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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9. 가을 태풍

봉선화가 다시 반지하에 찾아온 것은 노랑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할 때였다. 그 꽃이 반지하의 산책로엔 없었지만 근처 샛강 둔치에는 노랑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했다. 사람들은 그 노랑꽃 속에서 사진을 마구 찍었다. 조금 지나면 부드럽고 옅은 색조의 코스모스들이 피어날 텐데 저 노랑의 기세를 이겨낼 수 있을까 봉숙은 궁금했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엽을 태우는 냄새와 닮은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글씨를 쓴 칠판을 밖에 내놓으며 봉숙은 마음이 몹시 허전했다. 글씨를 읽어주던 백 부장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빼먹지 말고 꾸준히 글씨를 써서 내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그 정도도 못했단 말인가 하는 자책을 하며 돌아설 때 봉선화의 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봉숙은 자신이 뭘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봉선화의 얼굴에는 화장기가 없었고 머리카락도 짧아 소년 같았다. 더욱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은 처음 보는 봉선화 패션이었다.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야? 왜 저렇게 변했대?’

자세히 보니 운동화에는 큐빅이 자잘하게 박혀 있어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낙엽 타는 냄새가 어떤지 생각이 안 나네. 언니, 커피 마셔봐야 알려나?”

봉선화는 마치 매일 만나던 사람을 대하듯 봉숙을 흘끗 보곤 카페 테이블로 갔다. 커피를 내릴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핑크빛 얇은 카디건이 걸쳐져 있었다. 봉숙은 그런 봉선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리를 내줬다. 곧 연기를 닮은 구수한 커피 향이 실내에 차올랐다. 


“글쎄, 스모키 한 향이 아무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과테말라 커피야.”

봉숙은 여전히 낯선 모습의 봉선화를 바라보며 낙엽 태우는 냄새를 설명했다.

 

“언니, 계속 잠 못 자는구나. 약 먹어? 경희 언니한테 전화했더니 걱정하더라.”

낙엽 타는 냄새보다 봉숙의 불면증이 더 궁금한 듯 봉선화는 말을 돌렸다. 봉숙은 언제부터 봉선화와 경희가 친해졌는지 의아했다. 하긴 여름비 오던 날 봉선화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준 것도 경희였었지. 


“경희 언니가 여긴 오지 말라고 했어. 그 언니는 여전히 나를 싫어하니까. 나도 뭐 좋은 건 아냐. 그래도 내가 언니의 유일한 동생이잖아.”

봉선화는 보라색 꽃무늬 컵에 커피를 담아서 가져왔다. 봉숙의 컵은 우윳빛 머그잔이었지만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받았다. 보라색 꽃무늬는 한재상을 떠올리게 했다.


“너, 이상한 거 알지? 처음 보는 사람 같아. 무슨 일이야?”

마음속에서 한재상을 털어내며 무심하게 물었다. 


“언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올해 내가 마흔다섯이더라. 형부가 떠난 나이이고, 그때의 언니 나이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되짚어봤어. 내가 지금 그 상황을 맞는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야.”

봉숙의 심장 쪽으로 약하게 쥐어짜는 통증이 왔다.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니 봉선화의 눈이 커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아직도 그대로네. 언니도 참 딱하다. 나도 사는 게 그냥 그래. 그래서 이것저것 다 인연 끊고 출가해 보려고 하는데. 내 친구 중에 비구니가 있거든.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걔를 만나면 내가 모자란 사람 같더라고. 그래서 한번 따라가 살아보려고 해. 그래도 언니는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들른 거야. 물론 언니한테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봉숙은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봉선화를 말리고 싶은 힘도 마음도 없었다. 왜 하필 산으로 간다고 하는지 봉선화의 생각이 궁금했고 화가 났다. 


“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니? 야, 봉선화! 너의 신앙은 껍데기였니? 어떻게 사람만 보고 인생을 결정해? 설명을 해 봐.”

봉선화의 반응은 그저 희미하게 웃는 것이었다. 발끈해서 봉숙에게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녀의 성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침묵이 이어지다가 봉선화는 다 마신 컵에 커피 리필을 하려고 일어섰다.  


“말을 해!”

다시 봉숙이 소리치자 드디어 봉선화는 눈에 불을 켜고 대들었다. 


“언니야말로 말을 해 봐. 난 사람이야. 사람밖엔 못 본다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잖아? 그런데 하나님을 보여주던 사람들은 다 떠났네. 힘들고 외로워서 외도를 좀 하겠다는데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날 야단쳐? 자기 껍질 속에 처박혀 있는 언니는 소라게 같아.”


“입 다물어!”

