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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희작 Aug 23. 2023

도화지

그 여백에 대하여.


길을 가다 우연히 흰 벽 앞에 다소곳하게 놓인 나무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면 그저 한그루 외롭게 서있는 나무였을텐데 오늘은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해 본다. 늘 푸른 나무들과 함께 있을 때는 ‘푸름 가운데 푸름’이기에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도화지처럼 하얀 배경에 담긴 나무는 어쩐지 주인공이 된 것 마냥 당당한 느낌마저 든다.


'도화지'를 한자로 하면 왠지 모르게 '흰 백白'자가 들어가야 할 것 같지만 도화지(圖畫紙)라는 한자에는 어디에도 '흰색'을 찾아볼 수 없다. 말 그대로 ‘도화’를 그릴 수 있는 모든 색깔의 종이가 도화지다. 하지만 내 마음속 영원한 도화지의 정의는 어릴 적 크레파스가 제 색을 오롯이 자랑하며 뛰어다니던 순백의 하얀 종이뿐이다. 이렇듯 하얀 여백(餘白)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유난히 내 삶에 '여백'을 많이 주고 싶은 이유도 이런 애정 때문일까? 인간관계, 생활공간, 일정 등에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려고 한다. 이 비어있는 공간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하얀 도화지 위의 크레파스처럼 원색의 가치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


글을 쓰면서도 여백이 갖는 힘을 종종 느끼곤 한다. 하얀 종이 위에 적은 짧은 단어조차 근사한 작품으로 탄생할 때가 있고, 무심하게 찍은 ‘점 하나’도 여백에서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 '점 하나‘에 담긴 고민의 흔적, 사랑, 기쁨은 하얀 도화지 위에서만 제 빛으로 반짝일 수 있다.


"나의 고유한 색을 담을 수 있는
세상 모든 여백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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