이 빠진 것이 똑같진 않았다. 경희가 보약을 보낸다고 해서 잔소리로 막았는데 그걸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머리를 흔들며 흔들의자로 와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까무룩 잠에 빠졌다.  


    

장소가 분명하진 않았으나 모래바람 부는 사막 같았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안에 모여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자루였다. 과거에 유목민들이 물이나 술을 담을 때 사용하던 가죽으로 만든 자루였다. 봉숙은 실제로 그런 가죽 부대를 본 적이 없었지만 봤던 것처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가죽 부대는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망가져서 사용하기 어려워 보였다. 가만 보니 불이 피워졌던 흔적이 있고 연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봉숙은 순간 손을 뻗어 연기 속에서 가죽 부대를 꺼내려고 했다. 뜨거움에 대한 공포보다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른 손이 봉숙의 손을 밀쳐내고 가죽 부대를 끄집어 당겼다. 


“하나도 못 써. 연기 속에 있던 것은.”

저 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봉숙은 얼굴을 들어 소리 나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영화인지 꿈인지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넋 놓고 있던 봉숙이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하, 이게 뭐야......”

봉숙의 한숨에 다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연기 속에 있던 가죽 부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버려야 돼.”

봉숙은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다. 한재상이야!


“영감님, 돌아가신 것 아녜요? 지금 놀리시나요?”

반갑기도 했지만 화가 바짝 났다. 저 영감은 왜 늘 저렇게 얘기하는 거야.


“잘 봐. 저 가죽 부대.”

소리는 그저 봉숙에게 명령했다. 


“저게 목사야, 아무 쓸모없는 저게. 알아?”      

더욱더 화가 난 봉숙은 소리를 향해 벌떡 일어섰다. 얘기 좀 합시다 영감님,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그러나 현기증과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흔들의자가 오랜만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다행히 가벼워진 몸무게 탓으로 슬쩍 미끄러졌을 뿐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주저앉은 자세로 생각에 잠긴 봉숙을 깨운 것은 경희의 놀라는 목소리였다.



“골다공증 약 먹어야 한다니까. 일어날 수 있어? 부러진 건 아냐?”

언제 들어왔는지 경희가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와 있었다. 봉숙은 경희를 한 번 쳐다보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끄응하는 가벼운 신음이 나오긴 했으나 다시 자리 잡고 앉는 봉숙을 본 경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게 자주 넘어지는 애가 약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어쩌자는 거니?”

경희의 잔소리에 봉숙은 멍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경희야. 내가 가죽 부대래. 연기 속에 놓인, 아무 쓸모없는.”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한재상. 그분 소리였어.”

경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봉숙의 이마를 짚었다. 죽었다며, 한재상?


“꿈을 꾼 거겠지? 내가 졸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왜 하필 그 소리일까? 약을 바짝 올리는 것도 똑같고, 내가 한심하다고 욕하는 것도 똑같애. 정말 한재상일까?”

허공을 향해 말하는 봉숙을 보며 경희는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또 아픈 걸까?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네가 그 영감님을 생각했던 모양이지. 악연도 인연이라고 그 영감이 말도 없이 죽었으니 그랬을 거야. 하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뭐 어쩌겠니. 마음에서 털어 내.”

경희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봉숙을 토닥였다. 그러나 봉숙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에 머문 채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내가 아무 쓸모없는 가죽 부대라는 게 쇼크였어. 내가 그 정도니?”

경희는 봉숙이 가여워졌다. 그런 말에 상처를 입다니. 한재상은 늘 떠들었다. 인생이 풀이고 연기고 먼지고 안개니 어쩌고 하면서 아무 쓸데없고 하릴없는 것이라고. 그런데 거기다 가죽 부댄지 뭔지 하나가 더해졌다고 뭐가 다르니? 그 영감의 화법이건만.


“신경 쓰지 마. 그 영감태기가 죽어서도 괘씸한 소리를 하는구나 생각해.”

그러나 봉숙은 경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서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경희는 말없이 있었다. 밖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봉숙의 침묵이 길어지자 경희는 나가서 남편을 보내버렸다. 내 친구가 힘들어해. 혼자 다녀오면 안 될까? 

경기도 북쪽의 요양병원 부지를 보러 가는 길이었고 남편은 아주 오랜만에 경희의 동행을 원했다. 바람도 쐬고 올 겸 한 번 가지? 하던 남편은 다음에 가자고 하며 돌아갔다. 봉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았는데 그것이 고마웠다. 

