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인듯 Apr 27. 2024

11. 콜로이드

경희는 매일 봉숙의 집을 드나들었다. 봉숙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반지하에는 계속 봉선화가 출근했다. 


“심심하진 않더라고. 김현준인지 뭔지 토요일마다 오잖아. 또 위층 여자가 점심 가지고 내려오기도 하고. 걔도 참 특이하더라. 말은 안 하고 도망치듯 올라가. 박 집사라는 여자는 내가 퇴근하면 왔다 가는 것 같아. 아침에 가면 뭔가 좀 더 정리된 느낌이던데 그 여자 아니면 누구겠어? 천 원 수금하러 오는 노인네들도 있는데 한 달에 한 번만 온다나? 뻔뻔하기가 챔피언급이야. 어제는 불량한 애들이 지나가다가 빵 없냐고 물어보는데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참았지. 그리고 커피 마시러 왔다고 수작하는 놈팡이도 있고. 명색이 교회인데 어떻게 그러지? 하여튼 가난하고 험한 사람들이 드나들어. 그리고 주일날은 여전히 몇 명이 모여서 영상으로 예배하는 것 같더라고. 내가 안 봐서 모르지만 어쨌든 흔적이 있었어. 참 이상한 곳에 이상한 사람들이야.” 

봉선화가 들려주는 반지하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희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봉숙이 있었을 때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반지하를 계속 열어놓고 있었을까. 


“혹시 할아버지 한 분 오시지 않았어? 키가 자그마하고 좀 독특해. 머리를 길러 묶었는데.”

경희는 은근히 한재상이 궁금했다. 죽지 않았다면 한 번쯤은 들렀을 텐데 싶었다. 


“아, 재수탱이 영감. 정말 보다 보다 그런 영감 처음이야. 언니도 아는구나. 처음엔 들어와서 목사 없어? 그러더라고. 말버르장머린 고사하고 냄새가 청국장 집은 저리 가라야. 누구시냐 그랬더니 나를 싹 훑어보곤 혀를 쯧쯧 차. 기가 막혀서. 목사님 동생이라고 했더니 얼마나 크게 웃는지 알아? 그러더니 대책 없는 아줌마네, 속 좀 터지겠어 목사가. 그러고 휭 가버렸어.”

봉선화는 울화가 치민 듯 떠들었지만 경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한재상과 봉선화의 그림이 그려지면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한재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반갑기까지는 아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한재상에게 신경이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니, 언니도 이상하지? 내가 볼 때 그 반지하는 총체적인 수상함이야. 뭔가 밀교의 느낌이 나지 않아?”

경희는 봉선화의 제법 자란 밤송이머리를 툭 때리며 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별말 없이 반지하로 출근해 주는 봉선화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봉숙은 변화가 없었다. 퇴원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이 없었고 잠에 빠져 있는 때가 잦았다. 여윈 몸에 살이 오르지도 않았지만 더 쇠약해지지도 않았다. 

눈이 쏟아질 듯 잔뜩 찌푸린 화요일 오후, 경희는 무거운 마음으로 봉숙의 아파트를 향했다. 마치 자라지 않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중압감 같은 것이 그녀를 눌렀다. 

여느 때와 같이 번호를 눌러 문을 여는데 커피 향이 감돌았다. 늦잠꾸러기 봉선화가 어쩌려고 커피를 내려놓고 출근했나 하며 현관 옆 주방 테이블을 보니 봉숙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왔어? 이리 와. 커피 한 잔 하게.”

너무나 태연하게, 마치 어제도 그제도 얘기하고 지내던 친구처럼 아무렇지 않게 경희를 불렀다. 얼어붙은 것은 경희였다. 


‘말을 할 수 있었는데도 입을 다물었던 거야? 왜? 나한테도 말 못 할 무엇이 있었니? 배신감 느껴지는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뱉어내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커피를 컵에 따르고 있는 봉숙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경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봉숙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봤다. 


“뭐 해, 경희야. 마셔.”

여윈 봉숙의 손목이 드러난 갈색 스웨터는 언젠가 경희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속절없이 헐렁해서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설명할게. 나도 경황이 없었어.”

맑은 눈으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하는 봉숙이 왜 그런지 측은했다. 


“힘들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까닭이 있었을 테니까.”

집안에 난방을 하지 않는지 바닥은 차가웠고 공기는 서늘해서 커피잔의 온기만 따스했다.


