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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27. 2024

3. 사람들

봄비가 내리는 월요일이었다. 

월요일은 봉숙이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었기에 웬만해선 외출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꽃샘추위로 사람들은 잔뜩 움츠린 채 바람같이 지나다녔다. 아파트의 창문으로 분주한 사람들의 출근길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왼쪽을 바라보니 오래전 찍은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이 군대에 가기 전이니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잇속 고른 것 외엔 볼품없는 남편은 활짝 웃고 있었고, 아이들은 한없이 젊었다. 가운데 자리 잡은 친정 엄마는 지금이라도 ‘숙아’라고 부를 듯 입 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저 사진 중에 이곳에 남은 이는 나 하나구나.’

드나들며 늘 보는 사진이었으나 새삼스러웠다. 어제의 연기 때문이었을까.

비와 함께 공연히 우울해졌다.

      

“오늘 쉬는 날이라 집에 있겠거니 하고 그냥 왔어. 없으면 반 지하에 가면 있겠지 뭐 하는 생각으로, 맞지?” 

경희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를 감싼 은은한 향내와 함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지 싶다. 이실직고하게 친구.”

과일을 썰어놓고 망고의 뼈를 핥아먹으며 봉숙이 농담하듯 말했다.

       

“야, 야. 먹지 마. 왜 뼈다귀를 핥고 그래. 개도 아니고.”

경희의 말에 핥던 단물이 기도로 들어가 봉숙은 한참을 캑캑거렸다. 

     

“내가 고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느닷없었다. 사래 때문에 눈알까지 벌겋도록 기침을 하다가 봉숙은 뚝 기침을 멎었다. 

      

“고향? 너나 나나 잃어버릴 고향이 어딨어? 이상하네?” 

    

“그러게. 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지.”     

경희는 서울 토박이였고 시골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전라남도에서도 상당히 구석진 시댁에 갈 때마다 경희는 투덜거렸다.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해도 고집을 안 꺾으셔.’ 그녀의 시부모는 성공한 아들의 옆으로 가기보다는 고향에 남기를 원했다. 그래서 경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골을 방문해야 했다. 그녀의 사업가 남편은 고향에 여러 가지 시설 기부나 장학금을 전달해서 장한 고향의 아들이었다. 사실 경희도 그런 시선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봉숙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경희가 고향 타령이라면 아마도 시댁이 있는 그곳이리라.      

“그게 참 이상하더라. 시아버님 돌아가시고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시어머님이 요양원으로 가시고 나서는 그 집이 이젠 텅 비었구나 생각되더라고.”   

  

“당연히 빈 집이 되겠지. 그래서, 네가 가서 살기라도 하게?”

봉숙이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또 다른 망고 뼈를 발라먹고 있었다. 

경희는 봉숙의 뼈 핥기를 내 버려둔 채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드디어 그 집이 비었구나 하면서 좋아했거든. 나의 시집 걸음도 끝이군!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초록색 나무 대문이 닫히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의 창문마저 닫힌 광경을 보니까 마음이 이상했어. 엄청 쓸쓸하게 느껴지더라고. 하마터면 울 뻔했다니까. 이게 무슨 조화니? 용한 네가 설명 좀 해 봐.”

경희는 생각보다 충격이 큰 것 같았다. 과일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봉숙은 망고 뼈를 내려놓고 가만히 경희를 바라보았다. 경희는 동갑이라고 하기엔 너무 고왔다. 줄기세포 치료를 받는다더니 저러다가 베이비가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곱고 젊은 경희가 슬퍼하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고향 문제로. 

정이란 게 사람 사이에만 있는 건 아니잖니. 머리빗 하나도 쓰다가 없어지면 서운한데 하물며 네가 30년을 오간 곳인데 경희야. 태어나 살면서 그렇게 오래 다닌 곳이 어디 있었을까? 당연히 너에겐 고향이 되어버린 거야. 넌 이제 그 고향을 잃어버린 게 맞고. 아니, 고향이라기보다 고향 이미지라고 해야겠지. 

봉숙의 머릿속에 온갖 문장이 떠돌았다. 그러나 없는 실체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우울증이라도 온 걸까?”

경희는 울 듯한 표정이었다. 너는 그 표정까지도 예쁘구나, 경희야.

     

“우울증 아니고, 아닌 건 네가 잘 알지. 네가 우울증 타령을 한두 번 했니? 됐고, 내가 고향을 찾아 주지.”

봉숙이 정색을 하고 얘기하자 경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야, 교회 오라고? 너네 교회 아무도 없는데 나 혼자 가서 뭐. 둘이?”

썰어 놓은 망고의 미끄러운 피부가 경희의 포크를 벗어나 접시 바깥으로 떨어졌다. 경희는 새로운 망고조각을 끼워 들었고 봉숙은 접시를 벗어난 망고를 손으로 주워 먹었다. 경희의 시선이 어이없이 흔들렸으나 서로 개의치 않았다.  

    

“아무도 없진 않았어. 오가면서 나에게 먹을 것을 주더라고 한결같이. 내가 먹방을 찍게 생긴 외모이긴 하나 정말 신기한 일 아니니?”     

봉숙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소리를 빽 질렀다.   

   

“너, 또 뭐, 이상한 빵, 뭐 그런 거 받았어? 수진이, 걔 또 왔었니?”

수진이를 기억하는구나. 봉숙은 놀랐다. 자신에게도 희미해진 이름 수진이를 경희의 입에서 듣다니.

     

“아니, 아니 아냐. 그런 얘기가 아냐. 아직 아무도 없어. 그게 현실이야.”

봉숙은 김밥이니 딸기우유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듣는 순간 경희는 잔소리의 바다로 그녀를 침몰시킬 것이다.  

    

“봉숙아, 아니 봉목사야. 내가 간절히 바라는 데 작전을 바꿔 봐. 말하자면 프로모션을 제대로 하자는 거지.”

사업가의 아내답게 경희는 봉숙의 교회를 사업장으로 바꿔버렸다.  

    

“너 계획이 뭐야? 사람들 모여야 뭘 할 거 아냐? 이렇게 맨날 개점휴업이면 뭣 하러 문 열고 앉아 있니?”

