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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wk eye Aug 19. 2021

11. 검도 이야기

간지 나서 시작한 검도, 인생의 한 부분이 되기까지

1997년  3월 난 부산의 한 대학에 입학한다.

IMF 구제금융으로 여러 상황이 어려워진 현실에 나 스스로가 군장학생이라는 제도에

선발되어 졸업 후 군대에 가게 되었다.

그해 겨울 학교 내 군장학생 선후배 모임이 있어 참석하게 된 나는 타 학과 95학번 선배를

알게 된다. K선배는 당시 3학년으로 검도부 창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고 난 흥미가 생겨 그해 겨울

동아리 창단이라는 준비에 동참하고 그때 검도에 입문하게 된다.

본격적인 검도의 시작은 98년 봄부터 이다.

부산의 벚꽃은 참 아름답고 검도복과 어울리는 배경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검도의 기초를 배우기 위해 매일 오전 6시에 학교 피트니스 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참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우리 검도 동아리는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졌다.

검도복과 호구를 입고 운동을 갈 때면, 나 자신이 경건해지고 무언가 도전을 위한 비장함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K선배는 검도 2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2단임에도 실력이 꾀 우수하였다. 때문에 기초를 여느 도장에서 배운 것보다 잘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4단이지만 그때는 2단도 매우 높아 보였다.


검도는 생각만큼 쉬운 운동이 아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작대기 들고 보호구 입고 칼싸움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기초 수련과정이 매우 중요하고 쉽게 늘지 않는 운동이 검도이다.  

 대학 2학년 동기들은 다들 군대를 갔다. 때문에 동기들이 군에  간 이후 운동에 전념할 수 있어 검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처음 도복을 입고 죽도 파지법과 발 스텝 운동을 시작한 내가 이제는 4단이라니 세월이 참 무성하다.

난 3학년에 초단을 승단 후  4학년 초 2단 심사에서 한번 낙방을 경험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검도 4단까지 한 번에  합격했던 내가 유일하게 낙방했기에 기억에 남는 심사였다.

대학교 3학년 봄, K선배는 학사장교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고 나는 동아리 회장을 맡게 되었다.

1기라는 책임감으로 어쩔 수 없이 회장을 맡았지만, 1년간 동아리에 집중하여 활동한 경험이 아직까지

조직 관리함에 있어 많은 도움과 밑거름이 된 거 같다.

당시 추억은 이제 2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회상이 된다.

검도는 기초가 중요하다. 나 역시 기초가 잘 배웠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나름 기본 표준 자세로 수련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후배들이 들어오고 선배라는 위치에서 자유분방함이 아닌 어느 정도 절제가 필요한 운동이었기에

꽤 어려운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동아리라는 조직과 검도라는 운동 이두가지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 내겐 많은 부담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많이 부족하였고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고 훈련하였더라면,

더욱 훌륭한 동아리 조직이 될 수가 있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지금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 23년의 모습과 많이 변화되었고 운영방식도 바뀌어 보이긴 하지만, 시대에 흐름에 맞게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보면 대견하다.

첫 호구(검도 보호구)를 착용하는 날 장비를 착용하고 기본 연습을 했던 기억은 검도가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도록 힘들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사실 K선배가 약간의 과도한 훈련을 진행한 것도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그 경험은 나에게 끈질김과 열정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잡초근성 같은 것들을 키워주었다. 난 검도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으며 약 3년간 오전 오후 검도를 수련하는 열정 검도인이 되었다.


그 결과 1999년 겨울 내 졸업 직전 부산에서 열리는 재부산 동아리 검도대회에서 여러 예상을 깨고 개인전 우승을 하게 되었다. 죽도를 잡은 지 2년 만에 부산전 지역 대학 동아리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나름 성취감도 있었지만, K선배도 하지 못한 우승을 내가 하게 되었다는 것에 많은 칭찬과 축하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1년 2월 동아리를 졸업하고 나도 학사장교로 임관하기 위해 육군 제3사관학교에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3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당시 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을 겪게 된다.

임관 전 3차 외박을 나온 나는 동아리와 대학 동기들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고 충북에서 중위로 근무 중인 K선배는 나를 만나 격려해주기 위해 겸사겸사 부산에 내려왔다.

그리고 동아리에서 운동을 함께 하고 K선배와 동아리 후배들이 함께한 자리를 마련하여 약 9시까지 술을 먹었다. 이후 난 학과 동기들과의 만남을 위해 다시 이동하여 만남을 가졌다. 나 역시 술을 많이 먹었기에 다음날까지 숙소에서 기절해 있었다.  새벽 6시쯤 당시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K선배가 죽었데 "

어? 뭔 소리야?