“힘든 것이 아니고,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높낮이 없는 말에 미세한 파동이 실려 있는 걸 눈치챈 경희는 차라리 안 듣고 싶었다.


“꿈을 꾸었어. 밤낮없이. 연속으로.”

봉숙의 말은 책을 읽듯이 일직선이어서 허공을 향한 혼잣말로 들렸다.


“좀 알아듣게 얘기해 봐. 계속 꿈을 꾸는 것과 네가 입을 다문 것이 무슨 관계인지.”

경희는 간신히 말을 해 놓고도 봉숙의 대답이 두려웠다. 혹시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듣지 않는 게 나았다. 


“아니 봉목사, 얘기하지 마. 다시 말을 하게 됐으니 그걸로 충분해.”

봉숙은 황급히 질문을 삼켜버린 경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희야. 너도 내가 미친 것 같니?”

경희의 크고 아름다운 눈이 더욱 커졌다. 눈물이라도 넘칠까 봐 경희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선화가 그랬어.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봉숙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떨어졌던 가족사진 액자는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벽에 기댄 채였다. 봉숙의 시선이 한참 동안 사진 위에 머물렀다. 


“경희야, 내가 해체되는 시간이었어. 내 삶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강렬한 빛 앞에서 난 눈이 멀 지경이었어. 수치심으로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지. 너무나 자세하게, 기억에도 없었던 것까지 실제상황처럼 드러나는데 견딜 수가 없더라. 한없이 울고 또 울고 몸부림치며 울고 했는데도 끝이 안 날 것 같은 절망감에 또 울고. 그렇게 심하게 휘몰아치던 폭풍우가 가라앉은 게 퇴원할 무렵이었어.”

이야기를 듣던 경희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봉숙을 살폈다. 봉숙이 입원한 일주일간 경희는 매일 병원엘 갔고 의사와 간병인의 이야기로는 어떤 미동도 없었다고 했다. 경희가 보기에도 숨 쉬는 시체 같았기에 울고 몸부림쳤다는 얘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분명히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었겠단 확신이 경희를 우울하게 했다. 


“그런데 퇴원하고서는 왜, 아무 말도 못 했던 거야, 안 했던 거야?”

봉숙이 어떤 얘기를 할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란 예상을 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희의 태블릿에 썼던 X가 무슨 의미인가도 궁금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꿈이었어. 잠인지 현실인지 나도 구분이 안 됐어. 너와 선화가 있다는 집이란 것은 알겠는데 그리고 내가 일상생활을 한 것도 맞는 데 말야.”  

봉숙은 계속 말하기가 힘들었던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얘기가 잠시 끊어지자 몽유병 검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경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런데 집에 와서 꾼 꿈들은 달랐어. 거대한 스펙터클 영화 같았어. 대자연과 우주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데 얼마나 압도되었던지 숨을 못 쉴 정도였어. 감히 입을 열어서 어떤 소리를 낸다는 게 불가능했어. 나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하고 슬프던지 죽고 싶었어. 한참 동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데 따스한 빛 속에서 무슨 소린가 들렸어. 내 이름을 부르던 엄마의 소리와 아주 비슷한, 어쩌면 엄마의 소리였는지도 몰라. 나도 모르게 ‘엄마’라는 말이 나왔어. 그때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단 생각이 들었지.”

경희는 갑자기 피우지도 않는 담배가 생각났다. 봉숙의 말을 그대로 믿기도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담배라도 한 개비 물고 있으면 뭔가 정리될까 싶었다. 


‘하, 나도 제정신을 잃어가는 것 같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이야? 앞에 있는 봉숙은 누구고 이전의 봉숙은 누구였나?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정신과로 데려 가? 아니면 10년 전처럼 떼제로 보내? 둘 다 어렵다.’

경희의 널뛰는 생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숙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긴 꿈에서 깨어나 처음 든 생각은 너를 만나면 바로 사과해야겠단 거였어. 경희야, 내가 너에게 너무 잘못했어. 어릴 적부터 친구인 너에게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화내고 상처 주고 해서 미안해. 늘 베풀기만 했던 너에게 고마움도 없이 무심했던 나를 용서해 줘. 정말 미안해.”

봉숙은 경희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경희는 드디어 벌떡 일어섰다. 봉숙의 모든 이야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 바람에 봉숙의 몸이 소파 옆으로 기우뚱하게 넘어갔다. 놀란 경희가 급하게 잡아 제대로 앉힌 다음 봉숙의 양손을 쥐고 눈을 빤히 바라봤다. 


