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도 선생님이 있다. 글자를 바르게 쓰라며 내 손등을 때리셨던 1학년 담임 선생님. 거울 보고 스매싱 자세를 몇백 번 연습하게 하셨던 탁구부 5학년 선생님. 장난치면 꽹과리채로 머리를 때리셨던 중학교 음악 선생님. 속상하게도 세 분의 선생님이 먼저 떠올랐다. 좋은 기억의 선생님도 있다. 두꺼운 자료집을 가지고 다니시며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던 한국 지리 선생님. 덕분에 한국 지리가 좋아졌고, 그 과목으로 수능까지 쳐서 50점까지 받았다. 매주 한 편의 에세이 과제를 내주시고 첨삭까지 친절히 해주셨던 국어교육과 교수님. 그 5개월은 튼튼한 글쓰기 바닥공사였다. 그리고 관현악단 공연 연주곡을 바꾸라고 조언에 조언하셨던 음악교육과 교수님. 지금 생각해도 곡을 바꿔야 했다. 젊은 대학생의 패기와 어리석음으로 좋은 공연 기회를 맛있게 살리지 못했다.
사실 먼저 떠올랐던 선생님들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안 좋지만도 않다. 덕분에 내 글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고, 지금도 탁구만큼은 주변 친구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며, DVD로 보여주셨던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은 공연장에서도 2번이나 볼 정도로 애정하는 작품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그랬을 뿐,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셨다. 작은 관심과 작은 진심이라도 없었다면 혼내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 아니던가.
죄송하게도 선교원(교회 유치원) 때 선생님은 기억이 안 난다. 엄마는 매번 조은아 선생님께서 너를 엄청나게 좋아하셨다며 말씀하시는데 진짜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쫄쫄이 다람쥐 복장을 하고 춤을 췄을 때다. 아마 사진이 남아 있어서 생각이 났지 싶다. 그 발표회를 위해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셨을까. 비단 발표회 뿐이겠는가. 나는 유치원(혹은 어린이집) 교사의 노고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부모님 다음으로 나를 가장 세세하게 챙겨주신 분이실텐데. 그 선생님을 기억조차 못 하다니. 이런 불제자* 같으니라고.
바쁜 오후를 보내던 날이었다. 여중생 3명이 체육전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옆자리 연구부장님을 찾았다. 출장을 가셔서 안 계신다고 하자 아쉬운 표정을 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선생님 자리가 어디인지 물어보더니 직접 준비한 과자와 편지를 책상 위에 두더라. 편지가 잘 보이도록 위치를 조정하고 있는 광경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처음에는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고 싶었다. 재미있고 배움이 넘치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 아이의 삶에 아주 그냥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선생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냐는 질문에 ‘그때 재밌었지’ 하며 자연스레 이름이 기억나는 선생님이고 싶었다. 아이의 성장을 돕고, 성장한 아이가 감사를 표현하는 선순환. 교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는 사실은 이 직업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가 점점 보람이 밥 먹여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 아무개 선생님을 바라기도 한다.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 그리고 4학년 선생님. 1년 동안 같은 교실을 공유했으니 희노애락이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 어렴풋이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흐린 안개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기억만 안 났지 선생님의 1년은 분명 내 밑거름이 되었거늘. 이름 모를 흙처럼 때에 따라 적절한 자람을 도와주셨거늘. 여기까지가 아무개쌤의 영역이구나. 나 또한 이 영역을 생각하며 묵묵하기로 한다. 기억하는 건 학생 몫, 더 바라는 건 내 욕심이니까
선생님의 선생님. 그 마음을 담아 써 내려갔던 가사로 감사를 대신해 본다.
잘 지내시죠? 그때처럼 철이 없어서. 이럴 때만 생각합니다. 저 모르시겠죠? 괜찮아요. 학생이 많았잖아요. 이젠 이해돼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제가 해보지 못한 생각도. 많은 걸 알게 되었죠. 덕분에. 고마워요. 실수 속에서도 기다려 주신 것. 이제 제가 있는 곳에서. 기다릴게요. 선생님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제게 그러셨던 것처럼.
-
*불제자: 그냥 불효자 같은 것. 내가 만든 단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