어찌나 열을 내는지 봉숙은 야단맞는 것 같았다. 

     

“잠깐, 경희야. 사람을 모으는 게 목적은 아냐. 내가 장사꾼도 아니고” 

    

“미안, 취소. 알았어. 그런데 하여튼 사람들이랑 같이 교회 하려는 거잖아?” 

    

“아니, 교인을 만드는 게 목적은 아냐. 너처럼 고향 잃었다고 하는 사람과 고향 얘기도 하고, 자기 정체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들과 얘기도 하고, 뭐,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들과 친교도 하고 그런 거지. 우리 남편이 하던 일.”

봉숙의 이야기에 경희는 뒷목 잡는 시늉을 했다.

      

“돌겠네. 여기서 네 남편 얘기는 왜 나와? 하여튼, 내 말이 고향을 찾아주던, 자기 꼬락서니를 알게 해 주던 하여간 사람이 와야 할 것 아니냐고.  ”

맞는 말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 접점으로 카페를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비싼 원두를 사들여 가면서.  

   

“그러니까 말하자면, 카피를 이렇게 하는 거야. 예를 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시나요? 그 답을 알려드립니다.’ 이런 거. 이야! 멋지지 않니?”

경희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봉숙이 망고 뼈로 쟁반을 탁 쳤다.  

   

“경희야, 그건 아니지. 내가 무슨 점이라도 쳐주는 점쟁인 줄 알겠다. 못 해.”

너무 단호했나 싶어 슬그머니 경희를 살피는데 그녀는 표정이 확고하다 못해 흥분한 것 같았다. 보얀 얼굴에 홍조가 돌아 더욱 예뻤다.  

    

“봉숙, 잘 들어. 지금 네가 하는 카페니 커피니 하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 아냐? 본질은 놔두고 다른 소리를 써놓고 있잖아. 네 하나님께 물어봐라. 너는 맞고 나는 틀렸는지. 잘 생각해 봐. 대박 날 경우를 생각해서 계획도 좀 세워놓고.”     

이후에도 경희는 한참을 씩씩거리며 떠들었다.

 

고향을 찾아봐.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도 모르는 나를 알려드립니다. 위로가 필요하신가요? 마음을 찾아 드립니다. 와, 나 천잰가 봐. 카피라이터 본성이 나오네. 

한동안 혼자 말하다 지친 경희는 다시 차분하게 고향을 잃어버린 얼굴로 돌아갔다. 

     

“그래서, 봉숙아, 내 고향을 어떻게 찾아줄 건대? 딴소리 말고.”

경희의 말이 끝날 때까지 남은 망고를 다 먹어치운 봉숙은 오랜만에 포만감을 느꼈다. 역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먹는 일이지. 인간만이겠어?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된 일이니까.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잖아. 딱 그만큼만.  

    

“네가 고향을 만드는 데 30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금방 찾겠니?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희는 간지럼 타듯이 까르르 웃었다.

      

“됐다. 됐어. 내 고향 안 찾아도 되니까 사람 모을 생각이나 하셔.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결국 경희는 고향을 잃어버린 상태로 돌아갔다. 그녀가 며칠이나 그 우울감을 갖고 있을까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며칠 이내로 자신의 말을 확인하러 올 테니까. 정작 고민에 빠진 것은 봉숙이었다. 

     

‘정말 카피를 바꿔봐야 할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소를 끝낸 봉숙은 커피를 들고 흔들의자로 갔다. 어제 경희가 떠들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머리를 흔들곤 들여놓은 입간판을 바라봤다. 일요일에 썼던 내용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주일입니다. 

예배의 자리로 오십시오.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누구든지’에서 산수유노인 생각이 났다. 누구든지 오라고 하곤 쫓아낸 꼴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봉숙은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 아니지. 그 노인은 밥을 먹는 게 목적이었어. 그건 아니지. 그럼 뭔데? 밥을 같이 먹는 것이 그 사람에겐 필요한 일이었어. 생각이 생각을 불러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잘못한 것이 분명한 데 변명하고 있구나.      

남은 커피를 창틀에 놓은 채로 눈을 감았다. 흔들의자의 안온함에 잠이라도 오련만 마음은 계속 시끄러웠다. 혹시라도 연기 속의 음성을 기대하는 걸까? 정신 차리자. 그건 꿈이었어. 그렇지 않다 해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사모님!”

출입문 쪽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봉숙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눈을 들었다. 덩치 큰 남자가 입구 쪽에서 들어서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저 2층에서 왔어요.”

순간 봉숙은 그가 백부장인 것을 알아차렸다. 이전에 2층 여자를 통해 김밥을 보냈던. 

서둘러서 출입문 쪽을 향해 가는 데 남자가 손에 든 무엇인가를 건넸다. 

    

“이거 치킨이에요. 오늘은 우리 회사 치킨 데이라 치킨 먹는 날이거든요.”

남자가 건네는 비닐에는 건너편에 있는 파O이스의 상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 회사는 여러 가지를 먹는구나. 자기들 메뉴를 나한테까지 갖다 주다니 복지가 괜찮은 모양이네.   

   

“아니, 지난번엔 김밥을 보내 주셔서 감사했는데 인사도 못 드렸네요. 계속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들어와 차라도 하시죠.”

봉숙의 말에 남자의 얼굴은 어리벙벙해졌다. 

     

“김밥요? 제가 보내지 않았는데요?”

생각이 얽힌 것은 봉숙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부장님이 드시래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2층의 그녀가.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김밥을 먹기는 해요.”

남자는 굳이 누가 보냈느냐는 질문도 하지 않고 치킨을 받으라고만 했다. 

     

“오늘은 아직 칠판이 안 나왔네요. 제가 그 글씨 읽는 게 낙인데요.”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칠판이 있는 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2층 사람들 중 두 번째의 인물이 그녀의 반 지하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지. 이번엔 내가 이야길 해야지. 봉숙은 남자에게서 치킨 봉지를 받아 들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웃어야지. 

