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고 나서야, 그때가 생각났다
1권당 400~500페이지 가량 되는 <삼국지> 6권을 6개월에 거쳐 완독했다.
그 사이에 결혼 준비 하고, 결혼식을 치루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
어렸을 때 만화로 봤던 <삼국지>를 굳이 지금 왜 난 다시 제대로 읽어보자고 마음 먹은 것일까?
10년 넘게 여초회사에 다니다가 3년 전, 전직 같은 이직을 하고 새로 바뀐 조직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직한 회사는 근속 연수가 30년 되는 분들도 꽤 있고, 사무직과 일반직을 나누어 채용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20~30년 전에 입사한 여성 중에는 고졸이나 초대졸 출신이 많다. 사무직과 일반직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며, 동시에 사내커플 혹은 부부도 많다. 보통은 사무직 출신의 여성과 일반직 남성이 결혼 하며, 얼마간에 시간이 지나면 여성은 보통 퇴사를 택한다. 명분은 출산과 육아가 대부분이지만 진짜 실상은 모르겠다. 사내에 존재하는 그 계급 차이에는 임금의 차이도 있으니, 계산기를 두드려 봤을 때 여자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보다 가사 및 육아를 하는 쪽이 더 이득이라 봤을 수도 있고, 혹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꿈꿨던 여자의 능동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샛길로 샜는데, 남초 조직의 이 회사는 군대와 매우 흡사한 성격을 띄고 있다.
조직을 다뤄본 적이 많은 장교 출신들이 일반직에 꽤 많이 포진 돼 있다. 일반 현역과 장교 출신 사이에도 역시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한 대리는 사회에 나와 장교 출신의 힘을 새삼 느꼈다며 아들에게도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라면 무조건 ROTC를 지원하게 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그에게는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졌다. 뒤늦게 알았는데 ROTC는 어린 나이에 크든 작든 한 조직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주로 하는 업무에 적용시키기 꽤 적절하다고 한다. 가뜩이나 군대 문화가 팽배한 이 회사에서 그들의 경험은 실용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는 그들과 동일한 일반직으로서, 잘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큰 집엔 나와 터울이 12살, 5살 있는 사촌 오빠들이 있다. 2살 많은 나의 친오빠는 아마도 여동생인 나와 같이 노는 것보단 나이차는 나더라도 함께 몸으로 놀고, 게임 할 수 있는 형들과 노는 게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명절 때마다 큰 집에 가면 오빠는 나를 따돌리고 그 사촌오빠들과 놀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실 나도 틈만 나면 싸우기만 하고, 고작 2살 차이에 엄격한 오빠 노릇을 하는 친오빠보다는 명절 때 때마다 놀리긴 해도 자상하고 재미있는 사촌오빠들과 노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그 사이에 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잠시 낮잠에 들거나 딴 짓 할 때 남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셋이 어울려 집 근처 오락실을 가서 몇 시간씩 있다가 오곤 했다. 그런 오빠들을 기다리다 지쳐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작은 고모가 종종 위로 해주긴 했지만 또래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아이의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빠들과 놀기 위해 더 털털하고 무던해야 하려 애썼다. 오빠들이 아무리 짓궂게 놀려도 상처 받거나 삐치거나 울기보다는 더 세게 맞받아치는 편이 그들과 오래 놀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점점 내가 오빠들의 장난에 대응하는 방식도, 어휘도 세 졌다. 말투는 더 거칠었고 투박했다. 나는 급기야 초등학교 6학년 때 ‘남자’라는 별명까지 얻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초등학교 때 내내 성정체성을 부정했던 것 같다. 말과 행동은 남자 같은데 육체적인 면은 하필 친가의 고모들을 닮아 2차 성징이 빨리 찾아왔다. 가슴이 커져 브래지어를 차야 했을 때 스스로 징그럽다 느꼈다. 어떻게든 어깨를 움츠려 큰 가슴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봤자 나의 성장 속도는 더뎌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중, 여고, 여대에 진학하면서 나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빈도는 적어졌다. 내 언행과 달리 의외로(?) 여성스러운 내 몸매가 친구들 사이에서는 반전으로 통했다. 첫 연애를 한 이후부터 나는 내 여성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삼국지>를 다 읽고 나서야 내가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명확해졌다.
어렸을 때 사촌오빠들과 대화 몇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었던 그때처럼 나는 이 회사의 남자들과의 대화에 소외받고 싶지 않은 열망이 컸다. 배제를 할거면 배려도 마다하고 싶었다. 실제로 내 작전 아닌 작전은 먹혔다. 내가 회사에 <삼국지>를 들고 다니는 걸 알게 된 한 과장은 “와, 과장님 <삼국지>읽어요? 여자가 <삼국지> 읽는 거 처음봤어요!”라고 반색하며 양 손으로 엄지를 세웠다. 뭐, 그렇게 대단한 책인가 싶어 이후 더 독서에 박차를 가하긴 했지만, 책을 모두 다 읽고 난 후 나는 좀 허무해졌다.
나는 왜 그토록 남자들 사이에 잘 어울리려 애쓰는 것일까?
나는 왜 '여대 나온 사람 같지 않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일까?
정확하진 않지만 나라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에 열심히 적응하고, 부단히 맞추려 애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나는 털털한 척 할 뿐 털어내지 못하고 상처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