남편을 보내고 들어오자 봉숙은 사무실 노트북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경희는 다시 커피테이블로 돌아가 커피를 내렸다. 봉숙이 칠판에 써놓았던 것처럼 독특한 향이 반지하를 채웠다. 풀잎 냄새와 과일향이 섞인 신선함은 경희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내린 커피를 맛보던 경희는 흡족한 얼굴로 봉숙에게 한 잔을 내밀었다. 


“정말 스페셜 커피네. 누가 가져왔어?”

봉숙은 경희에게 아무 대답 없이 노트북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네 군데 창으로 각각 다른 언어가 띄워져 있었다. 경희는 설교를 준비하는가 보다 하며 뒤로 물러나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이거였어.”

봉숙의 혼잣말이었지만 경희는 어깨너머로 화면을 보았다. 그림과 사진이 여러 장 있었는데 봉숙이 말한 가죽 부대인 것 같았다. 


“그게 뭔데? 그렇게 집중해? 요즘은 쓰지도 않는 거잖아.”

봉숙의 상태가 심각하게 생각되어 경희는 짐짓 하찮은 이야기처럼 흘렸다. 그러나 봉숙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처음 화면을 띄우고 말했다.


“말씀을 찾았어. 시편 119편에 있더라고 83절에.”

경희는 안심했다. 성경을 보고 있었다면 다행이지. 


“아, 그래? 그런데 넌 목사가 성경에 있는 걸 이제 알았어? 한재상도 알고 있는 거라며?”

다소 농담을 실어 반문했지만 봉숙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 맛난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미안, 목사가 성경 구석구석까지 알 수는 없겠지. 미안. 그런데 하필 가죽 부대야?”

경희의 말에 봉숙은 드디어 엷은 미소를 띠며 커피잔을 들었다. 


“경희야, 가죽 부대가 아니라 연기 속의 가죽 부대야. 무슨 뜻일까? 한재상 영감님이 말한 대로야. 아무 쓸데가 없는 거야. 어디에도 쓸데없는, 버려야 되는 거지.” 

경희는 입을 다물었다. 저러다가 또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아무 쓸데없는 잉여인간인데 살면 뭐 해? 라던 언젠가의 봉숙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말없이 남은 커피를 마시는데 봉숙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경희야, 이어지는 구절이 있어. 여기 와서 봐.” 

    

* <나 비록 연기 속의 가죽 부대처럼 되었사오나 나는 당신의 뜻을 잊지 않으리이다.>


“한재상 영감님이 내 존재를 확실히 알려준 건 사실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죽 부대. 그런데 잘 봐. ‘되었사오나’는 ‘되었습니다. 그러나’의 합성어잖아. 내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거였어.”

봉숙은 감격한 듯 눈을 감았다. 경희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한재상 영감이 뭔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준 것은 확실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봉숙이 목사의 길을 계속 갈 모양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또 갑갑해졌다. 저 몸으로 어떻게.

경희는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섰다. 봉숙이 라일라, 아니 이하영이 가져다준 커피라며 특별한 맛이지 않냐는 말을 해서 경희는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제정신이네.     

봉숙은 노트북 앞을 떠나 산책로로 나갔다. 따스하게 달구어진 남풍이 새잎이 나기 시작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포근한 공기 속에 얼굴을 내밀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머리에 노란 꽃잎을 얹은 노인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산수유나무 위로 날아가던 새가 흰 똥을 바닥에 뿌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시편 119:83 공동번역          




          



장마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고 날씨는 꾸준히 흐렸다.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참았던지 내리는 비의 양은 제법 많았다. 비가 내리는 날은 대개 경희가 왔다. 아마도 비 내리던 날 남편을 보냈던 봉숙을 위로하고자 함이 컸을 테지만 사실 봉숙은 그다지 비에 괘념치 않았다. 그래도 경희의 방문이 봉숙의 마음을 기쁘게 했고 경희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경희가 사 온 브런치를 함께 먹다가 봉숙은 가끔 멈췄다. 마치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이 불편하다며 커피만 조금씩 마시곤 했다. 그런 모습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경희는 내색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는 것이 무슨 커다란 잘못인 것처럼 봉숙은 질겁했다.   

   

“이 나이면 언제 죽어도 괜찮은 거 너나 나나 알잖아? 앞으로도 병원 갈 일은 없을 거야.”

얼마 전에도 비슷한 증상을 보여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또 병원 얘길 할 수는 없었다. 봉숙의 이상 상태가 조금이라도 감지되어 경희가 긴장하는 기색이 보이면 봉숙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곤 했다. 그냥 그런 거야. 나이 들면. 

