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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Aug 13. 2020

번역하며 깨달은 것

결국은, 사랑

메타(meta)라는 말이 있다. 내가 달걀을 보는 게 아니라 달걀을 보는 나를 보는 나, 라는 뜻인 셈이다. 우리가 행동할 때 생각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나. 사회는 빠르게 망하지 않을까. 혹은 인간의 개입이 없는 동물의 왕국처럼 오히려 조화롭게 그렇게 흘러가고 살아져 갈까.


여하튼, 우리가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좋을 땐 철학이요, 나쁠 땐 잡념이다. 실제로 언뜻 봐서는 구분이 안 갈 수도 있기에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구박을 받았나 보다. 하하하.


나도 오늘 나를 보겠다.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 쉽게 가고 싶었다. 효율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또 진심으로 독일 언론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독일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 같아서, 수요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름 구성을 갖춰서 번역과 사족을 올리기 시작했다. 꾸준히 뭘 하지 않는 나지만 드물게 무언가에 꽂히면 또 꾸준한 나라서, 그리고 요즘의 내 정서가 매우 차분해서, 차곡차곡 글이 쌓여갔다. 그냥 뭔가 물리적으로 결과물이 생기고 축적되는 게 좋았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반응을 얻고 글이 아주 소소하게 노출도 되면서, 역시 남이 내 작품을 봐주는 것의 기쁨이 제일 크구나, 하는 것도 깨달았다. 미대를 나온 적이 있지만 소위 “붓을 꺾은”지 오래라 나를 보여준다는 것에 굉장히 인색해 있던 터라서 동굴 속에 자발적으로 지내다가 나오는 느낌과 흡사했다. 어, 햇빛이 생각보다 따듯하네? 원래 이랬나? 하는 느낌.


여기에 번역글을 쓰기 시작하던 가장 처음에 새롭게 발견한 기쁨도 있었다. 이것도 동굴과 햇빛의 관계처럼, 내가 잊고만 있었지 항상 그곳에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원천 그 자체의 에너지여서 똑바로 보면 안 보이지만 씨를 심으면 생명이 자라고 살결이 영글듯이, 그건 사랑이었다. 


막상 표현하라고 하면 사랑은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끌리고 남이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미 알겠는 것, 그것이 사랑의 행동이다. 행동을 통해서 사랑의 원래 의미에 하나씩 다가간다.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정확히 묘사하지 못한다. 똑바로 보는 것조차 못한다. 만화처럼 노랗게 붉게 그리거나, 우주에서 최첨단 기술로 사진을 찍는다. 둘 다 태양의 표현이지 태양 그 자체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공기가 안 보여도 우리는 숨 쉬듯이, 태양을 그 자체로 표현하지 못해도 우리는 땅의 과실을 냠냠 먹고 파릇한 잎사귀를 어루만지듯이. 태양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우리를 감싸고 당연하듯이 도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도 땅 위에서 태양이 하는 일들을 보며 강력한 존재를 느낀다.


독일 기사를 번역하며, 첫 글을 여기 올릴 때부터 내가 이걸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 이유는 땅이 아니라 태양에 있었다. 


이민자이신 부모님. 내가 한 살 때부터 자라나고 영글던 기간인 그 이삼십 년을 독일에서 사시다가, 지금은 일 년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내시는 부모님. 우리는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것을 보았다. 같은 것을 들어도, 같은 것을 읽어도, 나는 독일 사람처럼 생각해서 다른 줄 알았고 부모님은 한국 사람처럼 생각하셔서 다른 줄 알았다. 하지만 진한 한국 뿌리를 나눠 가진 우리가 독일에서 함께 살아가고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점이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 매우 비슷했고, 더 비슷해졌다. 시야가 충돌해도, 해석이 불일치해도, 가치관이 먼 나라 이웃나라 수준으로 이해가 안 돼도, 결국 우리는 뿌리가 같아서 비슷했고 비슷해졌다. 


당연히 나는, 우리 인식의 차이가 독일스러운 한국인과 한국인스러운 독일인 사이의 간격 때문인 줄 알았다. 사자가 사람 언어로 갑자기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 못할 거라는 유명한 철학 예시가 있다. 사자는 세상을 사자로 바라보니까 사람의 언어가 주어져도 생각하고 겪은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언어는 사고의 체계다. 의미이고 목표이고, 정서이고, 이유다. 그래서 벽이 되기도 하지만, 벽을 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밝혀주기도 한다.


학업 때문에 오래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 번역에서, 나를 맥 빠지게 하던 장벽이 이미 잔해만 남기고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번역은 나에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그 세계의 내밀하고 섬세한 것들을 잡고 손수 이 세계로 끌어오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내용과 작품의 번역은 나에게 사랑의 행동이다. 우선은 부모님을 향한, 비루하지만 나름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또한 내 자신을 표현하는 행동이다. 번역을 할 때 독일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반반인 내가 언어라는 거대한 장치를 통해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나의 흥미와 관심과 감동을 자유로이 운반하는, 오로지 나만의 공간에서.


이 안에 내가 있고, 과거의 나도 이 안 어딘가에 있다. 이 공간은 나와 타인이 대립하는 곳이 아니라 나와 내가 대립하던 곳이었다. 이국 간의 전쟁이 남긴 잔해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쉬이 이룬 업적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포만감이 내 품에 들어왔다.


벽을 넘으려는 허무한 시도에 영영 질려서 등을 돌려 자국으로 영구 잠적하지 않았던 행동이, 나를 가두고 희생을 요구하는 듯한 벽을 붙잡고 씨름하던 행동이, 심지어 이제는 포기하겠다고 마음먹던 절망의 순간들도. 그 무수한 아픈 행동들이 지금 보면 벽을 서서히 허물던 한 방울 한 방울의 염산이었다. 결국에는 벽이 있던 곳 너머의 나와 함께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행동은 자화상을 그린다. 그걸 통해 나를 본다. 그러려면 행동의 원동력이 어쨌든 어떠한 유형의 진솔한 사랑이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하는 제약의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 시기는 반드시 지나가고 평화의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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