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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Sep 05. 2020

출판사 사장이 여성이면?

다를 게 있을까? 독일의 사례

약 2주간 브런치에 손을 못 댔었다. 이유는 책 원고를 써서 미국 출판사에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약간 해묵은 박사 논문을 한 번 책 원고로 재창조했던 것을, 다시 한번 더 대공사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책의 방향성에 대해서 잠깐 고민을 했었다.


학술 출판서이고 학술 책이다. 하지만 학술 독자들만 위한 책이기는 아쉬웠다. 혹은, 학술 독자라 해도 젊은 세대를 상대로 얘기하고 싶었다. 학문에서는 사실 기존 세대의 평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거꾸로 된 전략이기는 하다. 그래도 워낙 작은 분야를 타깃으로 쓴 책이기 때문에, 어쩌면 패기와 (상대적) 젊음 만으로 돌파가 가능할지. 한번 기다려 보겠다.


나 같은 경우는 학문을 시작한 동기가 꽤나 로맨틱했다. 비교하자면 음악이 좋아서 프로 음악가를 시작하는 것과 같달까. 하지만 음악도 예술도 결국은 비즈니스이고 수요가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학문도 맞춰야 하는 사항이 매우 많다. 이런 현실을 빨리 흡수할수록 프로라는 딱지가 붙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은 내 나름의 번역 시장 개척을 꿈꾸고 있어서 시야가 더 확장되는 느낌이다. 한국어에서 독일어로, 그리고 독일어에서 한국어로 들어오는 책들 중 비교적 미개발된 세부 분야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의 시야를 잘 모른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이유로 오늘의 기사는 독일 출판사 중 대기업에 속하는 PIPER 출판사 대표와의 인터뷰 일부분을 발췌, 번역한다. 그녀의 이름에는 von이 있다. 귀족 혈통이라는 뜻이다.


Q: 여성들이 정치나 산업보다 출판사업에서 더 수월한 부분이 있을까요?

A: 우선 여성 독자들이 더 많아서 출판사업도 자연스레 여성 지분이 높습니다. 또한 출판사업이란 응대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출판사보다 작가와 책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소일거리 스탭까지 크레디트에서 언급되지만, 저희 출판사 관계자들은 작가만을 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요.


Q: 여성이 응대를 더 잘한다고요?

A: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뒷배경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유형의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이상주의적 동기가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조명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특히 독서하는 여성들은 타인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는 데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그 대상이 작가이든, 독자이든, 동료이든지요. 독서하는 남성도 마찬가지고요.


Q: 23살에 주요 신문사 편집장이 되었고 34살에는 문학 부서 편집장이 되셨어요. 리더의 역할은 어려웠나요?

A: 문학 부서 편집장이라는 직함은 무겁게 들려요. 실제로는 4-5명의 동료들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쓴 것뿐이죠. 저는 개입하지 않았아요. 그분들은 실제로 너무 실력이 좋아서 그럴 수도 없어서, 그저 일리 있는 주장이 있으면 충분했어요. 자신의 결정을 정확하게 변론하지 못하면 즉시 존중과 지지를 잃었죠.


Q: 그래도 권위 없이는 안 되는 상황들이 있죠.

A: FAZ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신문사에서는 권위적일 수가 없던 것이, 총괄 편집장이던 Frank Schirrmacher의 권위만이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그는 항상 우월한 주장을 펼쳤고 권력을 향해 극도로 발달된 감각까지 있었어요. 상대방이 무력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죠.


Q: 그에게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A: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편견이 없는 것, 꼰대 근성이 눈 씻고 봐도 없던 점이요. 그는 모든 걸 흥미로워했고 이해하고 해석하려 했지만, 절대 급을 나누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를 어느 진영의 소속이라고 치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죠. 그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개개인을 바라보았어요. 제가 여성이라서 저를 양성한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저는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나 많지만, 동시에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렇게 남을 가지고 노는 사장은 절대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저에게 긍정적이자 부정적인 모범이에요.


Q: 남성이 대부분이던 신문사에서 23살의 여기자로서 외롭지 않았나요?

A: 제가 튄다고 느끼기는 했는데 여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문화생활 부서에 여성 동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이런 생각 때문이었죠: 이렇게 똑똑하고 천재적인 괴짜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내가 무얼 해야 할까? 반면에 선한 괴짜들의 시점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괴짜로 보인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깨달았죠.


Q: PIPER출판사 대표가 되기 전에 FAZ임원 영입 가능성으로 화제가 되던 때가 있었죠. 왜 불발됐나요?

A: 말하기 약간 곤란하긴 한데요. 뭉뚱그려 얘기해볼게요. 어느 날 권력 있는 남성과 대면해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로벤베르그 양, 당신처럼 친절한 숙녀에게 이 일은 너무 험해요." 제가 이 바닥에서 겪은 처음이자 마지막 성차별이었어요. 오늘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맞는 직업이 아니에요.


Q: 전설적인 문학비평가인 Marcel Reich-Ranicki 와 협력하셨죠. 편집장으로서 그의 유명한 문학 칼럼을 지도하셨고요. 사이가 어땠나요?