한참 만에 브런치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산책로 쪽의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났다.   

   

“언니, 있어요?”

2년 만에 듣는 봉선화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돌아앉은 두 사람 앞에 여전한 밤송이머리의 봉선화가 멀쩡히 서 있었다. 손에 들린 분홍색 우산에서 빗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 우산 좀 꽂고 와. 봉선화보다 우산의 빗물에 신경 쓰인 경희가 보자마자 소리치자 봉선화는 움찔했다. 


“와, 환영인사 한번 대박이다. 알았어.”

우산꽂이를 찾느라 다시 밖으로 나간 봉선화가 빈손을 털며 퉁탕거리고 들어왔다. 봉숙의 반응이 무덤덤한 데 반해 경희는 화가 치민 얼굴이었다. 봉선화는 어제 만난 듯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앉았다. 언니, 나도 커피 한 잔 줘.

봉숙이 일어나려고 하자 경희가 봉숙을 눌러 앉히곤 자신이 커피를 내리러 갔다. 


“좋다. 언제나, 커피 향기는.”

가만히 바라본 봉선화는 이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머리는 여전히 삭발에서 조금 자란 밤송이 모양새였지만 귀에는 피어싱이 3개쯤 있었고 색깔도 요란했다. 이전처럼 강한 화장이 아닌 부드러운 화장으로 전체적인 느낌이 모던하고 경쾌했다. 옷도 검은색 롱 남방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어서 훨씬 어려 보이기도 했다.      

‘출가를 한 것은 아닌 모양이네.’

커피를 내려 들고 온 경희가 봉선화를 훑어보며 눈으로 얘기했다. 봉숙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얼른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은 것은 마치 이전에 말을 안 할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 기다렸다.   

   

“어디서 오는 길이니? 소식 없이 해를 두 번이나 넘기더니, 건강은 괜찮은 거야?”

봉숙 대신 경희가 한 질문이 고마웠다. 너는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봉선화는 아무 말이 없는 봉숙을 일별 하곤 경희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달에 인도에서 왔어. 찬이 만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언니한테.”

봉선화의 입에서 찬이란 말이 나오자 봉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무슨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이 입매가 씰룩였다. 그러나 다시 잠잠해지곤 봉선화를 그윽이 바라봤다. 내 아들 찬이 소식을 네가 들고 왔구나. 그 아이는 잘 지내니?      

경희는 봉선화의 손을 붙들고 사정하듯이 말을 건넸다. 자세히 좀 얘기해 봐. 

     

“방글라데시에서 한 1년 지내면서 덴탈 닥터를 만났어. 처음 왔던 선교팀에 있던 사람인데 또 왔더라고. 그 사람하고 인도 여행을 갔는데 갠지스 강변에서 웬 미친놈을 만난 거야. 거기가 힌두교 천지잖아? 하긴 뭐 힌두교라고 해도 별 잡신들이 다 모여드는 데가 거기긴 하지만. 하여튼 강변에서 몇 사람이 앉아서 노래를 하는데 뭔가 익숙한 거야. 힌디어인 것 같은데 곡조가 알 것 같더라니까. 내가 놀란 게 뭔지 알아?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들의 인도자가 찬이었어. 내 조카 강 찬.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니까.”     

봉선화가 숨도 안 쉬고 말을 해대는 통에 경희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고 봉숙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인지 콧물인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처음엔 긴가 민가 했지. 엉긴 머리가 거의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어. 찬이 걔가 한 인물 하잖아? 그런데도 씻질 못한 건지 하여간 더러운 얼굴에다가 입가에 거품만 허옇게 묻혀가며 얘길 하더라고. 비쩍 마르기도 했더라. 내가 고모인 것을 짐작도 못할 것 같아 그 모임이 끝나길 기다려 걔를 불렀지. ‘찬이구나 강 찬.’ 그러니까 찬이가 날 금방 알아보곤 반갑게 맞더라니까. 외려 내가 깜짝 놀랐어. 핏줄이란 게 참 무섭더라. 하여간 걔는 거기서 그렇게 살고 있어. 미국인 선교사와 협력 사역을 한다고 하더라고. 벌써 5년째라던가. 그런데 더 놀란 게 뭔지 알아? 걔가 언니 근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 미국에 있는 민이랑 연락을 하고 지낸 모양이야. 참 언니만큼 독한 애들이지? 아들이고 딸이고 지들끼리만 연락하고 엄마는 나 몰라라 하고 있었으니 말야.”