그녀의 남편은 놀리곤 했다. 당신은 웃지 않으면 무서워. 웃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어떤 글씨가 부장님께 낙일까요?”

웃는 얼굴이 더 무섭진 않을까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지나치게 크게 웃으면 입이 비대칭으로 찌그러지고 눈가의 주름은 쥘부채 같았으니까. 남편의 농담을 진담으로 듣다니. 

마냥 웃고 있기도 힘들어 얼른 미소를 지운 채 방금 내려놓은 커피를 한 잔 권했다.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주춤거리며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큰 체격처럼 이목구비가 큼직한 남자는 피부 빛깔마저 어두워서 중동 사람 같았다. 

      

“이 과장이 김밥을 드리고 싶다고 몇 번 얘기하더니 결국 가져왔군요. 이 과장이 좀 그래요. 이혼하고 우울증으로 많이 힘들어하거든요. 저랑은 사돈 관계지만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지요. 많이 도와주세요.”

남자는 커피를 순식간에 숭늉처럼 들이마시고 미간을 약하게 찌푸렸다. 쓰구나.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야 얼마든지요. 그런데 한 번 오시곤 잘 안 내려오시네요. 자주 좀 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부장님도 놀러 오시고요, 믹스 커피도 있어요.”

봉숙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반갑게 믹스커피를 청했다. 자기는 원두 체질이 아니라며.   

  

“저는 스무 살 먹은 아들이 있는데 제 아들이 아니랍니다.”

다짜고짜로 제 아들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 그런가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자 남자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신은 결혼한 일은 없는데 한 여자와 살고 있고 여자와 만났을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고. 그래서 출산 후 아들로 키우고 있단 얘기였다. 남자의 말이 평범하진 않아서 봉숙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의 아이 키운다는 얘길 왜 나에게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2층 여자도 묻지 않은 얘기를 스스로 다 하지 않았던가? 조금 기다리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남자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믹스 커피를 아껴가며 맛있게 마셨다. 

    

“이상하죠? 다 미쳤다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라는 게 있어요. 저도 왜 남의 아들을 키우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정들고 이쁘더라고요. 지금 군대 가 있어요. 해병대.”

남자는 마치 해병대라는 군대 조직에 아들을 넣기 위해 기른 듯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이 사람이 알코올 중독이라고 한 것 같은데?’

봉숙은 2층 여자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여자는 우울증, 남자는 알코올 중독이라. 

    

“이 과장이 제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하죠? 맞아요. 술을 안 마시면 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퇴근하면서 매일 술을 두 병씩 사가지고 가죠. 두 병 이상은 안 마셔요.”     

봉숙의 예상대로 남자는 다른 얘기들도 했다. 술 마시는 얘기부터 지금은 혼자 산다는 얘기, 조금 있으면 아들이 휴가를 나온다는 얘기. 아침마다 이 과장이 자기 집 창문을 부서질 듯 두드려야 일어난다는 얘기까지.

아니, 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해놓고 알코올 중독이 됩니까? 쯧쯧. 

그러고 싶었으나 차마 초면인 남자의 면전에다가 할 얘긴 아니었다. 또 남자의 알코올 중독이 떠나버린 아내와 해병대 아들이 원인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네. 뭐.”

입 다물고 그냥 있기가 머쓱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짜증 날 정도로 이상한 사람들이 내 이웃이구나. 바로 위층에 사는.  

    

“괜찮아요. 그래도 내 동생이 일자리는 주니까 먹고는 살아요. 어머니도 아직 살아계신데 제가 제일 걱정이시죠. 사모님, 치킨 드세요. 여기 치킨 먹을 만해요. 아, 그리고 글씨 쓰셔야죠. 이따가 퇴근하다가 보게요.”

남자는 마땅한 말을 찾고 있는 봉숙을 남겨두고 저벅거리며 나갔다. 치킨의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 잠깐 시장기를 느끼게 했다. 어제는 망고를 잔뜩 먹고 포만감을 느끼더니 위장이 드디어 본능을 찾아가는구나 싶었다. 

남자와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던 봉숙은 다시 흔들의자로 왔다.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글씨 타령이야.’

의자에 따라 몸이 흔들리며 정신이 아스라해졌다. 잠이 오나?  

   

‘봉숙아, 프로모션을 해야 한다고. 결국 사업이잖아? 사람을 모으는 사업? 그러니까 간판을 바꾸라고, 답답한 친구야.’

경희의 허스키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한참을 잠인지 아닌지 헤맨 끝에 봉숙은 칠판 앞으로 가서 보드 마카를 들었다. 어제 썼던 글을 박박 지우고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써 내려갔다. 

     

<빛나는 봄에 당신도 빛나나요? 

혹시 모르겠거든 편하게 오세요. 

당신의 빛을 함께 찾아보게요.> 

     

글쎄, 이러한 말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그녀 자신도 아리송했다. 2층의 남자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 번 물어봐야 하나? 남자는 왜 글씨를 읽는 게 낙일까? 하여튼 기다려 봐야지 뭐. 칠판을 들고 밖으로 나가 내려놓는데 옆 집 순댓국집 사장이 나와 있었다.

 키가 크고 몸집도 뚱뚱한 순댓국집 사장은 아주 작은 여자와 함께 음식점을 했다. 여자는 거의 밖에 나오지 않아서 퇴근할 때 주방너머로 머릿수건이 보이는 정도였다. 봉숙은 막연히 그녀가 사장의 아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댓국집 사장은 봉숙의 칠판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언제 한 번 오세요. 국밥 한 그릇 대접하게요. 이웃인데.”

생각지 않은 말에 봉숙은 놀라서 짧게 대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럴게요.”

서둘러 반 지하로 내려오는데 이웃이란 단어가 목에 걸린 듯 불편했다. 이웃이라고 국밥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 저 사람을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구나. 아니, 별 관심도 없었어. 경희야, 카피나 간판이 문제가 아니다. 총체적이야.

봉숙은 후다닥 나가 입간판을 들여놓고 내용을 깨끗이 지웠다. 망가진 화장을 지우듯 말끔해진 칠판이 후련해 보였다. 아무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빈 칠판을 보며 보드 마카를 까딱이는데 2층 남자의 말이 생각났다. 글씨 읽는 게 낙이에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큼직하게 한 단어만 적었다.  