“봉숙아, 너 아파. 아픈 거야. 병원 가자. 몸이 너무 약해져서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릴 수 있어. 너 지금 정상 아냐.”

그러나 경희를 바라보는 봉숙의 눈동자에 푸르른 광채가 돌아 마치 눈만 살아있는 것 같았다. 경희는 이런 맑고 깊은 눈을 본 적이 없었다. 경희가 한숨을 쉬며 다시 침묵하자 봉숙이 계속 말했다. 


“경희야, 나 아프지 않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야. 나는 그저 아침 안개이며 먼지일 뿐이고 헌 옷 같고 벌레 같은 인생인 거야.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름으로 불러준 소리가 있었어. ‘숙아’. 너무도 따스하고 다정하게. 이전에도 그랬는데 나는 왜 자꾸 밀어냈을까? 아예 모른 척했을까?” 

봉숙이 말하다 힘이 빠진 듯 다시 조용해지자 경희는 몸을 틀어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봉숙의 이야기가 맥락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느낌에 힘들고 피곤했다. 

흐린 하늘에서는 눈이 성글게 내리고 있었다. 눈이 쌓이기 전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침내 봉숙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교회는? 반지하 풀잎교회는 어쩔 생각이야?”

경희는 전투적으로 나가기로 작정했다. 이 기회에 반지하를 끝장내고 싶었다. 그런데 반지하 얘기가 나오자 봉숙의 표정이 많이 흔들렸다. 어딘가 아픈 사람 같은 고통이 얼굴에 일렁였다. 


“경희야, 너도 알았겠지만 내가 교회를 시작했을 때 난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 이런 지역에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은 남편이 남긴 돈에 빚 갚는 심정이었을 뿐이고. 그냥 견딜 만큼 지내다 그만두지 뭐 했는데 사람들이 온 거야. 너도 알지? 수진이, 한재상, 백민기, 이지영, 김현준, 박 집사......겁이 났어.”

 봉숙의 말은 느렸고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다. 로봇과 말을 해도 이보단 낫겠다 싶으면서도 억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또 다른 걱정이 일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기억하는 것을 보니 멀쩡한가 싶기도 해 경희의 머리는 터질 지경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백민기, 이지영이 누구야?”

경희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교회에서 본 기억도 없었다. 


“그 사람들 이름. 백 부장 백민기, 이 과장 이지영.”

그때서야 경희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경희가 반지하에 드나들면서 그림자처럼 알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경희는 몰랐던 사람들의 이름을 봉숙에게서 듣게 되니 무슨 까닭인지 속이 더 시끄러웠다. 


“그래서 봉숙아, 계속 풀잎교회를 한다고?”

경희의 힐문하는 듯한 질문은 그러나 자신 없는 말투가 되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봉숙은 못 들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단은 나가 보려고. 그곳에서 또 지내다 보면 글쎄....... 네가 선화를 계속 출근시킨 건 같은 생각 아니었니?”

경희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견고하진 않으나 반지하에 대한 생각과 계획이 누군가에 의해 봉숙에게 전이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 봉숙의 모습은 오래된 연민과 실체 없는 불안이 되어 경희를 낙담케 했다.


“경희야, 눈 온다.”

봉숙은 아이처럼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깨뼈의 적나라한 곡선이 헐렁한 스웨터를 더 커 보이게 했다. 경희는 백화점에 들러야겠다며 서둘러 일어섰다. 봉숙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냥 집으로 가. 경희야, 눈길 조심하고.”     

밖에는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을 잠시 맞고 서 있으니 바로 눈사람이 되었다. 경희는 머리의 눈만 대강 털고는 자동차에 올랐다. 차창에 수북이 쌓인 눈은 윈도브러시에 무겁게 밀려갔지만 곧 다시 쌓였다. 어두운 차 안에서 내비게이션 홀로 환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네. 어디로 가지?’

흰 눈으로 아득하기만 한 사방을 보며 경희는 한참을 있었다.     

 

     



“부장님, 반지하에 가보세요.”

이 과장이 늦게 출근하는 백 부장에게 소리쳤다. 백 부장은 별일이 아니란 듯 무심하게 이 과장을 쳐다봤다. 나도 알아. 석 달 만이군.

그러나 아무 대답 없이 기계 쪽으로 다가가 계기판을 점검했다. 


“오늘 새 바이어가 온댔어. 샘플 확인 좀 해 놔.” 

