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빛깔

by quietrebel

일요일 오후, 바깥은 영하 6도였다. 체감 온도는 무심하게도 영하 15도까지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손 끝이 시린 것보다 입안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더 절실한 날이 있다.


힙 위주의 하체 루틴을 수행해야 하는 날. 나는 라이트 브라운 컬러의 레깅스를 조심스럽게 입었다. 내 엉덩이의 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색. 하지만 문제는 니삭스였다. 어두운 그레이 컬러, 반드시 그 니삭스여야만 했다. 서랍 속을 헤매느라 20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기어코 그것을 찾아내 신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안심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에어팟을 귀에 끼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동네 헬스장은 한산하고 적막했다. 몇몇 남자들과 나, 그게 전부였다. 처음 보는 트레이너가 다가와 샤워실 수도가 동파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의 가장 사적인 시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성될 테니까.


나는 스트레칭 존에 누웠다. 일주일치 피곤이 묻은 얼굴과 어젯밤의 흔적이 남은 뱃살. 그것들을 굳이 감추려 애쓰지 않은 채 폼롤러 위에 몸을 맡겼다.


글루트 머신에 원판을 꽂고 힘껏 밀어냈다. 이어지는 힙쓰러스트. 엉덩이가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단단하게 올라가기를 바라며 숨을 뱉었다. 거울 뒤편으로 아저씨 한 분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펌핑에만 집중했다.


레그프레스 앞에서는 조금 머뭇거렸다. 며칠 전 20kg 원판을 발톱에 떨어뜨렸던 기억이 통증처럼 스쳤다. 결국 10kg 원판 두 개를 끼우는 것으로 나 자신과 타협했다. 조금 비겁해도 괜찮다. 덤벨 존으로 옮겨가 8kg와 10kg 덤벨을 나란히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목재 기둥 앞이었다.


데드리프트를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일렁였다. 벤치에 앉은 남자, 기둥 뒤의 남자,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 남자. 그들의 시선이 나를 에워싸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이 레깅스의 색깔이 우리 모두를 착각의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시선이 관음이든 착각이든, 혹은 나의 오해이든 상관없다. 헬스장은 결국 자신의 몸을 탐닉하는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 상자다. 타인의 시선 따위가 내 근육의 펌핑을 방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시선들은 기분 좋은 고양감이 되어 나를 자극한다.


라이트 브라운의 레깅스와 공들여 찾아낸 그레이 니삭스. 이 조화가 아깝지 않게. 지금 이곳의 주인공은 나다. 설령 그것이 찰나의 착각일지라도, 나는 이 미친 기분이 꽤 마음에 든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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