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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Jun 19. 2023

캐나다 역사 훑어보기

아무리 다채로운 물감이 있어도 허공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듯이

인간의 마음도 역사라는 캔버스가 있어야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난다. 

우리는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삶을 펼쳐나가고 말이나 글이나 행동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교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심성도 착하고 능력은 출중하며 참 성실하게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종교적 신념이나 역사적 가치관이 왜곡된 캔버스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삶이 보기에 안타까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물론 모든 것이 본인의 선택이고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며 그 평가는 인간의 몫을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적어도 세상이라는 험한 바다를 항해할 때 파멸이라는 암초를 피하기 위해 역사라는 등대의 불빛을 살피는 노력을 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의 예의와 의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어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지만 워낙 논쟁과 이견이 많은 소재라 그만 접어두고 또 이 글의 주제에 맞추어서 캐나다 역사를 간단히 훑어보기로 한다.


1. 선사시대 : 초기 인류의 아메리카 대륙 이주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을 보면 위스콘신 빙하가 있었던 1만 7천 년 전후에 낮아진 해수면으로 연결된 베링 육교를 건너 소규모 선조 집단이 다른 인류 집단들로부터 고립된 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석기를 사용하여 수렵 채집을 하며 퍼져나가던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에 의해 서로 다른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언어의 차이는 사회 구성원의 자기 정체성과 정신적 요소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캐나다 원주민의 종교는 의인화된 자연과 애니미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2. 16세기 스페인인의 탐험

15세기 후반부터 스페인 어부들이 그랜드 뱅크에서 주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래기름과 옷을 만들기 위해 북극고래와 흰고래를 사냥했다. 16세기 중반에는 라브라도와 뉴파운드랜드에 적어도 아홉 곳의 전초기지가 세워졌고 매년 여름 약 2000명 정도가 고용되었다. 그러나 두 고래 종이 거의 멸종에 이르고 이 작업은 17세기 초에 급격히 쇠퇴했다.


3. 16-17세기 초기 식민시대 : '뉴프랑스'의 설립과 몰락  

1612년 사무엘 드 샹플랭이 만든 뉴 프랑스 지도

16, 17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어업과 모피무역을 위해서 동부 캐나다인 아카디아와 퀘벡에 정착촌들을 세웠다. 뉴프랑스가 매우 넓은 영토에 설립되면서 프랑스인들은 원주민의 기술과 프랑스의 가치를 결합하여 원주민과의 협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 후 150년이 넘게 아카디아는 세인트 로렌스강의 중심지에서 대호수들과 미시시피 계곡의 상부 지역으로 계속 확장해 갔다. 그들의 팽창은 와이어도트 부족, 이로쿼이 부족, 그리고 특히 영국의 반발을 샀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 등에서 패배한 프랑스계 아카디아인들은 1755년에 추방되었고 1763년 파리조약으로 북미 식민지 대부분을 영국과 스페인에게 빼앗겼다. 그 결과 프랑스 고위층만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농부들은 정복자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생계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18세기 대영제국의 통치

이후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1776년 7월 4일에 독립을 하였고, 영국령 북미(BNA)는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섬, 그리고 퀘벡으로 줄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미국에서 박해받고 추방당한 많은 미국의 왕당파를 돕기 위해서 영국은 1784년에 뉴브런즈윅 주를 만들고 1791년에는 퀘벡과 인근 북동 지역을 lower Canada로 남부 온타리오 지역을 upper Canada로 나눴다. 1812년에는 미국과 서로 국경을 침범하는 전쟁이 벌어졌으나 곧 이전 국경을 회복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갔다.

서부에서는 북위 48도선을 미국과의 국경선으로 합의하고 나서 영국 정부는 1848년에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태평양 해안을, 1849년에는 밴쿠버섬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1854년까지 미국과의 대부분의 국경 문제가 해결되었다.


