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비용, 바보비용 말고 추가해야 할 소비가 있다
결혼하고 나서 부부로서 처음으로 떠난 해외여행.
연인일 때 남편과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꽤나 이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밥을 내가 사면, 커피는 그가 사고, 여행을 가더라도 숙박비를 내가 내면, 교통비나 식비는 그가 내는 식으로. 이에 대해 별도로 대화를 한 적은 없지만 정말 자연스럽게 그렇게 ‘국룰’이 정해졌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의 가계는 어떻게 운영하는 게 좋을지 의논했다.
남편은 선뜻 모든 수입을 나에게 맡기고 용돈 받는 생활을 하겠다고 먼저 말했다.
“나는 (돈이) 있으면 다 쓰는 스타일이라 네가 맡아주면 좋겠어”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독립 생활하면서 경제적인 면에서 나에 대해 크게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는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빚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리가 비교적 낮은 전세대출이라도 어쨌든 빚은 빚이라는 생각 때문에 목돈이 생기거나 적금 만기가 되면 원금부터 갚게 되는 것이었다. 결혼하면 신혼집을 구하는데 분명 대출이 생길 테니 엄청난 수익이 발생하는 투자는 못하더라도 돈을 모으는 데는 집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소비 패턴은 많이 다르다. 특히 쇼핑할 때 극명하게 갈리는데, 남편은 속옷도 일주일 7일에 맞게 딱 7개만 구비하고 쓴다. 그러다 속옷이 헐면 그때 새 속옷을 산다. 나는 속옷, 세제, 바디로션, 칫솔 등 흔히 말해 생필품인 것들은 쟁여둔다. 다다익선으로 여기는 것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어쩌다 아웃렛을 가거나 즐겨 찾는 쇼핑몰이 할인하는 기간이 되면 몰아서 구매하기도 하고,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사두면 나중에 요긴하게 쓸 것 같아서 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남편은 한 때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푼 적이 있다고 한다. 그 품목들은 대개 굵직하다. 요약하자면, 나는 소소한 곳에 잔펀치로 돈을 쓴다면, 남편은 강펀치로 크게 돈을 쓰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결혼해서 처음으로 다퉜다.
일본 여행에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쇼핑. 나는 평소와 같은 패턴으로 쇼핑을 했고, 남편은 거기에 내 기분 맞춰주려 장단 맞췄다. 환전한 돈이 내 예상과 달리 빠르게 닳았다. 연인이던 시절엔 이 정도 내가 사면, 선뜻 지갑을 열었던 그인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본인을 위해 사준 것들이 냉정히 말해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라 사실 구매 의사가 없었다고 한다. 필요 없다고 하면 나의 ‘쇼핑 흥’을 깨는 게 될까 봐 맞췄을 뿐이라고. 나는 좀 억울했고 그로 인해 옥신각신 하다 좀 다퉜고 다음날 신혼부부답게(?) 아침에 눈 뜨자마자 포옹으로 사과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잘 넘어가긴 했지만 이는 앞으로 우리에게 꽤 많은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얼핏 스쳤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 부부는 다툼까지는 아니지만, 좀 삐걱대는 지점이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 없이 결혼 10년 차에 들어섰는데 결혼할 무렵만 해도 3살 연하인 남편은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해 밑천이 하나도 없었고, 여자는 부모님이 결혼에 대한 지원을 선뜻해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상대의 소비 습관을 보기엔 경제력 관점에서 보자면 둘은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았다. 당시엔 되레 여자가 값비싼 브랜드를 많이 알고 있어서, 남자가 겁을 먹어야 하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여자의 이 높은 수준을 맞추기엔 부담도 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 남편도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몇 번의 부동산 투자의 성공을 맛보니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건, 이 둘의 모습이 우리 부부와 완전 반대라는 것이다. 친구의 남편은 하루에도 수 십 번 자잘한 쇼핑을 한다고 한다. 쿠팡에서 전자동 쓰레기통이라든가, 전동 칫솔이라든가 혹은 요즘 젊은 세대들이 즐겨 입는다는 브랜드의 옷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얼마 전에는 러닝을 시작했는데 집에 러닝화만 5켤레가 넘는다고 했다.
친구는 “도대체 러닝 하는데 그렇게 많은 운동화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 러닝복은 또 왜 그렇게 사는지.. 퇴근하고 집에 가면 문 앞에 박스가 어떤 때는 천장 높이야. 쇼핑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인지 결혼 전엔 몰랐어” 라며 성토한다.
반면에 친구의 남편도 나름 할 말은 있다.
“네가 1년에 한 번 정도는 사는 그 명품 가방이나 액세서리 가격을 다 합쳐도 내가 1년 동안 사는 물건들 값은 반도 안될걸?”
이런 이유로 이 둘은 항상 투닥대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으로 감정이 퍼지진 않는다. 친구의 남편 이야기를 한참 듣고 보니 나의 친오빠가 떠올랐다. 생일 때마다 오빠가 10년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선물로 요구하는 건 나이키 운동화다. 지금도 집에 가면 소소하게 레고가 장식 돼 있다. 언젠가 오빠가 엄마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서 했던 말이 있다.
“우리 집은 친척 집 중에서도 꽤 잘 사는 것 같은데 막상 우리보다 집도 좁은 큰 집에 가면 사촌형의 나이키 운동화가 몇 켤레씩 있었어.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되더라. 우리 집은 왜 맨날 집이 없고, 나이키 운동화도 몇 날 며칠 엄마를 졸라야 겨우 한 켤레 받을까 말까인데 어떻게 그 집은 그렇지..?”
오빠말처럼 우리 집은 꽤 형편이 괜찮았지만 엄마는 늘 돈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긴 했다. 우리가 뭔가를 사달라고 할 때는 짥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을 졸라야 했다.
나는 이런 일화를 친구에게 말했다. 혹시 너의 남편도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그런 것도 같아.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부모님이 잘 안 사줬다고 하더라고. 근데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번도 우리 부모님한테 뭐 사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 CD플레이어가 이미 한 개 있었는데, 아빠가 출장에 다녀오면 신제품인 CD플레이어를 한 대 더 사다 주곤 했거든. 그래서 그런가 나는 정말 물욕이 없는 것 같긴 해”
실제로 친구는 명품 브랜드를 많이 알고, 어쩌다 한 번씩 구매까지 하는 경우를 보긴 했지만 그 횟수가 잦진 않았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친오빠와 나, 그리고 친구의 남편과 같은 소비 행태를 ‘한스러운 소비’로 명명하기로 했다. 어렸을 때 뭔가를 사려면 부모님께 투쟁해야 했던 우리는 어느 정도 수입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그 한을 풀기 위해 소비를 하는 것이다.
이 얘기를 했더니 남편 역시 친구의 말에 공감한다. 외동아들인 남편은 물건에 대한 욕망을 키운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필요하다고 말하기 전에 부모님이 사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비합리적인 소비를 할 때 특별한 말을 갖다 붙이곤 한다.
-온갖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용하는 ‘시발비용’
-초보나 초심자가 불가피하게 소비하게 되는 ‘바보비용’
그리고 어린 시절의 결핍을 자꾸만 소비로 채우려 하는 ‘한스러운 소비’..
‘한스러운 소비’는 결국 결핍에서 비롯된 미성숙한 소비의 모습인데 왜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이 결핍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긴 하는 것일까?
어쨌든, 이 한스러운 소비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점점 줄여야 할 지출 항목임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로 당분간 나도 소비를 줄여보고자 한다. 이번 생일이 지나면 정.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