목이 마른 봉선화는 잠시 쉬더니 스스로 카페 테이블로 가서 커피를 리필해서 왔다. 그때서야 봉숙이 입을 열었다. 


“민이는 연락이 닿았었어. 내가 테제에 있을 때 한 번 오기도 했고.”

봉숙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뭔가 어떤 흔적이 있긴 했는데 그게 딸인지는 몰랐지. 민이가 잘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얘기를 들은 봉선화는 그런 사실을 내색도 하지 않았다고 화를 벌컥 냈다.  

    

“선화야, 너희 자매가 언제 조곤조곤 얘기할 관계였니? 너보다 가까운 나도 몰랐는데. 그래도 언니라고 소식 전하러 온 걸 보니 다행이다.”

경희의 말에 봉선화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그래 자매라고 하기엔 너무 멀었지. 언니나 나나.


“어쨌든 너희 집안은 글로벌이구나. 딸은 미국에, 아들은 인도에, 그런데 동생은 어디에 있나?”

짐짓 장난스러운 경희의 말에 봉선화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어디는, 여기 한국에 있잖아.”

봉선화가 멋쩍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봉숙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젠 안 떠날 거니? 선화야. 너한테 너무 미안한 것도 많고 할 얘기도 많은데 그게 쉽지 않구나.”

봉숙의 느린 말을 기다려 듣던 봉선화는 봉숙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니, 난 또 갈 거야. 내 남자한테. 그 남자가 자주 한국을 떠나더라고.”

봉선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두 여자는 동시에 물었다.


“누구?”

봉선화는 씨익 웃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 덴탈 닥터. 태릉 쪽에 병원 있어. 자주 의료 선교를 나가거든. 나랑 딱 맞는 것 같애.”

봉선화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희가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너 결혼할 때도 너랑 딱 맞는다고 했어. 불과 얼마 만에 이혼했는지 잊었니?

그러나 봉숙은 봉선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자 봉선화가 괜찮다는 눈빛으로 기다렸다. 


“선화야. 네가 돌아온 것 같다. 처음의 네 모습으로.”

봉숙의 이야기에 경희는 의문에 찬 눈을 커다랗게 떴고 봉선화는 울컥하는 표정이었다. 셋 사이에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언니, 김현준 씨는 잘 지내지? 그 남자가 교회를 성실하게 섬길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구박은 좀 했지만.”

느닷없는 김현준 얘기에 봉숙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에 그가 있긴 있었구나. 


“그리고 박 집산가 그 아줌마도 여전해? 빵 가져오던 애는? 노인네는?” 

봉선화는 마치 오랫동안 지내왔던 사람의 안부를 묻듯 반지하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며 물었다. 백 부장과 이 과장도, 또 라일라라는 여자도 어떤지를 세세히 물었다. 


“봉선화 돌아왔네. 맞다. 봉목사. 제대로 왔어, 이제야.”

경희가 봉선화를 보며 안심한 표정으로 말하자 봉숙은 봉선화를 끌어안았다. 순간 움칠하던 봉선화는 봉숙에게 안겨 한동안 울음을 삼켰다. 너를 이렇게 돌아오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장난처럼 얘기했지만 덴탈 닥터를 통해서 나를 봤어. 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형부와 너무 닮은 사람이야. 성품이나 신앙이.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바꾸더라고. 그 배후에 물론 불가항력의 힘이 있다는 걸 알았고. 모든 게 내 생각과는 달리 갔는데 그게 맞는 길이었다는 걸 이제 알아.”

서로 끌어안은 자매를 경희가 겉에서 둘러 안았다.   

   

“참 많이 돌아서 왔네. 우리 동생.”

 한 덩어리로 잠시 있던 세 사람은 다시 흩어져 앉았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셋은 그 비를 나란히 바라보았다. 비 사이로 목소리들이 흘러 다녔다.  

    

숙아, 사람들은 서로 물들어가며 사는 거야. 관계 속에서.

이호와 그냥 같이 있어줬어. 

목사님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여기 오면 편안하다니까요. 

영진이가 불쌍해서 안아줬어요. 

목사님, 왜 그렇게 말랐어요? 

목사, 그냥 그 자리에 있어. 거기 그렇게.      