백 부장의 무반응에 이 과장은 놀랐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3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남은 백 부장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저 반응은 뭐야? 맨날 반지하를 기웃거리더니.’ 

    

<겨울의 끝자락에서 따스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반지하의 입구에는 이전의 화이트보드가 아닌 블랙보드가 세워졌다. 검은색의 보드를 나무테두리가 감싸고 있어서 제법 따뜻해 보이기까지 했다. 

건물에서 나온 백 부장은 새로운 보드에 적힌 글씨를 소리 내어 읽었다. 

거리에는 싸늘한 바람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백 부장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다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부장님, 오랜만이네요. 달달한 커피 한 잔 하세요.”

백 부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봉숙인데 엄청나게 늙어버린 탓에 잘못 본 것은 아닌가 눈을 비볐다. 더욱이 빛나는 눈빛으로 백 부장을 바라보는데 마치 자신이 통째로 스캔되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에 끌리듯 반지하로 내려온 백 부장은 봉숙이 권하는 믹스 커피를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마셨다. 실내는 난방을 한 듯 따스했고 산책로 쪽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제법 강렬했다. 


“한 잔 더 드려요? 잠을 못 주무시는 게 아니면.”

봉숙은 깡마른 손으로 그의 잔을 리필하려는 듯 가져갔다. 


“아니요. 그냥 물 마실게요. 그런데 사모님, 어디 아프셨어요?”

백 부장은 소변이라도 마려운 듯 안절부절못하며 간신히 물었다. 그의 마음에 이건 보통 병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 상태로는 얼마 못 갈 것 같아. 

봉숙은 가만히 웃었다. 그녀의 핏기 없고 버석한 얼굴에 주름이 마구 생겼다. 


‘마귀할멈이 따로 없네. 매부리코면 딱인데.’ 

봉숙을 보는 백 부장의 눈동자가 자리를 못 잡고 허둥거렸다. 


“마귀할멈 닮은 것 같나요?”

봉숙의 농담에 백 부장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놀라긴. 아까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한 말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백 부장은 비로소 편안한 숨을 쉬며 봉숙을 마주 보았다. 자세히 보니 엄청나게 야윈 것일 뿐 봉숙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마치 깊고 넓은 바다가 그녀의 어딘가에 들어있는 듯 오히려 이전보다 더 편안하고 고요하며 푸근했다. 


“부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라일라 씨 일에 관해 꼭 사과하고 싶었어요.”

봉숙에게서 배어 나오는 짙은 진심이 백 부장의 입을 막았다. 누군가에게 세뇌를 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 백 부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똑바로 떴다.


“물론 라일라 씨를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서 일단 부장님께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혹시 연락이 될까 해서요.”

백 부장은 봉숙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 생각을 굴렸지만 전혀 정보가 없었다. 벌써 넉 달도 더 지난 일이었고 전해 듣기로는 부상이 경미해서 반 깁스하고 퇴원했다는 정도였다. 백 부장 자신도 알코올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을 놓았던 터라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전 바이어의 근황을 알 리 없었다. 


“모르시면 어쩔 수 없지요. 헌데 아드님은 잘 지내고 있죠?”

백 부장은 또 한 번 놀라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알코올 병원을 퇴원하던 날 집에 얌전히 돌아와 있던 아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 과장이 떠들었나? 


“놀라실 것 없어요. 부장님 반응이 대답이죠. 아들 얘기 할 때의 부장님 표정은 특별했거든요. 사랑을 배반하는 피조물은 인간밖엔 없다지만 또 그 사랑에 이끌리는 것도 인간이니까요. 부장님이 아드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잖아요.”

백 부장은 갑자기 눈물이 뜨겁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왜 이럴까 생각도 되었지만 굳이 감정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백 부장은 봉숙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되는 자신을 느꼈고 그 느낌은 편안한 대화로 이어졌다. 무슨 일이든 숨길 일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비정상으로 깡말라버린 봉숙에게 일종의 연민이 생겨서일 수도 있었다.


“사모님은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리신 건가요? 사람이 단기간에 그렇게 마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얘긴데.”

백 부장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 특히 여자의 건강이나 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많이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저도 잘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몸이 줄어드니까 가벼워서 좋더라구요. 보기에만 불쌍해 보이지 그다지 기운이 없지도 않아요. 신기한 건 정신은 더 예민해졌는데 잠은 잘 오니 건강하다고 봐야지요.”

