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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단상

by 이광

2022년 1월 13일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다가 모양이 이상해진 군자란 잎이 있어 뒤척여 봤더니 그 아래 꽃이 이었다. 꼭 달라붙은 잎과 잎 사이를 비집고 피어 난 꽃을 보고 이 겨울에 웬 선물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는 군자란 화분이 5개가 있다. 각 화분마다 군자가 조금은 빽빽하게 심어 있다. 원래는 그것보다 많았지만, 너무 밴 군자의 뿌리를 나눠 아파트 화단에 옮겨심기도 하고 때로는 지인의 집에 보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는 이모님 댁에서 군자란 한 촉을 가져오셔서 빈 화분에 심으시고 군자를 정성스럽게 보살피셨다. 시간이 흘러 잘 자란 군자의 포기를 나누고 또 나누다 보니 화분도 늘어났고 나중에는 화분마다 빽빽해졌다. 군자가 우리 집에 온 것을 햇수로 치면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흔히 고목의 껍질이 그러하듯이 우리 집 군자란 잎들은 다소 거칠다. 나는 가끔 군자에 물을 줄 때면 거친 잎에 조심스레 내 손을 얹어 그동안의 회포를 풀기도 한다. 한 공간에서 함께한 20년이란 세월이 거저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리의 삶은 관계로 시작해서 관계로 끝난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관계라는 생각이다. 어떤 관계도 그렇겠지만 외적 관계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나 자신과의 내적 관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자신과의 내적 관계는 자칫 소홀하기 쉬운 관계라서 순위에서 맨 나중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사람은 삶에 있어서 성공의 척도를 외적 관계 성장에 두기 때문에 오늘의 나를 희생하여 ‘조금만 더 참고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 성공이라는 것을 좇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은 관계를 지향하려는 의지의 부재로 인해 차츰 망가지고 만다. 곧 나무로 치면 뿌리가 썩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뿌리가 썩어간다는 것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뿌리가 썩으면 아무리 높고 풍성한 나무일지라도 머지않아 쓰러지기 마련이다. 내 삶이 아무리 외형적으로 풍요로울지라도 그것이 내가 무너지고 마는 풍요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삶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



2022년 1월 14일


삶은 떨어져서 보면 아주 단순하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하다. 때로는 우리의 삶은 웃기지만 결코 웃기다고만 할 수 없고, 슬프지만 결코 슬프다고만 할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인가 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자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겸손을 청하곤 한다.


오늘을 마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돈을 들이면 내 시간을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들일 수 있다.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아 직접 하기에 머리가 복잡한 일일수록 내 시간 대신에 돈을 들이는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시간 대신 돈을 들였던 일을 직접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부가가치세 신고다. 사업을 시작해서부터 세금 관련 사항은 아예 전문 세무회계 사무소에 맡겼다. 매달 수수료와 더불어 5월 종합소득세 신고 때는 기장료를 추가적으로 지불하면서 세금 관련 사항은 잊고 편히 살았다. 이제 폐업한 상태라 부가가치세 신고를 직접 해보기로 했다. 물론 비용은 들어도 전화 한 통이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그동안 복잡하다는 이유로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왠지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이 기회에 알고 넘어가자는 생각으로 직접 해보기로 한 것이다. 요즘같이 친절하고 눈높이에 맞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튜브를 이용하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홈택스에 로그인한 상태에서 부가가치세 신고 관련 유튜브 채널을 틀어놓고 알려주는 순서대로 따라 했다. 지난해 매출 자료를 자동으로 불러와서 기록하는 데까지는 쉽게 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과세와 면세, 매입 사항을 작성할 때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생겨났고 어떻게 해서 작성한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환급금이 있어야 하는데도 내야 할 세금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작성을 무효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핸드폰 연락처에서 세무회계 담당자를 찾아 통화버튼을 막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번에 경험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지난해 매출과 지출 사항을 정리해 두었다. 그 정리한 자료를 들고 세무서를 방문해서 직원에게 물어가면서라도 직접 해볼 생각이다. 그동안 너무 쉽게만 살려고 한 건 아닌지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낀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면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소소함이란 것이 결코 소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사소한 것, 작은 것은 그렇게 나타났을 뿐이지 결코 작거나 사소하지 않다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크다.


그러고 보면 역설의 서사는 우리를 성찰로 초대하는 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서사들은 내 생활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를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 나는 소소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결코 소소하지만은 않았던 하루였다. 그 소소함이란 바다 위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란 생각이다. 드러나지 않고 바다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소소함의 본질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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