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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노을이 보고 싶었다

by 이광

가끔 즉흥적으로 뭔가를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될 수 있으면 하고 보자는 주의입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이젠 하고 싶으면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비용이 많이 들어갈 정도로 거창하거나 비윤리적이라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행위라거나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입니다. 모두 소소한 것들이지요.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들 중에 대부분이 소소한 것들임을 고려해 보면 소소한 일상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휴대폰 저장공간이 가득 찼다는 알람이 떴습니다. 그것 때문에 SNS를 할 때도 속도가 느려지더군요. 휴대폰에서 가장 많은 저장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진입니다. 클라우드 서비스도 이용하고 있어서 이미지나 글이 자동으로 클라우드 저장공간에 이중으로 저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진을 저장하기 위해 별도로 휴대폰에 SD카드를 심어놨는데 그동안 미처 내장 메모리에 있는 이미지들을 SD카드로 이동시켜 보관하지 못했습니다. 내장 메모리에 저장된 사진을 다른 저장소로 이동시키면서 사진을 하나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시간이 흐른 후에 봐야 사진의 진가를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은 포착된 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사진은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킵니다. 이윽고 사진 속의 색채와 분위기로 생동감이 입혀지게 됩니다. 그러면 눈은 사진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그날의 기억이 활기를 띠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정지된 한 장면이지만, 사진은 그 장면 속에 존재했던 사람의 기억을 깨워 생생하게 재생시켜줍니다. 사진 속에 없는 사람은 사진으로 보는 장면이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활성화할 기억의 부재로 사진을 단편적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진은 주로 내가 찍은 것들이라 사진 속의 장면이 고스란히 생각이 나더군요. 여러 장의 사진들 중에서 유독 심장이 반응하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여름에 찍었던 일몰 사진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일몰을 즐기기에 으뜸인 장소는 다대포 해변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일몰을 경험한 곳이 바로 다대포 해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경험한 일몰은 너무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대포 해변을 생각하면 광활하다는 형용사가 떠오릅니다. 광활한 다대포 해변에 일몰이 시작되면 마치 시간이 느려지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다른 곳보다 오래 감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곳에서 일몰을 감상할 때면 왠지 약속 시간에 늦기라도 한 것처럼 해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대포 해변에서는 해가 떨어질 곳이 수평선이라, 즉 산이나 인위적인 구조물의 방해로 자칫 숨겨질 수 있었던 1인치의 공간의 확장으로 인해 더 느긋하게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다대포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장자리에 앉아 노을을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멋진 풍경은 작은 화면보다는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 더 환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노을 지는 풍경에 빠지면 노을이 지고 난 후에도 그 감동은 쉽게 가라앉질 않습니다. 그 사진을 보는데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더군요. 그러면서 갑자기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다대포의 노을을 보러 가고 싶어 졌습니다.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어서 서두르면 노을 지는 풍경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옷을 빨리 갈아입고 장갑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 순간 인근에 살고 있는 누나가 오늘 비번인 게 생각나서 혹시 누나도 같이 가고 싶어 할 수 있겠다 싶어 누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해 보니 누나는 방금 산에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노을을 보러 다대포에 갈 건데 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했더니 누나는 곧장 아파트 입구로 나갈 테니 태우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중에 누나를 태우고 다대포로 달렸습니다.


가는 도중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오늘따라 탁구공처럼 보이더군요. 어떤 기류가 그 탁구공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기류가 사라지면 탁구공은 하염없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탁구공의 낙하를 볼 수 있는 것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에서 끝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혹시나 일몰이라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영화가 끝나버리고 영화관에서 몰려나오는 관객들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이 조바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저 멀리 일몰을 준비하는 태양을 좇는 기분이 그리 여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일몰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앉는 태양을 찬미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교통의 흐름이 원활해서 가는 길에 어떤 지체도 없이 일몰이 시작하기 전에 다대포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평일이라 다대포 해변은 한적한 편이었습니다. 넓은 모래사장을 거니는 사람들도 몹시 한가로워 보였습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까운 해변에 나와 맨발로 모래밭을 거닐며 한가롭게 주말을 보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소박한 삶이 나의 로망이었습니다. 그런 로망이 있어서인지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해 보이고 여유롭게 보였습니다. 모래밭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다 내가 바라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다만 그 장면 속에 또 다른 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다른 해수욕장들은 모래가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 해마다 모래를 구입해서 보충하느라 꽤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대포 해수욕장은 모래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나 파도에 쓸리지 않도록 곳곳에 낮은 가림막이 설치돼 있었습니다. 모래도 너무 고와 보여 만져보고 싶게 만들더군요. 그래서 모래를 한 줌 쥐어보았습니다. 역시 모래는 부드러웠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가 부드러워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다시 모래를 한 줌 집어 하늘에 뿌려보았습니다. 고운 입자가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스로우 비디오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드디어 일몰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감상에 들어갔습니다. 기온은 차가웠지만, 하늘은 맑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일몰을 볼 때는 하늘이 포도주가 출렁거리는 듯 온통 붉게 물들었는데 그날은 겨울이라 그런지 붉게 물들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바다에 비친 해만 붉었을 뿐이었습니다. 서서히 내려앉는 태양을 보면서 마음이 맑아지고 선명해졌습니다. 전에 봤던 일몰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일몰의 광경이 붉으면 마음이 여려지고 숭고한 느낌이 들면서도 다소 감성적인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다대포의 일몰은 기분을 감성적으로 이끌지 않았고 오히려 숲 속 맑은 샘물을 들여다본 것처럼 마음이 청명 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30분 정도의 일몰이 끝나자 세상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노을을 보기 위해 일제히 멈춰서 한 곳만 바라보던 사람들은 태양이 수면에 완전히 잠기자 노을의 여운을 뒤로한 채 한결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해변을 걸었습니다. 노을 진 하늘에는 김해공항을 향하는 비행기가 고요히 날아가더군요. 이 순간이 사진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나는 노을을 보면서 간간이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그 사진들은 오늘처럼 언젠가 미래의 나에게 오늘을 추억하게 해줄 것입니다. 나는 몸을 녹이기 위해 인근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 후 어둑해진 다대포를 떠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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