봉숙과의 대화는 아직까지의 어떤 이야기보다 길었다. 살이 빠지면 말이 많아지는 통계라도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 백 부장이 재밌다는 듯 봉숙은 다시 뜨거운 믹스 커피를 만들어 내주었다. 백 부장도 아무 말 없이 받아 들곤 처음과 다르게 맛나게 마셨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봉숙이 음악을 틀려고 일어서는 데 이 과장이 들어섰다. 


“부장님. 사장님이 찾아요. 바이어 온다고 했다면서요?”

이 과장의 부름에 백 부장은 서둘러 올라갔고 현관 계단에 자리 잡고 선 이 과장은 놀란 눈으로 봉숙을 내려다보았다. 


“들어와서 따뜻한 말차라도 마셔요. 제주에서 온 게 있어요.”

이 과장은 자기도 모르게 현관에서 반지하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쪽가위가 들려 있었고 도수 높은 안경은 이마 위에 얹힌 상태였다.


“혹시 우유나 땅콩 알레르기가 있나요?”

봉숙이 차를 준비하며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이 과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만 좌우로 흔들었다. 그 바람에 안경이 주르륵 미끄러져 콧등에 앉았다. 


“과장님, 그동안 드럼 좀 치러 오셨나 했더니 아닌가 봐요.”

차를 만들면서 하는 봉숙의 질문에도 이 과장은 머리만 좌우로 흔들었다. 봉숙은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면서 그러려니 했다. 따뜻해진 우유에 말차의 푸르름이 녹아들면서 유리잔은 연둣빛으로 물들어갔다. 


 “새싹 같아요. 말차가 봄차인가요?”

컵 가까이 두 눈을 모으자 이 과장의 사시가 더욱 도드라졌다. 그 모습이 봉숙에게 아련한 통증처럼 다가왔다. 얼마나 놀림받으며 살아왔을까.


“정말, 말차보다 봄차가 어울리네요.”

봉숙의 말에 이 과장은 배시시 웃었다. 마흔 넘은 여자가 웃는 모습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자 봉숙은 또다시 마음이 저렸다. 제 나이 때의 웃음을 제대로 웃지 못하고 남아있던 웃음치인 것 같았다.


“제 동생이 키보드를 잘 쳐요. 언제 같이 연주해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봉숙이 퇴원하고 두 달쯤 지나 봉선화는 떠나갔다. 봉숙이 말을 할 수 있음에도 자신과는 소통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경희까지 싸잡아 비난하더니 어느 아침 사라졌다.


“동생 분은 제가 하는 음악과는 달라요.”


“왜요? 언제 들어봤나요? 맘에 안 들던가요?”


“아뇨. 아름다운데 슬펐어요. 한 번 들었어요. 저는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아요.”

봉숙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는 이 과장을 바라봤다. 분명 둘이 만나긴 했으니 곧 다시 만나리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 스스로 상기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왜 저처럼 말랐어요? 통통하실 때가 더 좋은 데 저는.”

이 과장의 말에 봉숙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과장 스스로가 얼마나 말랐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고, 또 말로 표현했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이 과장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언젠가 맡았던 향기가 바람 속에 섞여 같이 들어왔다.


‘라일라.’

생각지 않았던 인물의 등장에 이 과장은 안경을 고쳐 썼고 봉숙은 벌떡 일어났다. 라일라는 여전히 검은색 슈트에 빨간 구두 차림이었다. 한 손에 외투를 들고 있었는데 시리도록 파란색이었다. 코트를 보자 봉숙은 그녀의 코발트색 베일이 생각났다. 서랍에 잘 있겠지.

이 과장은 라일라를 본척만척 바로 위로 올라가 버리고 라일라와 봉숙은 서로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롱 타임 노씨. 와우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아닌 줄 알았어요.”

라일라는 윤이 도는 검은색 단발머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는데 그 모습이 이전의 모습과 달라 봉숙은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라일라는 자신이 주인인 듯 봉숙에게 앉기를 권하고 자기도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이하영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제가 결례를 한 것 같아서 왔어요. 사업차 회사에 볼 일도 있고.”


“아, 맞아요. 이하영 씨. 회사라면 중동 컴퍼니 말씀인가요? 여기 위 층?”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사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들렀다고 했다. 그러자 방금 전 이 과장이 백 부장에게 바이어가 온다고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 바이어가 이 여자인가? 그럼 여전히 사업파트너로 지내고 있다는 말이네. 난리가 나게 생겼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일이야? 남편은?’


“네, 새로 계약하려고요. 제 이름으로요. 남편은 죽었어요.”