봉숙의 말이 입에서 떠나기도 전에 봉선화는 반지하를 가로질러 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가 걸쳤던 카디건이 떨어졌고 출입문은 바람에 사납게 출렁거렸다. 어이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봉숙 앞으로 낙엽이 몇 잎 들어와 뒹굴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터벅거리며 사무실로 가는데 무슨 까닭인지 서러웠다. 


나쁜 계집애. 나한테 소라게가 뭐야.

봉선화의 카디건을 넣으려고 서랍을 열자 라일라의 코발트색 베일이 눈에 띄었다. 베일을 살짝 밀고 그 옆에 봉선화의 핑크 카디건을 접어놓았다. 두 색깔이 주는 기시감에 기분이 묘했다. 너희들은 닮은 데가 많구나. 

흔들의자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데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가을치고는 바람이 거칠었다. 갈색의 바삭한 낙엽과 함께 아직 물기가 남은 초록색 잎사귀까지 바람에 불려 다녔다. 

    


남편이 사라진 드러머 이호를 만나러 가던 가을도 그랬다. 태풍이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고 바람은 사납게 불었다. 남편은 출소한 이호가 전주에 있는데 가서 만나보겠다고 했다. 봉숙은 태풍이 온다는 데 굳이 오늘 가야 할 이유가 뭐냐, 이호를 만나서 뭘 어쩔 작정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데 이호는 살려놔야지.”

남편은 뚱딴지같은 얘기를 하고는 길을 나섰다. 


‘아니, 이호가 죽기로 작정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죽으려면 조용히 죽지 그걸 굳이 왜 알려. 아님, 돈이 필요했나. 하여간 끝이 안 좋은 애야.’ 

남편은 오래된 소형차를 몰고 바람 속으로 떠나 닷새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다행히 이호는 없었고 혼자였다. 남편의 이러한 행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락 없이 닷새 만에 나타난 남편에게 봉숙은 화가 치밀었다.

 

“그냥 같이 있었어. 한옥마을에 가서 그날 저녁 자고, 바다를 보고 싶어 하기에 변산에 가서 머물렀지. 그런데 이호와 있는 동안은 온통 그 애한테 집중해야 했어. 그래서 연락을 안 한 거야.”

봉숙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남편을 응시했다. 연락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다는 얘기를 저렇게도 편하게 하는구나 싶었다. 봉숙은 화가 나서 입을 다물었지만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이호가 다른 마음을 품었더라고. 자기의 정체성은 전과자 단 세 글자라는 거야.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사람들은 피하고. 그래서 의미 없는 인생 숨어버리려는데 날 한 번 보고 싶더래. 그래서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내가 받은 거지.”

봉숙은 하던 설거지를 내버려 두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남편이 저녁을 먹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잠시 앉아 있던 남편은 남아있는 설거지를 마치고 봉숙을 불렀다. 


“여보,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 차나 한 잔 합시다.”

남편은 히비스커스를 우려내 봉숙에게 건넸다. 그녀가 혼수로 해 온 오래된 본차이나에 담긴 차는 붉은빛을 내며 연한 향기를 날렸다. 

못 이기는 체 나와서 남편과 마주 앉긴 했으나 차를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식어요.”

바깥은 잠잠했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곤 해서 아파트 창문 옆으로 늘어진 나뭇가지가 달빛에 그림자를 크게 일렁였다. 침묵 속에서 누구도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달빛이 밝아 어둠이 저만치 물러가 있었다.


“이호가 출소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스스로 삭발을 했더라고. 산사에 숨어서 행자로 살다가 죽으려고 했다는 얘기에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 그 아이가 홀로 얼마나 외로웠고 얼마나 지쳤는지 고스란히 마음에 전해져 오는 거야. 그래서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어. 그리고 사과했어. 미안하다고.”

남편은 히비스커스를 천천히 마셨다. 그 붉은색의 액체가 남편을 따스하게 해 줄 것 같아 봉숙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당신이 뭐가 미안한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질문을 봉숙은 삼켰다. 그리고 식은 히비스커스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이호를 혼자 있게 한 것. 아니 그렇게 느끼게 한 것이 잘못이지.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 애가 느끼지 못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그냥 함께 있었던 거야.”


“더 계시지 그랬어요? 아예 데리고 오시던가.”

봉숙의 가시 돋친 말에 남편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고른 잇속을 드러내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뭐가 해결됐는데? 걔는 뭘 어쩌겠대요? 개과천선이라도 해서 얼마나 달라진다고 합디까?”

여전한 봉숙의 비아냥거림에 남편은 편안한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미치긴 제대로 미쳤군. 이 상황에 콧노래가 나오다니. 봉숙은 더욱 격앙됐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호를 다시 여기로 부른 건 아니죠?”


