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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Apr 26. 2024

17. 돌려받지 못할 마음을 베푸는 것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과는 168도 정도 딴판이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조용하고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은 작고 여린 소녀였다. 여기서 포인트는 '작고'인데, 얼마나 작았냐면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몸무게가 15kg이어서 내 몸뚱이만 한 가방을 메고 등교하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는 일이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작고 얌전한 초식동물들은 곧잘 육식동물들의 먹잇감이 되곤 한다.


 나는 소심하고 사회성이 다소 떨어졌지만, 나름대로 내 세계에서는 평온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고(정확히 말하면 갈등을 빚을 '친구' 자체가 일단 없었고), 말다툼을 하는 일도 없었다(왜냐면 내가 부끄러워서 대답을 잘 안 하니까). 남들이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았고(거절하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항상 웃는 낯으로 상대방을 대했다(외국인이 말 걸면 그저 웃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렇게 고요한 나의 일상에 감히 돌을 던지는 자가 있었는데 지금도 화가 나니 그를 '못 배워먹은 자식'이라고 칭하겠다. 그 '못 배워먹은 자식'은 진짜 배움이 없었는데, 감히 1학년 짜리가 입학을 하자마자 2학년인 나를 때리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굉장히 어리둥절했다. 일단 쟤는 누구길래 나를 때리는 것인지가 궁금했고, 쟤는 나를 아는지도 궁금했다. 왜 모르는 사람을 괴롭히는지도 궁금했고,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자꾸 맞기만 하는 게 속상했다. 그렇지만 무려 한살이나 어리면서도, 내가 2학년이라고 밝혔는데도,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괴롭히는 그 '못 배워먹은 자식'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 나 자신이 제일 답답했다. 며칠이었을지, 몇 주였을지 모를 시간 동안 어디에 말도 못 하고 고통받던 나는 결국 '담임 선생님 소환술'을 쓰게 되고, 놀랍게도 그 '못 배워먹은 자식'은 그날로 나에 대한 괴롭힘을 그쳤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니! 사건으로 나는 내가 해결할 없는 문제는 빨리 어른에게 말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내가 그렇게 싫다고 말해도 귓구멍이 막힌 것처럼 행동하던 그가 담임선생님의 으름장 한 번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비슷한 일은 또 일어나게 된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인근 주민들을 위한 복지관이 있었는데, 복지관 2층에서는 초등학생들이 다닐만한 다양한 방과 후 교실이 개설되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피아노도 배우고, 어떤 과목 수업도 들었던 것 같은데 뭐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그 일은 '어떤 과목' 수업 시간에 일어났다. 수업을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4명 정도였던 것 같고, 나를 제외한 3명은 꽤나 친해 보였다.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 하나, 그 여자아이의 언니 하나, 그 언니의 친구 하나. 넷이 모여 앉아있었음에도 나는 그 대화에 낄 수 없었고, 셋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말주변이 없기도 하고 이미 친한 무리에 끼는 것은 나의 용기를 최대치로 출력해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티가 안 나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로 대화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가만히 있던 나를 타깃 삼아 '아님 말고'식의 말을 뱉어내더니, 그 조차 반응이 없자 대놓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며칠을 당하고만 있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반발의 표현으로 나와 동갑인 친구의 손등을 꼬집었고, 곧바로 그 친구의 언니와 언니의 친구에게 응징을 당했더랬다. 이제 일은 힘으로 해결할 없다. 나는 수업에 다시는 없을 것만 같았다. 집으로 달려가 오여사에게 이러저러한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오여사는 내일 엄마가 같이 가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오여사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 줄을 안다. 오여사는 단단히 으름장을 놓을 테고, 그들은 다시는 나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 우리 담임선생님이 이전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것처럼.


 다음날 나는 오여사를 기다리며 어색한 적막이 감도는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어제 나의 공격이 예기치 못했는지 전처럼 함부로 나를 건들지는 못했고, 하지만 나도 그들도 그렇다 할 사과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문이 열리고 오여사가 들어왔다. 나는 순간 당황하는 그들의 표정을 읽었다. 엄마가 등판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얘들아, 안녕? 나는 첫이 엄마야. 어제 첫에게 얘기 들었어."

 좋아, 엄마! 이제 얘네들을 혼내줘!

 "첫이가 꼬집어서 미안한데 용기가 안 나서 사과를 못하겠대. 그리고 너희들도 우리 첫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 맞지? 아줌마가 맛있는 거 사 왔으니까 이거 먹고 서로 친하게 지내볼까?"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맞나? 어제 내가 말을 잘못했나? 만면에 미소를 띠며 비닐봉지 한가득 사온 먹을 것을 나눠주는 오여사를 보고 나는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멍하니 있었다. 한참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했다. 엄마가 어제 혼내주기로 한 게 아니었어? 엄마, 나는 사과하고 싶지 않아! 쟤들이랑 친구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괴롭힘을 당했다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여사는 왜 나한테는 용돈도 안 주면서 나를 괴롭힌 저들에게 맛있는 걸 나눠주고 있는 걸까. 다다다다 쏘아붙이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흘러넘쳤지만, 쟤들 앞에서 모양 빠지게 나와 오여사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느 때보다 친절해진 오여사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저 눈알만 굴릴 수밖에.

 "엄마, 나 쟤네랑 친구 안 해. 내가 혼내달라고 오라고 했지, 쟤네한테 먹을걸 왜 줘? 돈 아깝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가 난 나는 울면서 소리쳤다. 엄마는 멍청이야!