학교 앞에서 술에 취해 잠시 앉아 있다가 교통사고로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20여 년을 살면서 주변에 친했던 지인이 사망한 경험을 하지 못했던 지라 너무 경황이 없었다.

아침에 멍한 기분으로 장례식을 찾아보니 정말 청천벽력 날벼락이란 말이 따로 없었다.

그냥 황당하고 허무하고 어이없는 사고였다.

이후 검도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선배에게 개인적으로 미안함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때 날 보러 부산에 오지만 않았더라면, 나와 술자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후회 등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나는 임관 후 강원도 12사단이라는 곳으로 배치받았다.

소위임관 이후 검도는 중위 진급 때까지 수련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지 않을 것도 있지만,

검도에 대한 열정보다 군대 내에서 장교로서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 내가 있는 지역이 강원도내에서는 검도로 매우 유명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 부대에서 짬밥이 되었을 무렵 다시 검도를 시작했다.

인제 원통 그곳에 검도장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 강원도에서 유명하신 J선생님이 운영하는 도장에서 수련하게 되었다.

시골인지라 성인 수련 인원은 많이 없었다.

그래도 난 주 2회 이상 수련을 하기 위해 진부령에서 원통까지 이동하여 검도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가르침을 받아 수련을 한 결과로 3단에 승단하게 되었다.

3단 승단 심사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춘천에 있는 오월당이라는 도장에서 강원도 전체 검도인이 모여 승단심사를 하게 되었기에

난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차를 끌고 열심히 달려갔다.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에 근무를 했고 점심 전에 부대 전 간부 회의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군대 내 문화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전 간부 모아 놓고 '자아비판' 같은 것도 했었으니 얼마나 군대조직이 폐쇄적이었던가....

암튼 대대장이 그날따라 말이 많아져서 12시 정각에 마치게 되어 1시에 시작하는 심사일정에 참가를 위해

열심히 달려갔지만, 이미 심사는 중반에 이르고 있었다.

다행히 J선생님이 진부령에서 근무 마치고 오느라 늦은 군인인데 심사를 볼 수 있게 부탁하여 중간에

운 좋게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군인이었고 체력도 어느 정도 훌륭했기에 대련 심사를 인제군청 실업팀 선수와 했음에도 절대 어렵지 않은 경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사를 마치고 심사위원장인 대한검도계의 유명한 원로 L선생님이 도장 입구에서 나를 보고는

" 군인이라고? 넌 검도의 본(태권도로 따지면 품세라고 보면 될 듯)만 더 연습하면 되겠다. "라고 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으나 느낌이 칭찬처럼 들렸다. 그리고 J관장님께서 다음날 합격했다고 알려주셨다. 대신 그 원로 선생께서 특명으로 검도의 본 수련을 특별 지시하셨다고 도 했다. 이렇게 3단 승단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1차에 합격, 이후 4단도 2007년에 1차에 승단하여 지금 14년째 4단이다.

이미 당시 4단 승단하신 분들은 5단, 6단 정도의 단을 취득했겠지만, 난 4단 승단 이후 여러 가지 핑계와 개인적인 상황으로 승단에 도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검도를 사랑하고 즐기고 있다. 운동 자체가 좋은 것이지 간판이 뭐가 중요하나 라는 생각이 40대부터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미 난 대한검도회의 불합리한 제도 등에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고 승단 보다 검도를 즐기는 것에 심취되어 있다.

2달 전 2007년 4단 승단 기념으로 맞추어 착용했던 호구가 너무 오래되고 낡아 새로 호구를 맞추게 되었고  맞춘 호구를 수령했다. 비록 비싼 수제호구는 아니지만, 실속 있는 제품으로 2달 만에 받았기에 너무 기뻤다.

검도인에게는 호구만큼 중요한 장비도 없을 것이다. 차량을 14년 타다가 새 차 산 느낌이랄까?

어제는 새 호구를 착용하고 약 2달 만에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코로나로 여러 상황이 어렵지만

그래도 검도라는 운동이 내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운동을 마친 후 기도했다.

내 나이 43세 앞으로 10년은 이 녀석(새 호구)하고 검도를 할 것이기에 50대의 새로운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앞으로의 검도 수련에 잘 부탁한다고 손이 파란색 물이 들 때까지 쓰다듬고 만져줬다.

앞으로 10년을 함께할 내 새 호구


손과 발 등으로 직접 타격을 하지 않고 죽도라는 매개체와 상대의 눈을 통해 마음을 읽으며 수련하는 매력적인 스포츠 검도, 지금 누군가가 시작한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누구나 시작을 할 수 있지만 선택받는 자만이 평생 검도를 실천할 수 있다.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혹시 궁금하시다면, 검도의 매력에 한번 도전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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