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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by 이광

변화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다.


2022년은 2021년과는 전혀 다른 생활패턴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운영해 온 사업을 정리하고 공부와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 몰두하는 중이다. 연말에는 해가 바뀌어 막상 출근을 안 하게 되면 삶이 불안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불안은 사라졌다. 여태껏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을 더 이상 쥐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느끼는 홀가분함이 컸다. 더 이상 때마다 나갈 돈 걱정 안 해도 된 것만으로도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동안 돈을 많이 잃어서 경제활동을 해야 하지만 당분간은 공부, 독서, 글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시작한 공부는 정오에 끝난다. 오후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걷고 글을 쓴다. 해 지는 시간이면 노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노을을 바라보면 따뜻한 아궁이나 화로 앞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으로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차가운 날씨지만 마음만은 따뜻해지고 정신은 명징해진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의 마음을 저토록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다면 세상 산 보람이 크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도 해본다.


새해에 들어 생각지도 못했던 감사할 일들이 생겼다. 좋은 일이 생기면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삶을 통해 배워서인지 오늘은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 먼 거리를 걷기로 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걸어갔다가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고 올 생각이었다. 해안가 절벽을 따라 조성된 길이라 급하게 경사진 오르막과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언젠가 설악산을 오를 때가 생각날 정도였다.


전에 중국 장자제에 갔을 때 하늘을 찌르는 듯이 솟아있는 산에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아슬아슬한 절벽에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나라 산에도 나무 높이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마치 나무 위를 걷는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편하게 다닐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그곳을 걸을 때는 내 몸 어딘가에 가시가 박힌 듯이 아렸다. 그것은 구조물이 모두 인위적인 것들이라 바위에 정을 박아 철골 계단을 놓고 바위와 바위를 잇는 콘크리트 계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구간을 걷는 동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름다운 경치는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때 그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떨어져서 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을 작품을 기필코 가까이 가서 직접 만져야 제대로 감상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그릇된 시각이 작품을 작품답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벗어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때야 비로소 온전히 자연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햇살이 피부에 스밀 때 느껴지는 포근함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물결 위에 내려앉은 윤슬들은 눈부시도록 반짝거렸고 남풍은 차갑기보다는 오히려 온화했다.


큰 바위 위에 서서 낚싯대를 기울이고 있는 강태공의 모습은 사진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장미꽃 없는 장미터널을 지날 때는 온통 장미꽃으로 우거진 터널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했고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이어진 길이 걷기에는 쉽지 않았으나 평탄한 길을 걸을 때 느끼지 못한 흥분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돌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들이 누군가의 바람을 담고 있어서인지 바닷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믿음직스럽게 해안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돌탑들의 사진을 찍었다. 나도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다리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은 그래도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기분 좋은 뻐근함으로 바뀌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생수를 마시면서 돌아갈 때 버스를 타려고 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 걷기로 했다. 갈 때는 해안도로를 따라 나 있는 산책로로 걸었다. 평탄한 길이었으므로 걷기는 훨씬 수월했고 발을 헛디딜 염려가 사라지면서 먼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반대쪽에서 걸어와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속으로나마 평안을 빌었다. 나의 하루와 그대들의 하루가 모두 평안하길! 어떤 사람들은 산책 나온 복장이 아니라 신경 써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행색처럼 보였으나 그 순간 해안산책로에서 만났으니 그들도 나처럼 산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고 보면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산책로가 잘 조성되고 있는 것도 원인일 수 있지만, 거꾸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산책로를 개발하고 조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걷기를 즐긴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그들의 삶이 보다 건강해지고 있다는 징표일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걷다 보면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반갑다.


드디어 많은 사람을 스치고 햇살과 바람을 스쳐 걷기를 마무리할 장소에 이르렀다. 이쯤에서 마시는 물맛은 중간에 마실 때보다 훨씬 청량하고 달콤하다. 조금 먼 곳으로 걷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한 채로 흘려보냈을 소중한 것들이 거저 손에 들어온 기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에 잡히지 않은 무언가를 쉼 없이 좇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 내 삶의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변화를 새해가 되면서 더 이상 생각이 아니라 내 삶에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어떻게 살든 우리의 삶이 후회로 점철될 거라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지금 감사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에 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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