“캄 다운. 나의 사모님. 당신은 변함이 없어서 좋아.”

남편은 봉숙을 향해 다시 한번 웃음을 날렸다. 봉숙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호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잊혔다고 생각했대. 그런데 자기를 사랑해 준 한 사람을 기억했다고. 어쩌면 자기는 이런 말을 해 줄 목사님을 기다렸는지 모른다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보겠대. 세상이 자기를 무시하고 안 받아줘도 노력하겠다고. 나한테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라고 해서 온 거야.”

남편의 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상기되어 있었다. 봉숙은 그런 남편이 경이로웠다. 이 남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그 모든 말을 그대로 믿는가. 이호 걔가 벌써 몇 번째 수감되었는지 알면서 저런 확신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호가 가지 말라고 했으면 안 왔을 사람이네.   

   


갑자기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낙엽이 창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자 봉숙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자신을 찾아왔던 동생 봉선화가 눈앞에 그려졌다. 


‘봉선화, 너도 외롭고 지쳐서 떠나는 거니? 그래서 너를 찾아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야? 그 사람은 없어. 내 곁에도 네 곁에도 없다고.’ 

서랍을 열어 나란히 놓인 코발트빛의 실크 베일과 핑크빛 얇은 카디건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두 물건의 주인이 그 자리에라도 있는 듯 봉숙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떠도는 바람이구나.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눈을 감은 채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봉숙의 뒤로 낙엽이 쏟아져 들어왔다. 봉선화가 열어놓고 나간 현관문으로 바람 따라 리듬 타듯 온갖 마른 잎들이 들어와 소용돌이쳤다.     




처음으로 수진이 일요일에 나왔다. 반지하 시작 이래 최대 인원인 4명이 모인 날이었다. 사람들이 수진을 본 것은 물난리 때뿐이었기 때문에 초면과 다름없었다. 예배가 끝난 후 점심으로 수진의 빵을 먹으려고 둘러앉아 있을 때였다. 


“여러분들은 왜 여기에 오세요? 아니 왜 풀잎 교회에 오시죠? 궁금해요.”

경희의 느릿하지만 미묘한 질문이 사람들에게 던져졌다. 그러자 박 집사와 김현준 그리고 수진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동시에 경희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마침 커피를 내리러 카페 테이블로 향해 가던 봉숙도 멈칫하고는 돌아보았다. 


“저는 찬양하러 옵니다. 다른 데서는 찬양을 맘대로 못하는 데 풀잎교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너무 좋아요.”

김현준이 소금빵을 하나 들고는 맛있게 뜯어먹으며 대답했다. 누가 봐도 그는 정말 좋아 보였다. 사람들은 웃었고 경희는 입을 가린 채 짧은 하품을 했다. 


“아니, 교회가 노래방도 아니고. 현준 씨는 차라리 노래방이 낫지 않아요? 나 같은 사람 신경 안 써도 되고”

경희의 경우 없는 말에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들 마뜩잖은 시선으로 경희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저렇게 할까 목사 친구라는 저 여자는. 


“물론 예배가 우선이죠. 노래방에서 예배할 순 없잖아요? 제 말은 예배하며 찬양한다는 뜻이죠.”

경희의 까칠한 말에 김현준이 아무렇게 답을 해서 사람들은 안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봉숙은 이 대화에 참여해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김현준의 웃음에 커피 내리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빨리 경희를 내쫓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분주했다. 서둘러 다섯 잔의 커피를 받쳐 들고 모임의 자리로 가서 커피를 나누었다. 


“저는 목사님 때문에 와요.”

박 집사였다. 본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놀란 것은 봉숙이었다. 경희의 의문에 찬 눈길이 박 집사를 향해 곤두서 있었다.  


“목사님을 보면 뭐라고 할까 연민의 감정이 생기는데 결국에는 제가 위로를 받더라구요. 어려울 때마다 이곳에서 편안함을 선물 받고 나온답니다. 참 특별한 능력이신 것 같아요.”

경희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대놓고 박 집사에게 집중했다.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맞아요. 저도 그런 적이 많았어요. 목사님 만날 때 마다요.”

수진이 거들었고 봉숙은 난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었고 그저 편안히 들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사실 봉숙은 점점 심해지는 불면증에 어찌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제가 몸도 너무 안 좋고 무엇보다 여러분에게 좋은 신앙의 본이 못되어서 이제는 여러분을 보내 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풀잎교회는 여기까지인 것 같구요.’ 