봉숙은 순간적으로 머리에 블랙아웃이 온 듯 캄캄해졌다. 


“목사님, 왜 그래요?”

라일라가 봉숙을 부축이라도 할 것 같은 자세로 다가오자 봉숙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무슨 소리예요? 남편을 죽여요?”

라일라의 검고 커다란 눈이 벌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죽었다구요. 두 달 전 수영장에서 심장마비로요. 죽인 게 아니라.”

비로소 봉숙은 정신이 돌아왔고 그럼에도 라일라를 쏘아보았다. 

 

“오, 노! 저는 한국에 있을 때예요. 남편 사망 소식 듣고서 갔어요.”

라일라는 당황했으나 곧 봉숙의 눈길을 이해하고는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라일라의 남편 사망 소식이 궁금한 일도 아니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봉숙은 잠깐 쉰 다음 용건을 물었다.


“아, 네. 그런데 저에게는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거죠?”

여전히 마뜩잖은 봉숙의 말투에도 라일라는 공손함을 잃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니까 목사님 생각이 났어요. 제가 라일라에서 이하영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으니까요. 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봉숙은 기가 막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점입가경이라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게요. 목사님을 먼저 만나고 싶었어요.”

라일라였던 이하영은 다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위층으로 사라졌다. 

이하영의 향기가 남아있는 곳에 넋 나간 듯 앉아있던 봉숙은 비척거리며 흔들의자로 갔다. 

겨울 낮의 햇볕은 일찌감치 끝자락만 남겼지만 온화함은 흔들의자에 쏟아지고 있었다. 쓰러지듯 흔들의자에 몸을 부리고 나서 봉숙은 악을 썼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아니, 제 이름을 찾았으면 찾았지 뭐가 어째?”

분명히 소리치고 분통을 터뜨렸으나 밖으로 나온 것은 새는 듯한 한숨이었다. 

창턱에 올려놓은 봉숙의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날개를 편 새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창밖에는 여름에 설치한 차수막 안쪽에서 황금빛 고양이가 졸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 치킨을 들고 내려온 백 부장은 노래라도 부를 듯 즐거워 보였다. 바이어와 사장은 밖으로 식사하러 나갔다며 새로운 파트너는 여전히 라일라라 다행이라고 했다.


“알아요. 바이어가 여기 먼저 다녀갔어요.”

봉숙의 말에 백 부장은 다소 김 빠진 얼굴이 되었지만 사장이 사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해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역시 반지하에 교회를 들인 것이 신의 한 수였으니 오래오래 사용하시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봉숙은 치킨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튀김기름 냄새가 역겨워서 창문이라도 열어야 할 판이었다. 백 부장은 콜라 한 캔도 같이 놓아두고는 올라갔다. 분명 백 부장이 부르는 것이 분명한 콧노래가 위로부터 천천히 흘렀다. 

봉숙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 놀랐다. 건물주이자 중동컴퍼니의 사장이 봉숙의 무엇에 감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점쟁이의 말을 믿고 반지하에 교회를 준 것도 별 문제는 아니었다. 라일라였던 이하영이 자신의 이름을 찾고 남편과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어떤 수순에 의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 모두 다 편안하고 나름 행복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상황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모르지만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커피를 만들어주거나 악담을 하게 내버려 두거나...... 무심하게 있었던 것뿐인데.’

그러다가도 백 부장이나 라일라 혹은 순댓국집 사장이나 그 부인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불편했다. 그들은 봉숙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반지하를 어슬렁거리다가 습관처럼 흔들의자로 가서 앉으니 창밖으로 황금빛 고양이가 보였다. 아까는 한 마리가 졸고 있더니 어디서 똑같이 생긴 녀석이 와서 털을 고르고 있었다. 


‘얼룩이가 새끼를 낳은 모양이야. 어미보다 예쁜 놈들이네.’

봉숙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고양이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쑥 들어왔다. 몸을 낮게 굽혀 손으로 땅을 짚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는 한재상이었다.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쓰윽 일어났다. 그녀의 줄어든 몸무게로 흔들의자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어르신.”

봉숙이 창 옆의 출입문을 열자 한재상의 독특한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한재상을 반지하로 들인 것을 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맛난 냄새가 나네. 치킨이야?”

봉숙은 잘 되었다는 생각에 한재상 앞에 치킨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한재상은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대지 않았다.

 

“목사가 먹어야지. 기운 내서 일할 거 아닌가? 난 안 먹어. 씹을 수가 없어.”