     



반지하에 자리 잡고 난 후 벌써 네 번째 봄이 지나고 있었다. 지난 4년이 40년인 것 같기도 하고 나흘인 것 같기도 했다. 사람만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낸다는 말이 실감 나는 나날이었다. 계절은 온난화 탓인지 개나리며 진달래며 목련이 순서도 없이 뒤섞여 피어나고 있었다. 따뜻한 어디선가는 벚꽃소식도 있었고 숨죽이며 봉오리를 터뜨린 철없는 철쭉마저 몇 송이가 보였다. 날씨는 더웠다가 서늘했다가 여름이었다가 봄이었으며 이따금 초겨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적응이 된 듯 그저 무반응이었다. 하긴 반응한다고 해서 날씨가 이전 스케줄을 잡아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세상은 여러 가지로 뒤죽박죽인 채로 흘러갔고 반지하도 그런 세월과 무관하지 않았다. 

     

수진은 영진을 데리고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지하에서 차로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경기도 외곽이었다. 수진의 집은 병원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작은 빌라였다. 수진은 할머니와 살았고 영진이 있는 병원에 매일 출근했다. 그녀는 매일 저녁 봉숙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때때로 과일청이나 잼을 보내기도 했다. 

백 부장은 알코올 병원을 마실 가듯 들락거렸다. 중동 컴퍼니의 일을 더는 할 수 없어 그만두었으나 때때로 아들이 함께 와서 반지하에 머물다 가곤 했다. 아마도 백 부장이 원해서였겠지만 그 모습이 봉숙에게는 아픔이었다. 곧 죽을 것 같아. 


이 과장은 드럼을 치러 토요일마다 들렀고 자연스럽게 김현준과 세션을 이루었다. 점점 더 예쁜 옷을 챙겨 입고 화장도 하기 시작해서 봉숙을 즐겁게 했다. 어쩌다 백 부장이 오는 토요일엔 김현준이 트로트를 연주하곤 했는데 이 과장은 싫어하는 기색을 하면서도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박 집사, 아니 박혜영은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예배에 왔으며 그때마다 김현준이 계단에서 그를 업어 날랐다. 수진의 빵을 어느 시점부터 박 집사가 대신하고 있어서 반지하에는 빵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지나가던 젊은 여자가 반지하를 기웃거리더니 반주를 해주겠다고 들어섰다. 신흥종교에서 발을 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들 긴장을 했지만 그녀는 제법 신실해 보였다. 반주 실력은 기본적인 코드를 잡는 정도였으나 키보드를 맡아 주니 훨씬 안정적인 세션이 되었다. 김영빈이란 남자 이름을 가진 그 여자는 자신의 남편과 어린 딸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그러나 또래가 없는 남편과 딸이 얼마나 버텨줄지는 봉숙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봉숙은 김영빈의 어린 딸을 위해 근처에 있는 대형교회 어린이예배를 소개했다. 김영빈의 남편은 딸을 그곳에 데려다주고 자신은 다시 반지하로 왔다. 봉숙은 김영빈에게 가족이 다 딸의 교회로 가도 괜찮다고 말을 했는데 김영빈은 섭섭해했다. 자신이 이단에 있다가 와서 그러느냐고 하는 바람에 봉숙은 놀라서 단호하게 제의를 거둬들여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거의 졸다가 갔다. 많이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 봉숙은 그가 애써 오는 것이 안쓰러웠다. 이호도 교도소 동기를 데려왔는데 백 부장이 대놓고 싫어했다. 그러나 이호의 남자는 내색 없이 지냈고 특히 백 부장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은 꽤 활기차서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백 부장을 병원에 계속 처박아 놓을 수도 없고 이호의 남자를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는데 둘은 절묘하게 시간을 비껴가곤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일라는 거의 두 달에 한 번 정도 들렀는데 김현준이 라일라 씨라고 불러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난, 이하영이에요. 그 이후로 김현준은 라일라를 어떻게도 부르지 않았다. 


그럭저럭 오가는 사람들까지 하면 대략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반지하에 고정적으로 모이곤 했다. 때로 봉선화가 남편인 신실한 덴탈 닥터와 같이 오기도 했다. 경희는 봉선화가 재주도 좋다고 비아냥대기는 하면서도 봉선화의 새 삶을 기뻐했다.

      

가장 수선스러웠던 일은 경희의 건물 인수였다. 경희는 이전의 순댓국집에 자리 잡은 피자집에 눈독을 들이더니 결국은 그 4층 건물을 통째로 사버렸다. 물론 그의 남편이 하려던 요양병원을 포기시킨 결과였다. 경희가 내건 1층 카페의 이름은 ‘EL’이었다. 