   

<풀잎>     

    




가늘고 긴 그림자가 실내로 길게 꺾여 들어왔다. 서쪽으로 난 출입문이 빚어내는 저녁 무렵의 흔한 광경이었다. 퇴근 채비를 하던 봉숙은 그림자가 움직이자 가만히 지켜봤다. 누가 왔네. 이 저녁에. 잠시 후 가라앉은 공기를 가볍게 헤치며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진 씨!”

반가움이 묻어나는 외침에 그림자의 주인은 잠깐 멈췄다. 어깨에 걸친 가방 외에 양 쪽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멈춰 선 사람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봉숙이 그녀 쪽으로 가기에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냥 가 버릴 수도 있잖아. 

봉숙은 그녀처럼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그녀의 소리가 먼 곳에서 나는 듯 아련했다. 그러나 의외라는 뜻이 담겨있는 톤이었다.    

 

“그럼요. 여기 처음 방문해 주신 귀한 분인데요. 빵도 가져다주시고.”

빵 얘길 하면서 봉숙은 찔끔했다. 그녀의 빵은 아직도 냉동실에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아, 예. 빵을 다 드셨을 것 같았는데 시간 내기가 어려웠어요. 여기 몇 개 구워왔어요. 소금빵이요.”

수줍게 건네는 빵을 호들갑을 떨며 봉숙은 받았다. 그리고 바로 열어서 한 개를 꺼냈다. 연갈색으로 구워진 빵에 직육면체 모양의 작디작은 소금 조각이 몇 개 얹혀 있었다. 소금이 아니라 보석으로 보일만큼 정갈하게 빛났다. 이게 말로만 듣던 소금빵이구나. 빵에 소금을 얹어 먹다니 별 일이야.  

   

“지금 먹어도 되겠죠? 마침 출출했거든요.”

점심을 거른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히 배가 고팠다. 

수진을 앞에 앉혀 놓고 커피를 내리고 냉장고의 과일을 꺼내왔다. 경희가 사다 놓은 체리가 한 팩 있었다. 수선을 떨며 브런치 같은 한 상을 차려내자 수진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눈은 다소 돌출되어 있어 눈망울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고 속눈썹은 곧게 늘어져 눈 밑에 닿을 듯했다.

      

“아직 저녁 전이죠? 이렇게 간단히 먹죠. 나도 혼자인데.”

수진은 아무 대답 없이 커피만 조금 마시다가 그마저 내려놓았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셔서요. 엄마는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거든요.”

의외의 말에 봉숙은 의아한 눈빛으로 수진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엄마는 저를 영진이라고 불렀어요. 군대에서 죽은 우리 동생이요.”

아무 맛도 없는 소금빵을 조금씩 떼어먹던 봉숙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쳤는가 보다. 엄마가.


“동생이 죽고 엄마는 아팠어요. 외할머니 얘기로는 전부터 그랬대요. 저를 만나면서 폐쇄병동을 몇 번이나 드나들다가 결국 엄마도 동생 곁으로 가셨어요. 작년에.”

다시 커피 잔을 들고 몇 모금 입술을 축인 수진은 얼빠진 표정의 봉숙을 가여운 듯 바라봤다. 

    

“엄마가 유일하게 좋아하셨던 게 제가 만든 빵이었거든요. 소금빵을 가지고 면회 가던 날 소식을 들었죠.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엄마에게 저는 끝까지 영진이었어요.”

수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며 봉숙은 들고 있던 소금빵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아, 나한테 왜 이러니. 수진아. 내가 그 이야길 듣고 어떻게 빵을 먹겠어. 너도 참 알 수 없는 아이로구나. 

봉숙은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그렇게 마시는 법이 없었을 커피는 매우 썼다.     


“아, 그런데 왜 어머니는 수진 씨를 동생이름으로 부르셨을까요? 힘들지 않으면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수진은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머금고 한참을 있었다.

      

“엄마는 미혼모였어요. 열아홉에 저를 낳았대요.”

말갛고 큰 눈으로 봉숙을 빤히 바라보며 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봉숙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요즘 미혼모가 대순가. 저렇게 잘 자랐으니 감사할 일이지. 인구절벽 시대라는데. 뜬금없는 애국심에 화가 나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메커니즘인가 이 머릿속은. 

     

“섬망 증상이라고 하는데 뭐, 그전에도 그랬어요.”

수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어떤 동요도 없었다. 남의 얘기를 하고 있나 착각할 정도였다. 오히려 봉숙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국화차 한 잔 할래요? 마음이 편안해져요.”

봉숙이 들썩거리며 일어서자 수진은 예의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목사님, 저 지금 아무렇지 않아요. 괜찮아요.”

다시 주저앉으며 봉숙은 입을 꾹 닫아 버렸다. 편안해지고 싶은 것은 자신인 것 같았다. 뭐가 불편했을까. 

그런데 왜 여길 왔죠? 내가 뭘 해 주면 좋겠어요? 묻고 싶은 말이었지만 마음이 편하다는 데 굳이 물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지속적으로 와 주면 좋겠어요라고 얘길 해야지. 아니, 아냐. 그럼 발걸음을 끊을지도 몰라. 어쨌든 뭔가 끌림이 있으니까 온 거 아니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수진은 소금빵과 또 귀리를 잔뜩 섞은 바게트빵을 내려놓고 갔다. 둘 다 건강에 좋은 빵이니 꼭 드시라는 부탁과 함께. 순식간에 빵 부자가 된 봉숙은 당장이라도 경희를 불러내고 싶었다. 내 손님이 준 빵이 어때서?라고 따지며 수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를 잔뜩 받은 학생처럼 친구를 불러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경희는 저녁 준비로 바쁠 시간이었다.      

결국 혼자가 된 봉숙은 흔들의자로 갔다. 캄캄해진 하늘에 손톱만 한 달이 걸려 있었다. 작은 크기에도 온 존재를 드러내는 달을 보며 수진의 편안한 얼굴을 생각했다. 약해 보이긴 하지만 현재가 편안하고 아무렇지 않다면서 왜 이 지하를 찾아 들어왔을까? 수진이 바라는 바가 있을 텐데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수진이 반응한 것은 오직 그녀의 이름이었다. 엄마인 허 숙이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다는 이름.