A: 제가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좋았어요. 처음에는 아무래도 저를 못 미더워했죠. 저 양반집 딸내미가 실력이나 있는지 지켜보자, 하고. 제 입장에서는 너무나 이해가 되죠. 갑자기 27살 편집장이 내 글에 개입한 다뇨.


Q: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A: 유머로요. 저는 약간 되바라지고 말로 지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무슨 말을 들어도 삐지지 않았어요. 그게 그에게는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빠르게 서로에게 적응했죠. 오늘날의 정서에는 하면 안 되는 말들도 섞여 있었지만 저는 한 번도 언짢게 여긴 적이 없어요. 오히려 재밌고 신선했죠.


Q: 귀족 혈통의 이름을 가지셨고 영국 기숙사를 졸업한 후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셨죠. 특권을 누리면서 성장하셨나요?

A: 물질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부모님이 모범으로 보이신 가치관으로 인해서 그랬죠. 미술, 음악, 문학, 자연, 미식, 친구, 어울려 사는 것, 미적 감각을 사랑하셨으니까요. 그보다 큰 특권은 없겠죠. 그걸로 저는 아직까지 먹고 삽니다. 저희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이 있어요. "펠리시타스, 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너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겠지만, 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영원히 네 것이야."


Q: 원고를 읽을 때 저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아차리시나요?

A: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어요. 성별보다 작가의 실력이 궁금하니까요. 문학작품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첫 장부터는 몰라도 20, 30페이지가 넘어가면요.


Q: 뭘 보면 아나요?

A: 특정한 시야, 언어적 특성이요. 어떻게 이야기하냐 뿐이 아니라 무엇을 이야기하냐에 따라서 저자에 대한 짐작이 가능해져요. 여성은 남성보다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도 점점 달라지고는 있어요. 물론 헤밍웨이는 극도로 남성적인 문체를 지녀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위대한 이유지만, 여성 작가도 그게 가능해요. 직설적으로, 담대하고, 그리고 좋은 의미로 거만하게 쓰는 것을요. 프랑스 작가 비지니 데스빵스를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해요: "다들 여기 봐봐. 이제부터 내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보여줄 거야." 그리고 말 그대로 그걸 해내죠.


Q: 클리쉐에 의하면 남성이 여성보다 더 뽐내고 싶어 하고, 으스대고 자기애가 강하다고 여기죠. 작가들을 보며 동감하는 바인 가요?
A: 전혀요. 모든 작가는 효과적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싶어 해요. 안 그러면 글을 쓸 이유가 없죠.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봐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Q: 인생에서 좌절은 얼마나 중요한가요?
A: 매우 남성적인 질문입니다! 매우 중요하지만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좌절 속에서도 자신의 과시는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Q: 현재 매력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이 20-50년 후에 의미를 잃을까 봐 걱정되지 않으세요? 사람들이 깊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위험을 느끼시나요?

A: 아닐 것 같아요. 반대로, 껍질뿐인 상태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경각심이 점점 커질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볼게요. 저는 평생 사람들을 나무로 상상해왔어요. 어떤 나무는 곧고 강하고, 어떤 나무는 기울어지고 풍파를 겪었지만 굳건하며, 어떤 나무는 울퉁불퉁하고 넓은 공간을 차지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뿌리, 그러니까 근본이죠. 저를 매료하는 것은 잎사귀이기도, 숱이기도, 점점 가늘게 뻗어 나가는 가지이기도 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극도로 가지가 엉켜서 정신이 유연하고, 섬세하고, 예민해요. 자신만큼이나 가지가 뒤엉킨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마법과도 같은 체험이에요.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들은 이런 뒤엉킨 가지를 유난히 많이 지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질문에 답하자면, 만약 어느 날 굵은 기둥만 남은 사람들밖에 없다? 건강하지만 가지가 없다? 그런 상상은 암울합니다.


우선, von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자. 귀족 혈통의 상징인 것은 확실하나 사람과 집안의 사정은 참 다양해서, 특권을 누리고 살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알았다. 하지만 본 편집장의 자세에서 귀족적인 특성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말을 잘하는데, 말을 잘하는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분은 기분 나쁘지 않게 할 말을 하는 기술이 최상위 급이다.


그걸 떠나서 닮아도 될 법한 점은, 사람의 개개인의 장단점을 깊게 사유하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얘기가 아닌데도, 괜스레 나까지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작가와 소통하려면 아주 중요한 기술일 것이다. 소통하려면 남을 잘 알거나 잘 알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부터 아주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장이거나 출판사 사장이어도, 작가여도 이것이 출발점이자 비옥한 땅이 아닐까. 어떤 모습의 나무가 자라느냐는 추후의 문제이자 주관적 판단의 저 너머에 놓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분들도 보물 찾기를 하는 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느 취직이 그렇듯이 수많은 요소가 맞물리기 때문에 취업은 운빨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글이 통과되고 칭찬받는 것도 일종의 취직이다. 오늘도 한국과 독일 간의 문화와 언어 차이를 떠나서 어느 한 분야나 주제의 본질을 관통하는 원칙이 전달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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