아침마다 이 말을 되뇌어 반복하면서 우선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집사님, 설명 좀 해 주세요. 그게 뭔지. 저는 그냥 목사님이 푸근해서 좋거든요? 참견도 안 하시고.”

김현준이 커피를 홀짝이며 명랑하게 떠들자 박 집사가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퇴근길에 자주 교회에 들렀어요. 그때마다 목사님은 흔들의자에 계셨는데 제가 온 걸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하여간 늘 그곳에 계셨어요. 이상한 건 제가 앉아서 기도를 하든지 않든지 마음이 과거로 흩어져 괴로웠는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평안이 오더라구요. 때론 따스함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제가 아는 것은 목사님이 안에 계시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제가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 함께 있다는 든든함이 저를 안정시키고 편안케 했어요. 여러 번 그랬어요. 물론 평안과 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게 목사님을 통해 온다는 확신이 있어요.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만.”

박 집사의 잔잔한 이야기는 봉숙의 마음에 폭탄으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란 말인가. 백 부장이 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듯 박 집사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숙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고, 그렇다고 어떤 일을 한 것도 아니어서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목사님은 우리 엄마랑 이름이 같아요. 목사님은 봉 숙, 엄마는 허 숙이거든요. 저는 그래서 더 좋아요. 엄마를 만나러 오는 것 같거든요.”

수진이 자기 엄마에 대해 하는 말이 봉숙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그럼 내 이름이 숙이라는 것이 수진을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이네. 그러나 내 이름이나 수진이 엄마 이름이나 모두 부모가 지어준 것일 뿐. 맞아, 내가 기여하거나 생각한 바는 하나도 없는 거지! 그래, 나와 상관있는 일이 아니야. 뭔가 착각들을 하고 있어.’

표정이 일그러지는 봉숙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수진을 향해 박수를 쳤다. 


수진 씨, 오늘 와서 반가워요.     

사람들이 가고 경희와 둘이 남게 되자 봉숙은 느닷없이 피곤했다. 생각 같아서는 경희와 한바탕 말싸움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럴 기운도 없었다. 잠시 누워야겠다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듯 잠이 쏟아졌다. 놀란 경희가 간이침대를 펴고 봉숙을 눕게 하려는 데 이미 잠에 취해 있었다.


“어머, 얘 잠들었나 봐. 봉목사. 집에 가서 자야지. 어떡해.”

하는 수 없이 경희는 무릎 담요로 봉숙을 덮어주고 창문 쪽으로 갔다. 잠든 봉숙을 놔두고 집에 갈 수도 없었다. 불면증으로 나날이 귀신같아지더니 무슨 일이래. 

경희가 흔들의자로 다가가 주저앉자 의자 어디에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원찮은 의자를 버리지도 못하는구나. 왜 자기 인생까지 삐걱거리게 해. 속상하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책로를 무심히 보던 경희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한재상이었다. 물난리 때보다 더 수척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말라가다가는 곧 막대기가 되겠네. 송장이 따로 없군. 저 노인네가 오늘은 무슨 일이야. 

경희는 한재상이 반지하로 들어올세라 가만히 문을 밀고 산책로로 나갔다. 자기 키 만 한 지팡이의 중간을 잡은 한재상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경희를 바라봤다. 지나가는 바람에 한재상의 엉긴 머리카락이 너풀거렸고 경희의 실크원피스가 하늘거렸다. 


“목사는?”

다짜고짜로 한재상은 경희에게 물었다. 봉숙은 어디 가고 네가 흔들의자에서 나오느냐는 투였다.  


“오랜만이네요, 영감님. 여긴 무슨 일로?”

한재상의 말을 묵살하고 경희는 그의 목적만 물었다. 


“목사는?”

한재상은 톤을 높여 물었다.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으나 거슬렸다. 


“봉목사가 영감님 친구도 아니고, 왜 찾으시는데요?”

경희도 지지 않고 대꾸했으나 한재상은 뚜렷한 눈길로 반지하를 훑었다. 


“자나? 죽었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죽다니요?”

경희가 화난 목소리로 받아내자 한재상은 히죽 웃었다. 그 바람에 치열이 형편없이 무너진 그의 잇속이 드러났다. 거의 송장 수준이군. 경희는 얼른 외면했다. 


“목사가 잠이나 자고 있으니 죽은 거지. 의자에서 맨날 졸더니 아예 자리 펴고 누웠구먼. 쯧쯧. 여기 좀 앉아 봐. 목사 친구.”