봉숙은 수진이 처했었던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마도 출생 직후 수진의 양육은 외할머니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수진의 엄마라는 허 숙은 죽기 전까지도 수진의 존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게 가능할까? 동생이 있었다는 것은 허 숙이 결혼을 했다는 것인데. 그 아이의 죽음으로 미쳐버린 엄마는 아마도 엄청난 애착관계 속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수진에게는 전혀 없었던. 그런데 수진은 죽기 전의 엄마를 만나 빵을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폐쇄병동에 있던 엄마에게 빵이라.  

    

‘참 알 수가 없네요.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봉숙이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쳐 박고 어떤 식이든 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생전에 남편은 그랬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기다려. 어떤 판단도 하지 말고. 물론 나서서 도와주겠단 오지랖도 말고. 그냥 곁에 있으면 돼. 그게 우리 일 아니겠어? 그러다 보면 시간이 다가오지. 이해받고 이해되는 시간. 

 손톱 달마저 창 밖 어딘가로 사라질 무렵 봉숙은 일어섰다. 잠깐의 현깃증과 함께 한숨이 나왔다. 후.      

당신이 뭘 알겠어. 미혼모나 그 딸이나 만난 일이 없었잖아. 더군다나 수진이처럼 감정이 복합적이어서 뭐가 진실인지 혼동되는 그런 일을 얼마나 겪었다고 그래? 굉장히 다층 구조야. 내가 그냥 기다리면 된다고? 조금 웃기시는 거 알지? 

곁에 있다면 눈을 흘기며 따지기라도 할 것이었다. 그러면 남편은 조용히 그녀의 범위를 벗어나 서재로 숨을 것이다. 그리고 묻겠지.     

그럼 어떻게 하게?

     

봉숙은 가로등이 켜진 창밖을 한참 노려보다가 생각난 듯 수진이 준 빵을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었다. 바로 먹을 것 같진 않았고 어쩌면 오랫동안 먹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에서였다. 

밖으로 나오자 순댓국집도 뼈다귀 해장국집도 정리하는 중이었다. 코로나 이후로 저녁 장사는 현저히 줄었다는 게 느껴졌다. 순댓국집 앞을 지나 뒷길로 접어드는데 한 여인이 가로등 기둥에 기대앉아 봉숙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녀가 순댓국집 사장의 부인이라는 짐작을 했지만 목례만 한 후 조용히 지나쳤다. 

아직 식당엔 불이 켜져 있던데 저 여인은 왜 여기 주저앉아 있을까? 아, 모르겠다. 그때였다. 봉숙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사님 맞죠?”

반 울음 섞인 소리로 주저앉은 그녀가 물었다. 봉숙은 누가 뒷덜미를 잡아끌듯 그녀에게로 향했다.   

   

“예, 여기 풀잎교회......”

참으로 오랜만에 교회 이름을 발음하자마자 그녀의 소리가 이후를 막았다.  

    

“아녜요. 담에 한 번 갈게요.”

여자는 힘겹게 허리를 펴고 일어나 자신의 불빛 환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쫒고 있는 봉숙의 눈에 불을 하나씩 끄고 있는 거대한 사장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여자가 문으로 들어가자 식당은 온전히 어둠이 내려앉아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 나를 보고 있어. 내가 보든 못 보든.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한기가 드는 것처럼 몸이 위축됐다. 

공용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향해 가는 봉숙의 움츠린 뒷모습을 식당의 여자가 가만히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예상대로 수요일에 경희가 들이닥쳤다. 커다란 쇼핑백에 무언가 가득 들어 있었다. 또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애용하는 명품용 쇼핑백이 아니었다. 취향이 바뀌었나 하는데 경희가 앉자마자 물건을 풀어놓았다. 물건은 각종 파티 용품이었다. 조화 꽃이며 리본, 각종 풍선과 바람 넣는 펌프, 유리창 데코용 반짝이풀, 색색의 플라워 테이프 등이 쏟아졌다. 파티하러 왔니? 이 요란한 것들이 다 뭐야?    

  

“프로모션용이야. 생각은 좀 했겠지? 일단 하드웨어부터 바꿔보자고.”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경희를 보고 있는데 현관문 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언니!” 

막내 동생 선화였다. 봉숙의 뜨악한 표정은 본 듯 만 듯 선화는 경희 쪽에 살갑게 인사를 던졌다.


“어, 언니도 와 있었구나. 잘 됐다. 그렇잖아도 언니 보고 싶었거든.” 

그러나 경희는 마지못해 눈인사를 할 뿐이었다. 내가 왜 보고 싶어. 마치 그런 표정이었다. 

     

“아니, 언제 온 거야? 우간다에 있다고 하던데?”

선화의 요란한 화장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으며 봉숙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사실 우간다 소식도 주변을 통해 들었을 뿐 선화를 보는 것은 거의 1년 만이었다.  

    

“언니 교회 한다며? 그럼 아무래도 내가 필요할 것 같아서. 형부도 없는 데 누구라도 힘이 되어 줘야지. 여자 혼자 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 내가 나가서 전도도 하고, 반주도 하고 그러지 뭐. 지금 교인 얼마나 있어요?”

쉬지 않고 떠드는 선화에게 경희가 예고 없이 끼어들었다.  

    

“교인은 하나도 없고, 업종은 변경할 거니까 안 와도 될 것 같은데?”

경희의 말에 선화는 무슨 뜻이냐며 마스카라가 잔뜩 묻은 속눈썹을 몇 번 깜빡였다. 

봉숙이 저지할 틈도 없었다. 

    

“교회 아니고 다른 거 하려고 그래. 그러니 그냥 가 봐라.”

