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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그늘에는

by 건우

낭만의 그늘에는 누군가 있다. 좋아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3일간의 체육대회가 끝났다. 담임일 때는 딱 하루만 갔다 오면 됐는데 체육부장은 그럴 수 없다. 이벤트 업체를 불러서 하는 체육대회였지만 편하지만은 않았다. 담당자라는 무게와 700명이 넘는 학생 수가 내 양쪽 어깨를 눌렀다. 야외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하기에 날씨도 좋아야 했고, 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 사고도 나면 안 됐다. 끝을 알고 보는 하이라이트는 마음이 편하니까 결론부터 말해야겠다. 체육대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바야흐로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학교에서 운동회를 했다. 맞다. 그때는 운동회였다. 뭘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떠오르는 게 몇 개는 있다. 개인 달리기 시합에서 손등에 도장 받고 숫자대로 선물 받기. 선물은 학용품이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에는 부모님과 같이 밥 먹기. 그때는 가족뿐만 아니라 번데기 파는 아줌마, 색깔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도 오셨다. 운동회 중간에는 학예회처럼 준비한 무언가 발표하기. 나는 풍물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꽹과리를 들고 대열 가장 앞에서 친구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야 했다. 동그라미도 만들고 달팽이처럼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땅도 땅도 내 땅이다~’하는 가사도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게 용하다. 아마 궁채로 머리를 많이 맞아서 그런 것 같다. 발표는 꽤 멋졌겠지? 그 안에 있어서 결과는 잘 모르지만.


요즘 체육대회에는 전문적인 팀을 초청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팀이 가지고 있는 물품과 놀이 전문 MC를 섭외한다. 옛날처럼 학생들이 발표하는 시간은 따로 없다. 반별(혹은 학교 전체) 배움 발표회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개인 달리기는 요즘도 한다. 도장에 숫자만 없다. 이번에 보니 다섯 명 모두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더라. 그리고 체육대회에 가족이 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긴 하지만 혹시나 참석하지 못하는 가정의 아이를 고려하는 것 같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는 그렇다.


체육대회 프로그램은 대부분 달리기다. 체육대회의 꽃인 계주를 비롯하여 사다리 들고 달리기, 애벌레봉 타고 달리기, 조각판 맞추기, 바구니 쌓기 등 다 달려야만 할 수 있다. 다행히 아이들은 넓은 공간을 보면 달려야 하는 호르몬이 나오고 있어서 아무 문제 없다. 도시락을 먹고 나서도 달리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날 최고 온도가 26도였는데.


하지만 그날은 달리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하필이면 체육대회 전에 발을 다쳐 간이 깁스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체육관 중간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을 때 친구는 외곽 의자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기는 심심하니 괜히 걸어 다녔지 싶었다. 나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오늘 점심 뭐 싸 왔어?”

“몰라요.”


많은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차마 더 말을 걸 수 없었다. 내가 그 친구를 다시 찾아간 건 박 터트리기 게임을 할 때였다. 달리지 않아도 되는 경기라 얼른 친구에게 다가갔다. 가서 던져보자고. 쭈뼛쭈뼛하더니 따라나서서는 박을 향해 공을 던졌다. 그 친구는 3시간이 참 길었겠다.


프로그램이 끝나도 체육대회는 끝나지 않는다. 교장선생님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아이들은 체육관에서 나갔다. 그리고 옆 주차장과 인라인스케이트장으로 이동했다. 여름을 알리는 새초록한 나뭇잎 아래에 아이들은 돗자리를 폈다. 그리고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다. 색깔이 많았지만, 따스한 햇빛 아래 조화로이 아름다웠다. 담임선생님들도 같은 생각을 하셨는지 이내 핸드폰을 꺼내시고는 아이들 사진을 찍기 시작하셨다. 가히 낭만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내가 챙겨야 할 아이들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셨겠지만, 그 풍경은 참 예뻤다.


밥 먹는 것도 진짜 걱정이 많았다. 일단 비가 오면 안 되었다. 나는 2주 전부터 날씨 앱을 들락날락했고, 근처에 비를 피해서 먹을 수 있는 곳도 찾아보았다(결국 없어서 비가 오면 교실에서 먹기로 했다). 하루 전에도 해가 쨍쨍하다는 예보를 믿을 수 없었다. 체육대회 프로그램을 선정할 때는 어떤가. 같이 할 수 있는 놀이인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했다. 시뮬레이션을 그려보지 않으면 재작년처럼 아이들이 기다리다 지쳐 모래놀이만 하다가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일에는 또 어떤가. 체육관으로 가는 버스 10대가 제 시각에 와서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한 버스 기사님께서는 와야 하는지 모르고 계셨는데 일찍 전화하지 않았다면 전체 일정이 딜레이될 뻔했다. 승리욕이 고조된 3시간 동안 아이들이 기분 나쁜 세레모니를 하지 않도록 자제시켜야 했고, 누군가가 마시다 바닥에 흘린 물을 닦아야 했다. 코디도 신경 썼다. 안에는 하얀 옷을 바깥에는 파란 옷을 입었다. 그다음 날은 그 중간인 하늘색 옷을 입었는데, 이런 걸 고민하는 내가 웃겼다. 그런 체육대회가 모두 끝나고 집에 와서는 나에게 보상을 주겠노라며 닌텐도 스위치를 들었는데 5분도 지나지 않아 게임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쌓여온 긴장이 풀리며 눈꺼풀도 같이 풀려버렸다.


최근에 인스타그램에서 크라잉넛의 ‘좋지 아니한가’를 떼창하는 영상을 봤다. 작은 라이브카페에 사람들은 넘쳐 인도까지 가득 찼다. 그리고 노래했다.


‘일기를 쓸만한 노트와 연필이 생기지 않았나 내 마음대로 그린 세상’

‘우린 노래해 더 나아질 거야’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전율이 일었다. 제목처럼 낭만이 치사량을 넘었다. 그러면서 반대편을 생각했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이하는 이 밴드도 우여곡절이 많았겠지. 1시간이 넘는 그 공연에서도 나는 1분만 알고 있으니까.


낭만의 그늘에는 누군가 있다. 멋져 보이는 풍경에도 누군가의 고민이 있고, 즐거워보이는 광경에도 남모를 고초가 있다. 도시의 야경은 아주 예쁘지만 야경이 아니라 야근이었던 것처럼. 우리 집 싱크대는 늘 깨끗했는데, 거기도 누군가의 수고가 있었겠지. 이건 등골이 조금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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