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나는 진작 패셔니스타였던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사람들이 독서에 대한 관심도가 꽤 올라간 듯하다.
내가 즐겨 살펴보고 있는 SNS에 병렬로 잔뜩 쌓아 올린 책을 찍어 올린 사진들이 가득한 걸 보면 말이다.
국문학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독서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솔직히 책은 입시준비를 위한 필독서 외에는 ‘나중에 대학 가면’ 해야 할 리스트 중 하나로 여겼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난 인문학부에 입학을 했고, 2학년에 진학하기 전 전공을 정해야 했기에 별생각 없이 (그나마 수업이 쉬워 보이는) 국문과를 택했다. 물론 그건 완벽한 오해였고,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 ‘국문과’를 전공했다고 말하기 정말 미천한 수준이다. 심지어 학생 때 들었던 수업 중엔 전면적으로 독서를 장려하는 교양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 책을 읽지 않고 참석한 게 들통나 교수님께 우아하지만 따끔하게 지적 받았던 경험도 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내가 책을 좀 읽어 봐야겠다고 다짐한 게, 취업하겠다고 휴학 한 후였다. 나의 희망 진로는 대중을 상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송국 PD였고 그러려면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부족하다 느꼈다.(당연하지) 동네에 있는 도서관을 매일 갔다. 책을 다 못 읽더라도 일단 빌리는 것에 의의를 두기도 했다. 특히 내가 집중했던 건 하버드대생들이 읽는 도서리스트였다. <자본론> <자유론> <미국의 민주주의> 등…. 그런 책만 살펴보려고 했더니 손이 영 안 갔다. 시켜서 하는 일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습성 때문이었는지, 정말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이때, 박경리 작가의 <토지>, 조정래 작가의 <한강>, <태백산맥> 등 장편 소설을 읽었다. 이때 아니면 읽기 어려운 책이라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복학한 이후에도 나는 가방에 책 한 권을 꼭 들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한 장도 읽지 않은 날이 있더라도 의무감처럼 그렇게 들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나만의 독서 루틴이 생겼다.
첫째, 가방은 책 한 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살 것.
둘째, 읽다 좋은 글귀가 있으면 북마크 포스트잇을 붙일 것
셋째, 다 읽고 나면 포스트잇 붙인 곳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독서록에 작성할 것.
넷째, 셋째까지 과정이 완료돼야 비로소 ‘완독’으로 표시할 것.
다섯째,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도 포기하지 말 것. 이로 인해 독서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것 같으면 아예 장르가 다르거나 좀 더 편하게 읽히는 책과 병행할 것.
여섯째, 여행 가기 전에는 반드시 책 한 권을 챙길 것. 이왕이면 현재 읽고 있는 책 말고 새로운 책을 고르고, 그중에서도 어려운 책을 고를 것. 최상의 독서 환경은 기내임이 명백함으로!
일곱째, 자기 전에 반드시 책을 읽을 것. 독서 앞에 불면은 있을 수 없음! (아,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불면이 아니라 수면을 피하려 애쓰게 됨)
사실 내가 책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적 허영심’이나 ‘지적 열등감’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그 책을 나만 전혀 몰라 곤란했던 경험이 있다. ‘왜 나만 모르고 있지?’ 그런 경험을 또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지!’와 같은 우월감을 갖기 위해 나는 독서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편으론, 동문 같은 과 출신의 절친 C가 뼈를 때리며 했던 말도 잊히지 않는다. “인풋 대비 책은 아웃풋이 너무 적어. 감동? 깨달음? 뭐가 됐든 영화는 2~3시간이면 되는데 책은 그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 그런 의미로 책은 너무 비효율적인 콘텐츠야” 그 얘기를 함께 듣고 있던 한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다고 답해줬다. 나는 반박할 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었는데 말이다. 뒤늦게나마 지금에서야 반박하자면, 책은 휘발성이 적다. 특히나 그 책을 읽고 난 후에 쌓이는 갖가지 글귀와 생각들이 내 머리와 마음에 켜켜이 축적된다. 그 축적된 것들이 어느 순간 어떻게 발휘될지 모른다. 그래서 일단 열심히 저장한다. 내 인생의 어떤 순간에 이것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 모르니..!
언젠가 홍진경이 자신의 유튜브에서 딸아이에게 독서만큼은 잔소리한다고 했을 때 그 이유를 자신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게 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독서가 패션이 된 지금, 그 현상을 이죽거리고 빈정대는 마음도 생기는 게 사실이다.
“너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책을 읽었어?”라는 말도 새어 나오려 한다.
그런데 책이 패션이 된다면 나는 진작부터 패셔니스타였던 것이고, ‘그걸 왜 너는 몰랐니?’라고 우월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허나 나는 독서를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평생토록 밥 먹듯이, 운동하듯이 해야 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 점에서 나와 그들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을 바꿔 나와 같아지면 좋겠다.
그러니까 책이 불멸의 패션, 클래식 샤넬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