경희의 비아냥대는 말투에 선화는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형부가 그러라고 그 많은 보험금을 다 언니한테 넘긴 줄 알아요? 영혼을 구원해야지. 언니는 저 죽어가는 영혼이 불쌍하지도 않아? 기가 막혀. 경희 언니도 그렇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정성껏 칠했을 불그레한 입술에서 쉴 새 없이 말이 나왔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래도 중간은 가는 미모인데 딱하다 싶은 생각을 하며 봉숙이 나섰다.  

   

“선화야, 생각은 고마운데 아직 한 사람도 없어. 그리고 경희 말은 그게 아니고.”

봉숙의 말끝에 나른하며 부드러운 소리가 이죽거리듯 끼어들었다. 

     

“얘, 봉선화, 누가 들으면 네 언니가 보험금 횡령한 줄 알겠다. 네가 보험 한답시고 이것저것 다 들게 한 거잖아. 그게 뭐 네 덕분이라고 유세라도 하고 싶은 거니? 우습다 얘, 무슨 죽어가는 영혼? 적어도 너는 그런 말하기 있기 없기?”

경희의 희고 고운 손에서는 바람 넣은 풍선이 강아지 모양으로 꼬아지고 있었다. 봉숙은 경희의 손끝을 유심히 보고 있고 선화는 그런 봉숙을 노려보며 감정을 꾹꾹 눌렀다.  

    

“무슨 소린지. 경희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한대? 얘길 못하겠네. 갈게요.”

봉숙의 배웅을 받는 둥 마는 둥, 선화는 총총 사라졌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선화 쟤는 아직도 저러고 다니니? 정말 싫어. 쟤가 네 동생만 아니면 나랑은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 그동안 뭐 하다가 이제서 출몰한 건데? 또 돈 필요하다니?”

경희는 장미꽃 모양의 풍선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니 경희야. 

     

“그건 아니고. 그리고 내가 줄 돈이 어딨어. 그래도 선교에 얼마나 열심인데.”

갑자기 풍선이 빵 하고 터지자 봉숙은 화들짝 놀라고 경희는 웃어댔다.  

    

“봉숙아, 우리 솔직해지자. 선화를 보면 교회를 다니다가도 그만두고 싶어. 그거 몰라? 쟤가 입만 살아서 맨날 구원이 어떻고 영생이 어떻고 떠드는데 살아가는 꼴 봐라. 그게 무슨 예수쟁이야? 뻥이지.”

경희의 말에 봉숙도 빙긋이 웃었다. 근거 없는 얘긴 아니지. 사업한다고 말아먹은 게 몇 차례였고, 형제들에게 돈 빌리는 게 근 10년간 선화의 행적이었다. 빌려간 돈은 당연히 안 갚았으나 여전히 자기 페이스의 삶은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너, 봉선화 받아들이는 순간 끝이야. 교인들이 있다고 해도 선화는 아냐. 쟤는 종교생활을 즐기는 것뿐이야. 네 동생이지만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냐?”     

여전히 풍선을 접고 꼬아 꽃을 만들어내는 경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잘 아는 네가 교회를 왜 떠났을까? 우리 남편의 죽음? 그래, 물론 그 영향이 크기는 했지. 너나 나나 우리 모두에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경희가 만지는 풍선의 뽀드득 거리는 소리만 낮게 깔렸다. 그때 다시 선화의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참, 언니. 그 얘길 한다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갈 뻔했네.”

건너편에 앉은 경희를 샐쭉한 눈으로 일별 한 후 선화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 이번에 신학교 등록했어. 그래서 기도 부탁하러 온 거야.”

이건 또 뭔 일? 의아하게 선화를 바라보는데 경희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풍선에만 집중하는 경희의 옆모습이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신학교? 돈이 필요하단 얘기를 고상하게도 한다. 

     

“그래? 내가 많이는 못하고 20만 원 네 통장으로 넣을게. 아니다. 너 통장 없지? 가만있자. 선화야, 며칠 내로 다시 와라. 하여튼 한국에 들어온 거잖아.”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희가 툭 끼어들었다.   

   

“내가 줄게, 20만 원.”

경희는 풍선을 던져 놓고 옆에 있는 가방에서 수표를 두 장 꺼냈다. 풍선을 만지던 손은 수표를 들어도 고왔다. 그러나 선화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경희 언니, 그런 식으로 살지 마. 내가 굶어도 언니 돈은 안 받는다.”

씩씩거리며 악을 쓰는 소리가 열린 출입문 쪽에서 들려왔다.      

경희는 한동안 기막힌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 밖의 공기가 쉭 들어와서 만들어진 풍선들을 주변으로 흩어놓았다. 그러나 경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연분홍 풍선으로 꽃모양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머리에 쓸 수 있는 작은 화관도 만들었다. 경희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어떻게 풍선을 터뜨리지 않고 만지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상황이 어지러워 봉숙은 주전자에 전기를 넣고 다기 세트를 들고 나왔다.  

    

“경희야. 너도 선화 알잖아? 그 어려움을 겪고도 저렇게 살아가는 게 고맙지 않니?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야.”     

강아지모양의 풍선과 장미꽃 풍선과 색색의 조화 가운데 앉아 있는 경희는 놀이동산에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장미꽃 풍선을 더 만들지 궁금했지만 지금도 충분해 보였다. 무엇을 하려는 지 짐작할 순 없어도.  

    

“봉목사야. 신앙이라는 게 뭐야? 선화는 자기가 뭘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 너무 자기 확신에 차서 보이는 게 없어. 쟤는 선교지 돌아다니다가 빚쟁이 다 되지 않았니? 그런데 이젠 신학교에 가겠다고? 그럴 시간과 돈이 있으면 일을 해서 빚을 갚아야지. 쟤 아니어도 목사는 차고도 넘쳐. 양심도 없지." 

선화가 경희에게서도 적지 않은 돈을 빌려간 것을 알고 있었으나 경희는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늘 선화를 만나기까지 경희는 선화에 대해 묻지도 않았었다. 미안하다. 내가 왜 네 맘을 모르겠니.     

봉숙은 말없이 다기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쌉쌀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새어 나왔다.  

    

“선화, 쟤도 피해자야. 가족 관계 안에서. 불쌍해.”

찻잔에 찻물을 조르르 따르자 향은 더욱 진하게 퍼졌다. 