“엘? 무슨 뜻이죠?”

김현준의 질문에 경희는 쳐다보지도 않고 봉숙에게 물으라고 했다.

 

“엘? 하나님?”

봉숙이 느리게 대답했지만 경희는 피시식 웃었다. 


“아니, 목사님 하시는 말씀 하곤. 하나님을 무슨 카페이름으로 씁니까? 그게 아니고 설명하자면 ‘Eternal Love’의 이니셜을 딴 거예요.”

사람들은 키드득 대고 웃었다. 영원불멸한 사랑이요? 집사님과 안 어울려요. 간지러워서.

봉숙도 싱겁다는 듯 빙그레 웃고는 말았다. 그러자 경희는 특유의 낮고 부드러우나 깔끔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겨야 할 거 아녜요. 여름마다 물난리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일이고, 무엇보다 주야장천 반지하에 있는 목사님 건강이 나빠져서 안 되겠어요. 그래서 풀잎교회를 지상에 준비해 놓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카페 이름은 뭐, 여기 산수유나무가 많잖아요. ‘영원불멸의 사랑’은 산수유 꽃의 꽃말이에요.”

그러자 빵을 먹던 김현준이 동작을 멈추고 진정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여긴 철쭉이 더 많은데. 아닌가? 그럼 그냥 산수유 카페라고 하시지.”

경희는 샐쭉해진 눈으로 김현준을 바라보았으나 그 시선에 미움이 없었다.


“김현준 씨,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닌데, 산수유 카페라고 하면 무슨 도립공원 카페 이름 같지 않나요? 왜, 이엘카페가 이상해요?”

경희가 정색을 하고 묻자 사람들은 와! 하며 김현준에게 웃음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응, 그렇구나. 이엘카페 이름 참 예쁘네요.” 

김현준은 머쓱해하며 그러나 경쾌한 소리로 축하하듯 말했다. 사람들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봉숙은 그윽한 눈빛으로 경희를 바라봤다. 경희도 마주 보며 가볍게 눈으로 웃었다. 누구도 그들의 말없는 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봉숙은 나날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지만 그녀의 살아있는 눈동자와 포근하며 힘 있는 포옹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봉숙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그들과 얼마나 머물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면서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봉숙의 건강에 대한 언급은 피차 삼가는 분위기여서 자신이 죽는 날을 안다면 속 시원히 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격의가 없었고 맘대로 반지하를 드나들었으며 머물거나 노래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다 갔다. 반지하에는 언제나 봉숙이 있었다. 

봉숙은 반지하 사람들의 형편을 일일이 메모했고 일정한 시간을 정해 흔들의자에서 한 명씩 이름을 불러 기도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 사람으로 가득 차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기가 어려웠다. 이름이 주는 의미와 그 무게는 봉숙이 익히 경험했던 것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더욱이 한자가 품고 있는 뜻이 이름에 들어 있기 때문에 봉숙은 한자를 반드시 물어봤다. 경희의 경우도 그랬다. 경희는 언제나 그냥 경희였다. 그런데 경사 ‘경’에 기쁠 ‘희’라는 것을 듣고는 웃었다. 경희 너는 더블 기쁨, 곱빼기 기쁨이네. 그래서 너는 늘 기쁨이 되었구나. 앞으로도 넘치는 기쁨이길 바라. 

경희뿐만 아니라 모두의 이름에는 온갖 좋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이름으로 불려지는 그들의 삶에 부모의 심정으로 축복을 소복이 얹고 싶었다. 그것이 쇠약한 봉숙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남편이 처음 지었던 이름 ‘풀잎 위의 이슬 교회’를 기꺼워하지 않았음이 기억나 미안했다. 남편 또한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아 선택한 이름이었을까. 그러나 그 긴 이름을 그저 ‘풀잎’으로 단순화시킨 자신의 의도도 남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풀잎이 시들면 건초가 되고 건초는 땅으로 돌아가 새로운 풀잎이 되고 그 풀잎은 건초가 되어 다시 땅으로 가 또 다른 풀잎이 되고...... 이 기적 같은 평범함이 멋지지 않아?’       

봉숙은 몸을 일으켜 초록색 마커로 글을 적어 나갔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유난히 힘겨운 오늘, 그러나 기쁘게 글을 완성했다.   


   

<봄이 지나고 있습니다. 

 꽃이 꽃말을 가졌듯 

 풀잎 같은 우리도 이름으로 만나 

 그 각별함과 따스함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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