한재상이 지팡이로 벤치를 가리켰다. 거친 낙엽이 수북한 벤치에 앉기에 경희의 실크 원피스는 너무 얇고 부드러웠다. 한재상이 지팡이로 낙엽을 훑어내자 경희도 하는 수 없이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한재상은 앉지 않고 경희의 맞은편에 지팡이를 의지하고 섰다. 꼬장꼬장한 몸이었지만 너무 야위어서 안쓰러웠다. 경희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저 노인은 누구인가.


“목사가 아픈 모양이네. 요즘 통 빛이 없던걸.”

한재상이 모를 소리를 했지만 경희는 놀랐다. 이 노인네가 봉숙이 아픈 걸 어떻게 알까.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빛이라뇨?”


“밤이 돼도 불을 안 켜고 있더라고 이 사람아. 친구가 그것도 모르나?”

경희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한재상을 훑었다. 이 노인네는 매일 저녁 여길 어슬렁거렸다는 얘긴가? 위험한 인물인 게 맞아. 봉숙 목사야.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영감님은 매일 오시나요? 여길? 왜요?”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매일 반지하를 들여다보는지. 

한재상은 눈길을 하늘로 돌렸다. 비행기가 지나고 있었고 흰색 비행운이 짙푸른 하늘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때로 바람에 낙엽이 후드둑 떨어져 지나던 어린아이들은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편안함은 바깥이었고 반지하에는 봉숙이 잠들어 있었다. 경희는 자기도 모르는 불안함에 반지하를 흘끔거렸다. 


“목사 깨워. 일을 해야지, 일꾼이. 그냥 놔두면 졸거나 자다가 인생 끝나는 거야.” 

한재상은 눈을 계속 하늘에 둔 채 경희가 듣거나 말거나 남의 얘기하듯 했다. 


“무슨 말씀이 그래요? 일꾼이라뇨? 봉목사가 무슨 사람들 뒷수발이나 하는 사람인가요? 무례하십니다.”

경희는 경멸하듯 한재상을 쏘아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치맛자락이 낙엽에 걸려 올이 나갔다. 신경질적으로 옷자락을 털며 반지하로 들어가려는데 한재상이 막대기로 땅을 서너 번 쳤다. 


“목사가 종이 아니란 얘긴 처음 듣네, 아줌마한테서. 목사가 종이지 그럼 상전인가? 종이 종 할 일을 해야지 무슨 건방진 짓거리야. 어떤 놈은 술로 처죽어가고 있고 어떤 년은 정신병으로 매일 목을 맬까 말까 하는데 뭐 하냐고? 잠이 와? 종이 딴 짓거리만 하고 있으니 주인이 가만 놔 둘 리가 있나. 에구구.”

한재상의 호령 소리에 경희는 주눅이 잔뜩 들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출입문 고리만 잡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기도, 반지하에 들어가기도 두려운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목사 깨워서 먹이고 좀 쉬게 해. 힘이 있어야 일을 하는 법이니까. 내가 한 말 고깝게 생각지 말아. 목사한테 일러바치면 아마 맞는 말이라고 할걸?”

한재상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차분하게 말을 마치고 기우뚱거리며 산책로를 지나갔다. 그가 짚은 막대기가 조금 전의 충격으로 중간쯤이 부러져 형편없이 줄어들어 있었다. 한재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경희는 누구에게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저 노인은 누군데 이곳의 사정을 다 아는 듯이 말을 할까?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아는 게 분명해. 봉숙은 알고 있을까? 저 노인의 이야기를? 내가 어디까지 소화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까? 보통 노인네가 아닌 게 확실해. 귀신이라도 들렸나? 미친것일까? 그러기엔 너무나 멀쩡하잖아.’ 

경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반지하에 들어서서 아무렇게나 흔들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는 다시 삐걱거렸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손상이 된 그녀의 실크 원피스는 수선을 해야 할 정도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신경이 쓰였겠지만 속이 시끄러워 원피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어두워져도 봉숙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희는 혹시나 싶어서 봉숙의 코에 귀를 대어 보았지만 편안한 숨소리만 고르게 들렸다. 언제 일어나려나. 아무래도 한재상 노인의 말대로 좀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경희는 현관 쪽에 치워둔 칠판을 꺼냈다. 얼마 전 경희가 매직으로 써놓은 글이 그대로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문을 닫습니다. 

     회복되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풀잎교회 봉숙목사>  

    

‘이걸 내놓아야 하나? 지금은 아무래도 쉬어야겠지. 쉰다기보다 정리는 좀 하고 가야겠지 봉숙아. 그러자.’

경희는 먼지만 털어내고 칠판을 현관 밖으로 내놓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곤 아무런 반응도 없이 지나갔다. 검은 하늘에 손톱달이 돋아나 있었고 가로등 빛이 달을 묻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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