     

“너도 알지만 선화는 식구들한테서 늘 뒷전이었지. 막내인데도. 선화가 엄마 눈에 들려고 얼마나 교회를 열심히 다녔니? 인정받고 싶은 거지. 그런데 형부가 목사야. 얼마나 좋았겠어. 그런 엄마와 형부가 다 선화를 떠났어. 늦게 만난 제부는 무신경한 데다, 이혼했으니 뭐.”

녹차로 입을 축이던 경희는 조용히 듣다가 갑자기 제동을 걸었다.  

   

“잠깐. 쟤처럼 욕심 사나운 애를 누가 좋아하겠니? 네 동생이지만 좀 심하잖아. 그리고 말은 바로 하자고. 엄마나 네 남편이 선화만 떠났니? 너는? 너는 더 당사자야.”

경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녹차로 입술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소리가 높아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 그녀를 아련한 눈빛으로 보며 봉숙은 가볍게 웃었다. 너 왜 그래? 소름 돋아, 경희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봉선화, 아버지가 막내라고 꽃 이름을 지어 주었지만 정작 선화는 봉숭아를 싫어했다. 짓이겨져서 사람 손끝에나 붉게 물들여지는 비참한 꽃이라고. 난 그따위 하찮은 꽃은 싫어. 빛날 거야.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그래서 은서라고 기어이 개명을 했다는데 불러보면 사찰인 봉은사가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성이 봉 씨라는 걸 생각했어야지. 어쨌든 다행인지 사람들은 여전히 선화라고 불렀다. 봉선화. 나에 비하면 얼마나 예쁜 이름이니 선화야. 봉숙은 빙긋 웃었다. 다시 올 테지. 아마 다시 올 거야. 너는.     

아무 말 없이 경희의 찻잔에 찻물을 더 부어주는데 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2층 남자의 소리였다. 백 부장이 왜. 

봉숙이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리자 사내 하나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오늘은 왜 아직도 글씨를 안 쓰셨나 해서요. 아, 손님이 계시는구나.”

남자는 안을 힐끗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또 글씨 타령이네.  

   

“뭐니 저 남자?”

경희가 깜짝 놀란 눈으로 봉숙에게 물었다. 혹시 저런 사람들이랑 지내는 거야? 꽤나 익숙한 관계인 것 같은 말본새가 이상하잖아.   

   

“우리 2층이야. 벌써 두 사람 만났어. 이웃 사람들.”

경희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풍선으로 만든 꽃을 입으로 가져가 마치 풍선꽃이 입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여러 가지로 걱정이구나, 식구나 이웃이나. 봉숙아. 앞날이 훤하다. 어쩌니.     

    



봄비가 잦았다. 봄비는 올수록 기온이 오른다는데 아직은 아닌 듯 지하는 을씨년스러웠다. 공기가 너무 서늘하게 느껴져 봉숙은 스탠드 형 전기난로를 켰다. 붉은빛이 실내를 일부 채우니 기분부터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일전에 경희가 만들어놓은 풍선 강아지와 풍선 꽃은 사무실 문에 매달려 시들어가고 있었다. 

오래가진 못할 거야. 그때쯤 다시 해 줄게. 쭈그러들면 버려. 

그러나 봉숙은 사양했다. 

그걸로 충분해. 유치원도 아니고 그렇게 장식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잠깐 관심을 끌 수 있겠지.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자고? 풍선 아트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네가 와서 할래? 네 마음은 알지. 다른 일로 도움을 청하면 그때 도와줘.     

경희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출입구를 근사하게 장식하고 멋진 카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우선은 유치해 보이는 이런 것들로 시작을 해. 그럼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어. 그게 어디니? 아이들 공략하는 게 요즘 시장의 기본 마케팅이야, 봉목사야. 그러나 싫으면 말아야지 뭐 어쩌겠니. 

경희의 심드렁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는 봄비답지 않게 거세져서 제법 땅에 강하게 내리 꽂혔다. 흔들의자가 있는 창으로 비의 군무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잠시 앉았다가 일어서려는데 익숙한 모양의 노인이 보였다. 일전의 산수유 노인이었다. 노인은 어쩐 일로 작은 손수레에 박스를 잔뜩 싣고 있었다. 비가 거세지자 노인은 수레를 멈추고 군청색의 낡은 비닐을 꺼내 수레 위를 덮었다. 그러나 자신은 비를 고스란히 맞아 회색빛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어 작고 볼품없는 두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무슨 일이람. 저 노인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봉숙은 자기도 모르게 유리로 된 산책로 쪽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어르신, 감기 드세요. 일단 비를 피하시죠.”

노인의 작은 수레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수레가 들어가기엔 문이 좁았다.  

    

“아유. 그럼 신세 좀 집시다. 그런데 문이 이게 뭐야. 고양이 문인가. 크게 좀 만들지. 저쪽 문 주차장 쪽에 놓고 오지.”

거 참 영감님, 말 한 번 예쁘게 하시네. 하긴 전에도 뭐 다르지 않았지만. 

마뜩잖은 표정을 애써 감추는데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건물을 돌아 반지하의 출입문 쪽으로 갔다. 그곳은 세 대 정도의 차가 주차할 수 있었고 캐노피도 달려 있었다. 이미 차가 다 차 있었지만 손수레를 놓을 공간은 충분했다. 

얼마만인가. 노인을 처음 만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지만 좀 달라 보였다. 회색 머리칼은 뒤로 묶여 있었고 수염도 여전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커피를 내리며 그를 훑어보았으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 분명 뭐가 다른데.

노인은 들어서자마자 경희의 풍선 장식품을 보더니 와르르 웃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무당집이야? 요샌 유치원도 저렇게 안 해. 치워!”

달라지긴 개뿔. 똑같네.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상냥하게 물었다.   

   

“많이 추우실 텐데 커피 한 잔 드시죠. 괜찮으세요?”

전기난로 앞에서 몸을 말리던 노인은 기침을 서너 차례 하더니 좋다는 손짓을 했다. 