한재상은 자신의 보따리를 뒤적거리더니 멸균 팩에 든 딸기우유와 초코파이를 내놨다. 봉숙은 딸기우유의 기억이 되살아나 기겁했다.


“어르신 드세요. 저도 안 먹어요.”

봉숙이 우유와 초코파이를 밀어내자 한재상이 소리를 높였다.


“난 소화 안 돼서 못 먹어. 입맛 없을 땐 그냥 이렇게라도 먹어야지. 먹으라고 목사.”

말투는 투박하고 거슬리는 톤이었지만 봉숙의 입맛을 걱정하는 한재상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외모가 너무나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거나 무딘 사람이라도 봉숙의 변태에 가까운 변화를 모른 척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재상은 한 마디의 말도, 한 번의 미심쩍은 눈길도 없었다. 이전의 봉숙을 대하듯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고마웠다. 고마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고마웠다. 

봉숙은 한재상을 잠깐 기다리게 하곤 부드러운 빵과 디카페인 커피를 내려왔다. 한재상이 커피의 카페인 여부를 가리는지는 몰랐지만 혹시라도 잠을 방해할까 싶어서였다. 

연보랏빛 꽃무늬가 새겨진 본차이나 컵을 받아 든 한재상은 물끄러미 컵을 바라봤다. 소나무껍질 같은 손등과 끄트머리가 고르게 잘리지 않은 때 낀 손톱이 매끄러운 커피 잔을 감쌌다.


“이젠 돌아왔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봉숙은 말없이 한재상을 바라봤다.


“목사가 제 자리에 있어야지. 그럼 모든 건 다 제 자리를 찾아.”

한재상은 봉숙의 시선 따위는 묵살해 버리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봤다. 


“아니, 어르신. 언제는 저한테 잠만 잔다고 야단치시면서 밖에 찾아다니라고 하신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가 안 맞는데요?”

봉숙도 작심하고 물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속을 긁어놓는지 따지고 싶었다.

한재상은 따스하게 데워진 빵 한쪽을 커피에 적셔서 우물거리며 한참 먹었다. 


“저 위 회사에 거래천가 뭔가 젊은 여자 왔었지? 얼마 전에 목사가 쫓아낸 여자 말야.”

봉숙은 한재상의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화도 났다. 이 노인네도 내가 라일라를 쫓아냈다고 하는구나. 너무 어이없고 놀란 나머지 봉숙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어르신, 누구세요?”

거의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묻는 봉숙은 보지도 않은 채 한재상은 빵 한 조각을 또 커피에 적시고 있었다. 


“혹시 저를 감시하시나요?”

한재상이 빵을 천천히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봉숙은 힘겹게 물었다. 물으면서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묻고 싶었다. 한재상은 커피 한 잔을 더 청했다. 


“목사 있는 데가 교회라며? 돌아댕기든 잠을 자든 목사 있는 곳에 오는 사람은 교회에 온 거야. 지 신앙 따라온 거라고. 목사가 뭘 했어? 아무것도 안 했잖아.”

한재상이 ‘아무것도’에서 얼마나 힘주어 말하는지 들으면서도 민망했다. 


“그러게요.”

한숨 쉬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피의자 같았다. 그렇다고 한재상의 말에 어떤 가시가 있다고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냄새를 피우든 그렇지 않든 한재상의 존재는 미스터리 그 자체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밀어내고 싶은 대상도 아니었다. 어쩌면 봉숙이 밀어내기에는 힘겨운 단단한 존재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아직까지 별로 한 일도 없지만 그냥 그대로 있어. 이제 싸움질하거나 도망칠 궁리는 않겠지. 그만큼 얻어터졌으면.”

한재상은 리필해 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봉숙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조명을 구경하거나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봉숙은 뭔가 시원하게 한재상을 한 방에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 줌밖에 안 될 것 같은 한재상을 한 대 때려서라도 속 시원한 답을 듣고 싶었다. 한재상의 모든 말이 아리송해서 감을 잡을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가도 한편으론 그런 한재상이 괘씸하기도 했다. 

저녁 해가 어스름해질 무렵 한재상은 일어섰다.


“목사가 안 한 일은 누군가가 한 거겠지? 복 터진 거야 목사는.”

들어왔던 산책로의 쪽문으로 나가는 한재상의 뒷모습은 너무 작아서 어린아이 같았다.


