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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고 생각하면
웃지 못할 일이 뭐가 있나

by 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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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내 가슴에 전해지는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밖으로 나가 먼 하늘 끝자락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어야 비로소 진정되기도 한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런 일이 비단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혹자는 우리의 삶은 고행이라고 말한다. 순간순간 마주하는 고통 속에서 진리를 깨달아가는 고행의 여정이 바로 인생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고통이나 슬픔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고난으로 정의하려는 것은 사람이 본래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긍정적 감정보다는 통증을 일으키는 고통이나 슬픔에 더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하지 않았기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한의 비극에 처한 사람이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고 살아오면서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례를 종종 접한다. 어떤 이는 ‘세상에 저럴 수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의 삶이 비극적인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그 사람을 위로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밤하늘에서 초연이 빛나는 별 때문에 스스로 모진 목숨을 끊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더 이상 쏟아 낼 눈물도 다 말라버려 그저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창문으로 들어온 한 뼘만큼의 햇볕이 서서히 다가와 그의 맨발 위에 머물러 따스함을 전할 때 살아야 할 의미를 찾았다고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웃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또 웃자고 생각하면 웃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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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담론>에는 포리스트 카터(Forrest Carter)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책의 일화가 소개된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하는 긴 여정에서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이 죽어도 병사들은 인디언들에게 시신을 매장할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 매장할 시간이 주어질 때까지 밤이면 시신 옆에서 잠을 자고 낮이면 시신을 안고 묵묵히 이동하는 인디언들의 행렬은 비장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음에 전해진 울림으로 나는 곧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책장을 넘기며 문장과 문장을 유영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책 제목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원제 The Education of Little Tree를 번역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보다 더 적합한 제목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인디언 강제 이주에 대한 부분이나 죽음에 대한 부분에서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 마음이 몹시 쓰라렸고 주인공과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일화들에서는 웃음과 재치가 살아 숨 쉬었다. 사람이 말을 걸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는 장면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노새를 이용해 산비탈에 있는 밭뙈기를 갈 때 노새가 나이가 들어 귀도 잘 안 들리는 데다가 한쪽 눈까지 잘 보이지 않아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염병할 놈으로 시작하는 욕지거리를 해야 노새는 비로소 말귀를 알아듣고 앞으로 나아갔다.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인 주인공에게 밭을 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손자는 할아버지가 했던 욕이 다소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노새가 밭을 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했던 욕을 똑같이 했어야 했다는 일화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뻥 터뜨리고 말았다. 또 개가 죽었을 때 사랑했던 것을 잃는 것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이 아픈 기분을 맛보게 된다. 그런 기분을 피하는 방법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항상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사는 것이라서 차라리 사랑하며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삶의 지혜를 주고 사람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애정을 담아 몇 번을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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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와 조카와 함께 11년 전에 돌아가신 매형이 모셔져 있는 공원묘지에 다녀왔다. 마침 누나가 쉬는 날이고 방학 기간에도 아르바이트하는 조카도 모처럼 쉬는 날이어서 코로나로 한동안 가지 못했던 매형에게 가자고 운을 띄워 함께 다녀오게 되었다.


11년 전 매형은 암으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고 가족들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매형은 점점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통증을 약으로 견디면서도 아직 어린 남매와 아내를 두고 떠날 생각에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매형의 장례 중에 납골함 위치를 정하기 위해 천주교 공원묘지에 갔다. 그곳은 새로 조성된 공간이라 빈 납골함이 많은 상태였다. 한참을 돌아보는데 유리창으로 들어온 5월의 햇살이 유달리 따사롭게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 지금 매형의 납골함이 있는 곳이다. 납골함에 비치는 5월의 따스한 햇볕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매형을 충분히 위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비록 겨울의 한중간인 1월이지만 여전히 그곳의 햇살은 따듯했다. 그 따사로운 햇살의 온기 속에서 우리는 각자 매형에게 안부를 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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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송정해수욕장을 들렸다. 나에게는 적지 않은 소중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송정해수욕장은 철원 어느 산골짜기에 처박혀 군 생활을 하다가 때마침 여름에 휴가를 나와서 친구와 일주일 동안 텐트를 쳐놓고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벗겨질 정도로 바다에서 수영하고 지치면 선글라스를 끼고 해변 모래사장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태어나서 가장 여유로운 바캉스를 보냈던 곳이다. 그때는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내 신분이 군인이라는 사실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타지에서 휴가를 즐기기 위해 몰려든 또 다른 빛나는 젊음들과 한데 어울려 밤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날이 새는 줄도 모르게 놀다가 그대로 모래밭에 쓰러져 잠이 들고, 그러다 떠오른 눈 부신 햇살이 눈꺼풀을 지그시 누르면 나는 스르르 눈을 떠 아침을 맞이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금세 지나 송정을 떠나오는 날, 해운대로 넘어가는 언덕길에 있는 벤치에 앉아 병풍처럼 펼쳐진 송정의 해변을 내려다봤을 때 그곳에서 보낸 일주일이 마치 황홀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에게 송정해수욕장은 늘 젊음과 열정이 샘솟는 곳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소중한 추억을 자신의 기억창고에 넣어 둔다. 그러다 삶이 퍽퍽하거나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될 때 그 추억을 꺼내어 보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일이 새롭게 느껴지고 삶을 다른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꿈같았던 휴가를 보내고 자대에 복귀한 며칠 뒤에 소속 포대에 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전체 포대원들과 함께 똥물을 뿌려 놓은 웅덩이를 기어가야 하는 비인간적인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 것 같은 순간이었지만 '인생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실실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사람이 생각지도 않았던 극한 상황에 처하면 웃음이 나오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리를 내서 웃을 수는 없었지만 '웃자고 생각하면 웃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팬티 차림으로 똥물 웅덩이를 기어갔기 때문에 몇몇 동료들은 피부가 뻘겋게 달아올라 가려움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명 똥독에 오른 것이었다. 살다가 별 경험을 다해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후로는 똥이 더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똥이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일은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살다가 세상에는 똥보다 더 더러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때부터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은 나에게 설득력을 잃었다. 내가 똥물이 뿌려진 웅덩이를 기어가면서도 더럽다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고 오히려 삶을 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실실 웃음이 났던 것도 다 송정의 해변에서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저 그 순간을 즐기며 보낸 일주일간의 휴가 덕분에 삶을 대하는 자세가 한결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다시 바라본 송정의 해변은 예전보다 더 낭만적이고 이국적이었다. 보드 위에 앉아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이 마치 바다 위에 내려앉은 갈매기들 같았다. 해변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 연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여유로워 보이고 이국적 경치에 흠뻑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렁이는 물결에 쏟아지는 햇살은 눈이 부시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은 마치 군무를 하는 듯 흥겨워 보였다. 핸드폰으로 순간순간을 담아봤지만, 그 분위기와 생동감과 그 낭만을 도저히 담아낼 수는 없었다. 송정의 해변은 바쁘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아니었다. 오늘의 송정 해변은 마치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녹녹지 않는 삶 속에서 벗어나 잠시 꿈을 꾸듯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거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자신답게 살고자 하는 꿈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오늘의 분위기를 잊지 못하고 앞으로도 자주 송정의 해변에 서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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