아, 알았다. 냄새가 안 나는군. 지난번 같으면 이 비에 완전 오물 냄새일 텐데. 그냥 비 냄새가 좀 진하게 난다고 할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노인에게 커피를 권했다.  

    

“커피 잔이 이쁘네. 맨날 종이컵으로만 마셨는데.”

노인은 연보랏빛 꽃무늬가 잔잔한 커피 잔과 받침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봉숙은 회한에 찬 듯한 그의 작은 눈을 훔쳐봤다. 빗물 탓인가? 별게 다 이상하게 보이네. 

    

“내가 서울역에서 여기로 온 지 한 일 년 된 것 같아. 지난주부터 박스와 병을 주어다 팔고 있지. 일 년 잘 놀았지 뭐. 풀칠은 할 만 해.”

노인은 다시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폐지수거를 해서 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의 변화였던가. 그런데 고약한 냄새를 어떻게 없앴을까. 그것이 제일 궁금했지만 이 또한 물을 수 없는 얘기였다.

      

“아, 참 내가 쪼코렛 있어. 커피랑 먹으면 좋을 거야.”

노인이 안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구겨진 초코파이였다. 보지 않아도 내용물은 다 부서졌을. 

봉숙은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아, 저도 빵이 있어요. 예쁜 아가씨가 만들어준 건데 잠시 기다리세요. 따뜻하게 해 올게요.”

노인을 놓아두고 냉장고에서 꽁꽁 언 귀리 바게트 빵을 꺼냈다. 레인지가 돌아가는 시간 동안 봉숙은 뒤로 느껴지는 노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선 안 되지. 지난번에 내가 실수했잖아. 이번엔 꼭 먹여서 보내야지.

노인은 앞에 놓인 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굴을 구기며 크게 웃었다. 

     

“그것보다는 이 초코파이가 맛있지. 뭘 모르는 목사네.” 

노인은 자신의 부서진 초코파이 가루로, 봉숙은 바게트 빵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마주 앉아 노인은 상관관계가 없는 여러 문장으로 이야기를 길게 했다. 

     

이 커피 잔은 와이프가 좋아하던 무늰데. 같은 데서 만든 건가?

아들이 날 찾으러 다니기는 하는데 걔한테 붙잡히긴 싫어.

파지와 병을 모으면 헌금은 될 거야.

아무 데서나 자기도 하고 뚝방 밑 비닐하우스에서도 살아. 

주로 지하철에서 씻는데 아휴. 최고지. 

와이프가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

술은 못 마셔. 이젠 마시면 토하더라고. 죽으려는지.

아, 내 친구는 죽었어. 얼마 전에.  

   

맥락 없는 문장을 들으면서 대강 그의 삶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죽어버린 친구가 그 친군가. 교회에 오기로 했다던.   

   

“쉼터 같은 곳엘 가시지 그래요? 그게 아무래도 좀 편하실 텐데.”

그러자 노인은 손을 저으며 거부했다. 

     

“자유롭지가 못해. 내 이름은 재상이야 한재상. 할아버지가 재상이 되라고 지어주셨지. 나 이제 교회에 올 거야. 매 주는 못 와도. 죽을 때가 가까웠으니 와야겠지?”     

봉숙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이 이번엔 정말 올 모양이었다. 하긴 지난번에도 오긴 했었지. 잠만 자고 갔지만. 

    

“꼭 주일날 아니어도 돼요. 여기 지나실 때 들르세요. 꼭 이 커피 잔에 커피 내려 드릴게요.”  

   

“왜, 내가 일요일에 오면 민폐인가? 아직 아무도 없지 않아?”

마음을 들킨 것 같이 찔끔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은 지난번 만남에서 가졌었지. 

노인은 나머지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몸을 털며 일어났다. 하늘이 비구름을 멀리 밀어 놓고 말갛게 드러나 있었다. 노인은 나가려다 뒤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꽃 좋아해?    

 

“아니, 뭐 글쎄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황당해하며 대답하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노인의 눈이 찡긋거렸다. 

    

“그냥 물어본 거야. 내가 가끔 꽃시장 쪽으로 원정도 가거든. 우리 와이프는 거 뭐냐 프리지어? 노란색 향내 나는 거. 그걸 좋아했지. 몇 번 사다 주진 못했지만.”     

노인은 다시 자신의 손수레를 밀고 주차장을 돌아 상가 쪽으로 향했다. 노인의 뒷모습은 그다지 가난하거나 늙어 보이지 않았다. 비교적 꼿꼿한 걸음걸이가 전에도 그랬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자세히 본 적은 없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노인을 처음 만났을 때 풀잎이 뭐냐고 지청구하던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잡초 같은 인생을 누가 좋아하겠느냐며.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무례함 정도로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노인이나 자신이나 그냥 잡초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나 나나 잡초라는 얘길 하면 노인의 표정이 어떨까? 또 무슨 꼬투리를 잡겠지. 내가 왜 잡초냐고 따질지도 모를 일이지. 그 노인, 아니 한재상이라고 했지. 글쎄, 풀잎은 너무 연약한 이름인가? 그냥 잡초로 바꿔야 할까? 경희가 들으면 기절을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노인인 한재상을 한참이나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자신이 칠판에 써놓은 글씨가 보였다.  

    

<풀잎>   

  

남편이 ‘풀잎 위의 이슬교회’라는 이름을 처음 가져왔을 때 그녀는 뜨악했다. 무슨 이름이 그렇게 길어. 시집(詩集) 같은 이름을 교회에 쓰다니. 그러나 남편은 그 이름을 사용했고 당시의 교인들은 그냥 ‘풀교회’라고 불렀다. 제법 풍성했던 풀교회가 다 뿔뿔이 흩어지고 10년이 지난 지금, 봉숙이 수습한 이름은 그중 한 단어인 ‘풀잎’이었다. 내가 아직 거기서 못 벗어났네. 

봉숙은 두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오늘은 2층의 남자가 이 글씨를 봤으려나? 너무 짧아서 실망했을까? 2층 남자가 글씨를 보든 말든 영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기뻤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무장을 해제하고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미 아닌가.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흔들의자로 돌아와 어느새 맑아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오랜만에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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