봉숙이 멈칫거리며 일어서는 둥 마는 둥 하는데 현관으로 라일라였던 이하영이 들어섰다. 다시 내려오겠다더니 시간이 늦었지만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하영의 손에는 장미 다발이 들려 있었다. 봉숙은 여러 가지로 그녀의 일이 궁금하긴 했어도 굳이 묻지 않았다. 


“목사님은 자기를 못 믿는 것 같아요. 분명히 보통 사람과 다른 신통력이 있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시잖아요. 지금도 목사님 보고 있으면 피스, 평화? 그런 게 느껴져요. 전에는 제가 너무 못되게 굴어서 그걸 잘 몰랐었는데 하여튼 그래요.”

라일라는 자신이 한국에 나와 있는 중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분쟁에서 제외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합리적으로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겼기 때문에 곧 자기 이름으로 법인을 설립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또 중동 컴퍼니와 연결된 일은 하던 사람인 자기가 인수하는 게 서로 잘된 일이 아니냐고 하며 웃기도 했다. 

라일라는 성의껏 말했지만 봉숙은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 집중하느라 건성건성 듣고 있었다. 


“라일라, 아니 이하영 씨. 저는 점쟁이도 아니고 어떤 신통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남편의 일은 우연일 뿐이었던 거죠. 그건 좀 정확히 했으면 좋겠어요.”

이하영은 봉숙을 가엾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붉은빛으로 칠해진 손톱 위에서는 이전처럼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비즈가 빛나고 있었다. 라일라는 들고 온 장미 다발을 봉숙 쪽으로 가만히 밀었다. 장미의 향긋함이 벨벳 같은 부드러움과 따스함으로 봉숙을 휘감았다.


“이건 목사님 드리려고 샀어요. 장미 향기는 장미니까 나는 거잖아요. 목사님 향기는 초능력이니까 감춰지지 않지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든.”

봉숙은 말하고 있는 이하영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언젠가 경희가 했던 말이 스쳐갔다. 너 신통력 있잖아.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이러다가 교주가 되겠구나 싶은 생각에 라일라였던 이하영을 다시 똑바로 바라봤다. 


“라일라, 아니 이하영 씨, 이슬람에서는 이맘에게 어떤 초능력을 부여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백 부장이나 이하영 씨가 겪었다는 그 일은 심리적인 문제일 겁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이 해내는 일 같은 거죠. 그 일에 내가 그냥 같이 있었던 거구요. 사람은 사람으로 치료되기도 하니까요.”

라일라였던 이하영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봉숙을 바라봤다. 설명할 수 없어 초능력이라고 말한 그것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그렇다고 소모적인 말씨름을 계속하고 싶진 않았다. 봉숙과 함께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편안해서 한참을 침묵 가운데 있었다.


“이슬람이고 라일라고 그건 중동에서 생존하기 위해 걸쳤던 갑옷 같은 거였어요. 제 이름인 이하영은 원장님이 지어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 하영이라고 하셨어요. 교회 안에서 자라났답니다. 저도.”

이하영의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봉숙은 ‘헉’소리를 낼 뻔했다. 방금 전에 들었던 한재상의말이 그녀를 때렸기 때문이다. 


‘목사가 있는 데 온 사람은 교회에 온 거야. 지 신앙 따라온 거라고. 목사가 뭘 했어?’ 

봉숙은 주눅이 들고 기운이 빠졌다.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하영이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환한 웃음으로 자신을 보는 이하영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반대로 자신은 암흑의 블랙홀 같아 그저 그녀가 빨리 나가주었으면 했다. 


“제가 버릇없었던 것은 맞아요. 그래서 화를 내신 것도 맞구요. 그런데 하여튼 목사님이 이곳에 계셨던 것이 중요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하영의 말은 봉숙을 더욱 힘들게 했다. 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자신을 이곳에 붙들어두려는가. 경희는 끊임없이 떠나라고 하건만 다른 이들은 무슨 이유일까.

이하영이 가고 나서야 그녀에게 돌려줘야 할 502달러와 코발트빛 비단 스카프가 기억났다. 

사무실에 와서 서랍을 열고 물끄러미 서랍 속의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코발트빛 스카프 옆에 얌전히 놓인 봉선화의 옅은 핑크빛 얇은 카디건이 봉숙의 마음을 살며시 흔들었다. 


‘두 사람이 많이 닮았어.’

 한참을 서 있던 봉숙은 다시는 안 열 것처럼 서랍을 천천히 밀어 꾹 닫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창문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이전 10화 10. 겨울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