5. 연합운동과 캐나다 자치령 수립(독립)

미국독립에 동요된 영국령 북미 정치인들은 샬롯타운 회의와 퀘벡 회의 등 일련의 연합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867년 7월 1일, 영국 하원에서 대영 북아메리카 조약이 통과되자 영국령 북미의 식민지는 네 개 주(온타리오, 퀘벡,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로 구성된 연합 형태의 캐나다 자치령이 되었다.


6. 19세기 후기 동맹과 서부 캐나다 정착

1867년 독립 이후 다른 영국령 북미 식민지들과 영토들이 캐나다 동맹으로 합류하거나 편입되기 시작하여 1880년까지 현재의 대부분 영역을 포함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허드슨 베이 사에서 획득한 북극의 광대한 영역이 포함되며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가 1949년에 마지막으로 편입되었다.

서부 캐나다의 탐험로 개척과 정착은 캐나다 후기 동맹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이는 원주민과의 수많은 무력충돌을 기반으로 한 미국의 서부 개척과는 대비되는 비교적 평화로운 과정이었다. 개척 과정에서 발생하는 원주민과의 영토 및 치안 주권 갈등은 1871년부터 1877년 사이에 북서 온타리오와 지역의 원주민 부족과 맺은 일곱 건의 조약을 시작으로 하여 주로 협상과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이런 미국과 캐나다의 원주민 갈등 해소 방식의 차이는 초기 모피무역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즉, 캐나다 지역에서 주로 모피를 조달했던 허드슨 베이 사는 원주민이 사냥한 모피를 구입하는 중계무역을 했으나 미국 지역에서는 원주민의 영토를 빼앗아 척박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몰아내고 그 땅에 백인이 정착하는 과정이어서 생존을 위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869년에 마니토바에서는 프랑스계 혼혈인(Métis는 인디언 여자와 유럽 남자의 혼혈인을 말함) 루이스 리엘이 이끈 반란이 일어났으며, RCMP(왕립 캐나다 기마경찰대)는 서부에 법과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1873년에 창설되었다.

그때까지 정착민들에게 서부를 열어주고 서부를 연결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륙 횡단 캐나다 태평양 철도로 1885년 밴쿠버까지 개통되었다. 당시 철도 건설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이들은 중국에서 온 1만 5천여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1982년의 캐나다 헌법 제정으로 캐나다는 영연방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7. 세계대전과 번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제2차 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적극 참전하여 승전국이 된 캐나다는 그 후 마국과 더불어 전후 복구사업으로 G7의 일원인 근대적이고 강력한 산업국으로 돋움하였고 국제연합과 NATO 등의 국제기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8. 이민사

캐나다는 이민으로 형성된 국가이므로 이민의 역사를 별도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 이민은 크게 5단계로 나누는데

(1) First Stage or Wave:

약 2세기에 걸쳐 프랑스계 이민이 Quebec과 Acadia에 정착한 것을 필두로 하여 2차에 걸쳐 약 7만여 명의 영국계가 미국독립에 반대하여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2) Second Stage or Wave:

1812년 전쟁 이후 약 25만 명의 영국과 아일랜드계 이민이 캐나다로 왔으면 이중 80%가 영어 사용자였다. 1846년 발생한 아일랜드 감자기근 때는 80만 명이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그 여파로 1851년 캐나다 인구는 250만을 돌파했다.

(3) Third Stage or wave(1890-1920) 

1차 대전 중에 400,000명 이상의 이민자가 유럽에서 캐나다로 왔다.

(4) Fourth Stage or Wave(1940s-1960s):

 2차 대전 이후에는 282,000명이 유럽에서 캐나다로 이민했다.

(5) Fifth Stage or Wave(1970s-Present):

1970년대 이후로는 개발도상국가로부터의 인구유입이 적었는데 1976년에 the Immigration Act가 통과되자 연 225,000-275,000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2017-2020년에는 인구의 1%까지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2022년 영주권을 발급받은 이민자는 437,180명에 달하며 2036년에는 이민자가 캐나다 전체 인구의 30%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자료; 위키백과, History Of Immigration In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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