 "첫아, 다른 사람이 너를 괴롭힌다고 네가 더 큰 힘으로 갚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내가 남한테 먼저 잘해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잘해주려고 노력한단다. 엄마한테 오늘 맛있는 거 얻어먹었으니까, 내일부터는 너한테 더 잘해줄 거야."

 "아니, 나는 걔네가 나한테 잘해주는 거 싫다고! 걔네를 혼내주라고! 걔네가 나한테 나쁘게 했는데, 왜 나는 나쁘게 못해!!"

 억울했다. 엄마가 가서 때려주지는 못할 망정, 먼저 잘해주라니! 아까웠다. 걔네한테 먹을 거 사줄 돈을 차라리 나한테 용돈으로 주지. 그리고 다음 날부터 걔들이랑 친해졌냐고? 모르겠다. 기억도 안 난다. 걔들은 이미 나의 분노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한동안 오여사에게 분노했다.


 그 뒤로도 오여사식 갈등 해결법은 계속되었다.

 "엄마, 누가 내 반찬을 뺏어 먹어."

 다음날 반찬은 2배가 되어있다.

 "친구들이랑 나눠먹으면 되지."

 "아니 난 걔랑 안 친하고 나눠먹기 싫어."

 "안 친해도 나눠먹으면 뭐 어때."

 "나는 진짜 걔랑 나눠먹기 싫다고."

 다음날 반찬은 우리 반 전체가 나눠먹어도 될 만큼 들어있었다.

 "그럼 반 전체가 나눠먹으면 되지."

 한동안 나는 가방보다 무거운 도시락 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녔다.

 이게 뭐람.


 비단 갈등해결뿐만이 아니다. 오여사는 남한테 뭐 안 주면 죽어버리는 귀신이라도 씐 듯 뭘 자꾸 줬다. 내 입장에서는 아까운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한테는 일주일에 용돈 1000원 밖에 안 주면서(그나마도 할아버지가 주는 것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못줘서 안달이었다. 나중에 다~ 니 복으로 돌아온다며 내 친구들, 내 선생님들을 그렇게 챙겼다. 아니, 아내가 이렇게 돈을 펑펑 쓰면 남편이 말려야 가정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겠는가? 택씨라도 이런 오여사를 말려야 하지 않겠냔 말이다. 하지만 이 집에 가정경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오여사는 그래도 나와 관련된 사람에게만 퍼줬지 모르는 사람에게 뭘 주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택씨는 더 했다. 택씨는 명절이 다가오면 트렁크에 상자를 싣고 어디 어두운 데에 가서 조용히 내려놓고 오곤 했다. 우리들은 불 꺼진 깜깜한 차 안에서 택씨가 돌아오길 기다렸고,

 "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

 "뭐 주러 갔어."

 "누구한테?"

 "여기 사는 사람들한테."

 "여기에 누가 사는데?"

 "여기에는 엄마랑 애들만 산대."

 "아빠가 없어?"

 "응, 아빠가 없는 가족들이 여기 모여산대."

 "아빠가 아는 사람들이야?"

 "아니, 누군지는 모르지."

 "근데 아빠가 왜 선물을 줘?"

 "명절이니까. 맛있게 먹으라고."

 이런 알 수 없는 대화들을 나눴었다.


 택씨랑 오여사는 모를 거다. 내가 중학교 때 택씨가 부탁한 한글파일 작성하면서 몰래 울었던 거. 택씨가 팔던 구리랑 동이랑 철근이랑 단가 100원씩 내려서 수정해 달라고 했을 때, '장사가 잘 안돼서 싸게 파는구나. 우리 집 또 망하면 어떡하지?'이러면서 혼자 모니터 앞에서 울었었는데, 진짜 망할까 봐 택씨한테 왜 가격 내리는 거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눈물 훔치느라 혼났었다. 그런데 자꾸 오여사는 우리 반 애들 먹을 만큼 반찬 싸주고, 택씨는 자꾸 모르는 사람 집 앞에 상자 놓고 오고 진짜. 나만 우리 집 망하는 거 걱정했지 진짜.


 어쨌든 그런 택씨와 오여사의 가르침 덕에 지금 누구보다 잘 나눠먹으며 살고 있다. 어디 가서 내 것만 사 오는 법이 없고, 가족은 4명인데 택배는 늘 10인분이다. 1+1으로 싸게 사놓고 1개 남 줘버리는, 나는 싸게 사서 좋고 너는 공짜로 얻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놀라운 경제관념의 소유자가 되었다. 예전에 오여사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되는 게 더 행복한 인생'이라고 알려줬었는데,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내꺼 먼저 악착같이 챙겨야 하고, 내꺼 조금 떼 주는 게 너무너무 아깝고, 내꺼를 왜 나눠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던 예전의 나보다, 누구 더 생각날지 모르니 넉넉하게 사두고, 옆사람만 주기 아쉬우니 뒷사람도 챙기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우니 뭐라도 챙겨가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10을 받고 체면상 11을 주면서 다음번에 1이 다시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계산하며 사람을 만나던 내가, 10을 주고도 돌려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나하나 계산하며 똑똑하게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생각할 것은 너무 많다. 계산 안 하고 나눠도 모자라지 않으니 축복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만큼 베풀 수 있으니 행복이다. 이 정도 깨달았으면 택씨랑 오여사가 뿌듯해하겠지? 아무리 팍팍하고 정신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 하더라도, 주변 사람을 위한 마음 한자리 정도 남겨 놓는 여유가 있다면 살만한 삶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아무도 혼자 살 수 없고, 언젠간 누군가의 호의를 받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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